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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뜬 무지개…퀴어문화축제 참가기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에이로맨틱’ 깃발을 들고서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9월 23일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분명 설레는 마음에 새벽부터 분주했을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 1회 부산 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의 일출 시각은 아침 6시 12분이었다. 나는 6시에 숙소를 떠나 소원을 이루어주는 영험한 사찰이라는 해동용궁사를 향했다. 해돋이 바위 너머로 무리 지어 날아가는 비둘기들도, 바다를 지그시 바라보는 관음대불도, 사찰로 향하는 돌계단 하나하나도 절로 감사한 마음을 품게 만드는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두터운 구름 사이로 일출을 보고, 대웅전에서 108배를 드리며 부산 퀴어문화축제의 성공을 기원했다.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왔어요!”
경기 남부에 거주하는 나는 할인이 되는 KTX 표를 찾아서 금요일 아침에 서울을 출발해 일요일 아침에 부산을 떠나는 차편을 예매했다. 40% 할인을 받아도 차비가 꽤 부담되는 금액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는 지방 거주자들의 부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비에 드는 비용 대신에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호텔이 아닌 호스텔을 예약했다. 가장 저렴한 혼성 10인실 도미토리가 1박에 만 오천원. 어쩌면 부산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온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특급호텔에 머무르는 것보다 기대가 되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준비해 간 대형 무지개 깃발을 배정받은 침대에 걸었다.
▶ 부산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러 예약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대형 무지개 깃발을 침대에 걸었다. ⓒ도영원
호스텔 관리자가 체크인을 도와주면서 무슨 일로 부산에 왔냐고 묻길래, 냉큼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관리자는 그런 축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은 “아!”하고 탄성을 내지르며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 후로도 택시기사 아저씨나 음식점 주인 아주머니들이 부산에는 무슨 일로 왔냐고 물을 때마다 꼬박꼬박 부산 퀴어문화축제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드렸다. 그리고 이들이 성소수자와 관련된 행사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갖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빌었다.
두근두근 축제의 날이 밝다
해동용궁사에 갔다가 해운대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이미 9시쯤이었다. 부스 행사가 시작되는 시간은 10시였지만, 준비하는 과정부터 함께하고 싶어서 곧장 축제가 열리는 구남로 문화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은 짐을 가득 채워온 가방을 풀고 현수막을 거는 등 부스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서울의 퀴어문화축제에서 보았던 친숙한 부스들도 상당수였지만, 처음 보는 부산 소재 대학교나 단체들의 부스도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무엇보다 유쾌했던 경험은, 분명 서울에 사는 걸로 알고 있는 지인들과 약속도 없이 해운대에서 계속 마주쳐서 난리법석을 떨며 인사하는 일이었다. 마치 명절을 맞아 고향에 오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금세 10시가 되고, 행사가 시작되었다. 나는 먼저 자신의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을 자유롭게 적어달라고 적혀 있는 커다란 판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아직은 텅 비어 있는 판 한가운데에 내 성정체성과 지향을 붙이면서 누가 읽어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나 잠시 걱정했지만, 물론 그런 고민은 필요 없었다. 내가 붙인 포스트잇은 곧 수많은 사람들이 붙인 솔직한 메모들 중 하나가 되었다.
▶ 1회 부산 퀴어문화축제 부스 중에서. 혐오 발언 스크랩 캔버스와 이를 훼손할 물감이 준비되어 있다. ⓒ도영원
그 옆의 부스에서는 혐오 발언을 스크랩한 캔버스를 두고 물감으로 자유롭게 이를 덮어 ‘혐오를 훼손’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캔버스에 낙서를 하고, 다른 부스에서 구입한 혐오발언에 반대하는 스티커를 여기저기 붙였다. 잠시 후에 다시 와보니 누군가 그 스티커를 펜으로 그린 예쁜 하트로 장식해둔 것이 보였다.
어떤 부스에서는 내가 들은 혐오 발언을 적어 붙이는 활동이 있었고, 또 다른 부스에서는 혐오 발언을 적어 준비된 종이 파쇄기에 신나게 갈아버릴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종이는 곱게 갈린 채 통 안에서 섞여 무지개를 만들었다.
물론 가지고 싶었던 배지와 책, 스트랩 열쇠고리를 구입하는 것도 빠뜨릴 수 없는 퀴어문화축제의 재미였다. 읽고 싶은 자료집이 많았기 때문에 곧 가방이 안 닫힐 정도로 짐이 많아졌다. 이런 상황을 예견한 나의 예리한 한 수! 내가 잡은 숙소는 퀴어문화축제 현장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일단 숙소로 돌아와 짐을 모두 비우고, 샤워를 한 뒤 준비해 온 ‘퀴퍼 의상’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혐오 세력과의 조우
양팔에는 금박 타투 스티커와 팔찌들, 그리고 방금 구입한 “무지개 조폭” 완장을 휘감고, 가방에는 성소수자 플래그 뱃지들을 주렁주렁 달고, 또 무지개 티셔츠를 입고 굽이 높은 검은 부츠를 신은 내 모습.
