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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 간병, 그 기억을 떠올리면…

비혼여성의 가족간병 경험을 듣다② 산하


※ 고령화와 비혼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비혼여성들이 부모나 조부모, 형제를 간병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개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다>는 가족을 간병했거나 간병 중에 있는 비혼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공유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병중이던 부모님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틈틈이 또는 줄곧 ‘돌본’ 기억이 있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엄마를, 협심증과 신부전증을 앓고 있던 아버지를 간병했었다. 엄마가 2년가량 투병하다가 돌아가신 지가 올해로 꼭 10년째다. 수년 전부터 집과 병원을 오가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1년가량을 집에서 가까운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3년 전쯤 돌아가셨다.

 

통증과 사투 중인 엄마를 지켜보는 일

 

10여 년 전, 서울에서 살면서 유학 준비를 위해 직장생활 틈틈이 어학원에 다니던 때였다. 강의를 듣다가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위암에 걸렸으며, 앞으로 반년가량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유학은 기약 없이 미뤄졌지만, 직장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주말이나 되어야 엄마를 뵈러 고속버스로 4시간 반 거리인 부산에 다녀올 수 있었다.

 

당시 간병은 부모님과 한집에 살고 있던 남동생이 도맡아 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간병할 엄두를 못 내는 것 같았고, 엄마 역시 그편을 원치 않았다. 동생이 직장을 그만두고 상태가 빠르게 악화되고 있는 엄마를 본격적으로 간병하겠다고 했을 때, 나머지 가족은 받아들였다. 나 역시 개의치 않았다. 엄마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병원비 압박이 컸고, 동생이 나보다 더 ‘안정된’ 직장에 다니던 중이었지만 말이다. 정이 두터운 모자지간인데다 평소 이것저것 섬세하게 챙길 줄 아는 동생이 가족 중 누구보다 엄마를 더 잘 돌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엇보다 동생이 자진하여 엄마를 간병하겠다고 나섰으므로 갈등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엄마가 투병 중이던 2년 동안을 대체로 남동생이 간병을 했고, 나는 주말이나 휴가 때, 새로운 일을 찾아 시험 준비를 하던 몇 달간, 다시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주말이나 연휴 때 병원을 오갔다. 그리고 엄마에게 생이란 게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을 무렵, 작정하고 부산에 내려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약 열흘간 엄마 곁을 지켰다.

 

▶ 투병중인 엄마와 함께 갔던 바다. 엄마는 바다를 좋아하셨다.   ⓒ산하

 

위암 말기였던 엄마는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마약 성분이 포함된 약물을 복용해야 잠들 수 있었다. 입속에 죽을 떠 넣어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고 기운을 조금 차렸다 싶을 때는 휠체어를 타시게 해서 병원 한쪽에 마련된 작은 정원에 함께 나가 앉아 해바라기를 하곤 했다.

 

어느 날 밤인가는 엄마가 