아까의 복장과는 달리 지금 나를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숙소를 나서 축제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 시장을 통과하면서, 약간의 흥분과 긴장감이 내 목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처럼 몸을 휘감았다. 많은 시선이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그중 유독 적대적인 시선은 ‘동성애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 같았다. 하지만 한 무리의 해외 관광객들은 나를 향해 크게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
▶ 부산 퀴어문화축제 행사장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동성애 반대’ 시위자들의 피켓팅 ⓒ도영원
그런데 행사장에 거의 도착한 순간,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부채 받아가. 덥지? 어때, 부채가 있으니까 시원하잖아. 부채 받아가.”
다정한 얼굴로 다가와 땀이 흐르는 내 얼굴에 부채질까지 해주는 나이 지긋한 여성이 내미는 것은 커다랗게 ‘동성애 NO’라고 적힌 부채와 전단지였다.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내가 퀴어라는 것을 알고서 일부러 ‘동성애 반대’ 홍보물을 들고 가게 하려는 것인가? 나는 난처한 미소를 흘리며 계속 고개를 돌리고 몸을 피했지만, 그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시종일관 웃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행사장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동성애 반대’ 시위자들의 피켓을 읽으면서, 그제야 이들의 ‘전략’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켓에는 ‘얘들아 돌아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좋은 의도’에서 나온 친절한 제스쳐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문구를 읽은 성소수자들이 감동의 눈물이라도 흘릴 거라고 기대한 것일까? 그러나 퀴어인 나에게 다정한 태도로 접근해서 퀴어혐오 광고물을 받아 들게 만들려는 그 행위는 “동성애자 죽어라” 하고 욕을 하고 침을 뱉는 것보다 오히려 더욱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혐오시위자 중 많은 수는 자녀가 있을 법한 나이로 보였다. 아니, 나도 어떤 부모의 자녀로서 그냥 그들의 성소수자 자녀를 상상해보고 싶었다. 축제 참가자들을 향해 “정신 차려 이 녀석들아!”라고 호통치는 한 혐오시위자를 보면서, 나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이 ‘동성애 축제’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을 옳은 길로 계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을 이들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했다.
부산 퀴어문화축제에서 서울에 사는 지인들을 잔뜩 마주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부산에 거주하는 성소수자들이 마음껏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특히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축제에 왔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들켰을 경우의 리스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SNS에서 지방에 사는 성소수자들은 아웃팅(당사자의 의사나 동의 없이 타인에 의해 성정체성이나 지향성이 제3자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자기 동네에서 퀴어 행사가 열려도 참여하기 힘들다는 글을 보았다.
내 친구는 굴하지 않고 이 날 축제에 참여한 부산 토박이 중 한 명이었는데, 누구보다도 도발적이고 아름다운 차림으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차례 같이 사진을 찍자는 요청을 받는 그는 축제의 별처럼 빛났고,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며칠 뒤에 크게 좌절한 친구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엄마가 그 의상을 버리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에이로맨틱’ 깃발을 들다
부스 행사는 해운대구청 측과의 조율로 예정보다 30분 일찍 끝나고, 곧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스텝들이 고군분투로 싸워가며 혐오시위자들의 난입을 막아냈던 행사장을 벗어나, 우리는 천천히 혐오시위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거리로 나섰다. 다시금 흥분과 긴장으로 몸이 떨렸다.
▶ “퀴어 아이가” 슬로건으로 개최된 1회 부산 퀴어문화축제에서 에이로맨틱연대 깃발을 든 내 모습. ⓒ도영원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해 본 횟수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 날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했다. 내 손에는 ‘에이로맨틱연대’라고 적힌 초록색 깃발이 들려 있었는데, 에이로맨틱(aromantic: 로맨틱한 끌림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 wiki.asexuality.org/Aromantic_FAQ) 플래그가 그려진 깃발만이라도 함께 하고 싶어서, 출발 하루 전날 부랴부랴 제작한 깃발이었다.
지난 4월 <일다>에 에이로맨틱 칼럼(당신의 로맨틱한 로망에 딴지를 걸어드립니다)을 쓴 뒤, 나는 최대한 많은 에이로맨틱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다. SNS 계정을 만들고, 에이로맨틱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리트윗했다. 지난 8월에는 에이로맨틱 수다 모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게 만나본 많은 사람들이 퀴어문화축제에서 에이로맨틱 굿즈나 깃발을 찾아볼 수 없었던 아쉬움을 말했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부스나 다른 행사를 준비할 여유는 없었지만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것 정도는 하고 싶었다. 부산 퀴어문화축제에 단 한 명의 에이로맨틱이 있다면, 적어도 그에게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만으로 보람이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은 정말 함께 변해가는 것이 맞나 보다. 2017년 부산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 나는 에이로맨틱 플래그 배지를 발견했다. 올해 서울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정체성과 지향성을 위한 배지를 다수 준비하여 호평을 받았던 ‘인권법률공동체 두런두런’의 부스였다. 행사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벌써 이 배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도 몇몇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SNS에서 봤어요”하며 에이로맨틱 깃발을 알아보고 다가와서 따뜻한 격려를 건넸다. 나는 행사장을 돌아다니며 준비해 간 에이로맨틱 스티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어떤 사람이 “여기 계셨구나! 아까부터 찾고 있었어요.”하고 활짝 웃으며 스티커를 받아들었을 때에는 너무 반가워서 춤이라도 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축제의 꽃 퍼레이드, 자랑스러운 우리의 행진
퍼레이드가 시작되고, 참가자들은 경찰들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혐오시위자들과 나란히 행진했다. ‘동성애를 멈춰라, 에이즈를 멈춰라’ 따위의 피켓을 들고 있는 이들은 우리와 불과 1~2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경찰의 보호가 있어서인지 달려들거나 하지 않는 점만은 다행이었다. 확성기와 십자가, 심지어 성소수자 혐오적인 내용의 동영상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대형스크린까지 갖춘 혐오 시위의 규모가 놀랍기는 했다. 이들의 숫자도 퀴어문화축제의 규모에 비교하면 지나치게 많아서,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온 걸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수가 많다 한들 한 자리에 모인 성소수자를 멈출 수 있을 리 없다. 우리는 혐오 발언 따위에 위축되기에는 너무 즐겁고, 행복하고, 신이 난 상태였다. 나는 성소수자부모모임 회원들의 바로 옆에서 행진을 하며 “혐오는 나빠요, 차별을 멈춰요”를 함께 연호했다. 통곡을 하며 동성애를 멈추라는 혐오시위자의 앞을 지나갈 때, 내 옆에 있던 누군가가 큰 소리로 퉁명스럽게 “와 울고 난리고!” 하고 맞서서 모두가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 부산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혐오 발언에 위축되기에는 우리는 즐겁고, 행복하고, 신이 났다. ⓒ도영원
한참 행진을 하다가 깃대에 묶어 놓은 깃발이 미끄러져서 다시 추스려야 했는데, 5m가 넘는 깃대 끝에 달린 깃발을 혼자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순식간에 대열에서 낙오되어 혐오시위자들에게 둘러싸이나 했는데, 퍼레이드의 맨 뒤쪽에 있던 한 사람이 깃대를 함께 들고 내가 대열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땀을 뻘뻘 흘리며 행진을 하는 나를 보고, 내 옆에서 나란히 걷던 다른 참가자 한 명이 “덥죠?” 하고 웃더니 손에 들고 있는 휴대용 선풍기를 내 쪽으로 들고 바람을 보내주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퀴어문화축제의 이런 점이 정말 좋다. 작년에 처음으로 서울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했을 때, 잘못해서 옆 사람 머리를 풍선으로 몇 번이나 치고는 당황해서 사과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그 사람은 상냥하게 웃으며 “괜찮습니다!”라고 말해주었던 것이 기억난다. 시청 광장이 아닌 서울의 다른 곳에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바로 그런 정서가 나를 계속해서 퀴어문화축제로 데려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40분 가까운 길고 즐거운 행진 끝에 퍼레이드는 무사히 행사장으로 귀환했다. 깃발들은 아쉬운 마음에 높이 매달린 채로 내려올 줄을 몰랐다. 나는 아까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찾아 인사를 나누고, 저녁을 먹었다. 뒤풀이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카페로, 바로, 주점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친구들과는 그간의 근황도 나누고, 지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하고 싶은 활동들에 대한 단서를 찾기도 했다. 바쁜 하루가 끝날 때는 즐거운 시간만큼이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1회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렇게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축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앞으로도 쭉 이어지게 된다면, 축제의 역사는 곧 나의 역사가 될 테니까. 나는 참가자 중 한 사람일 뿐이지만, 내가 잘 하고 열심히 하는 만큼 축제도 함께 성장할 거라는 사실에 두근거린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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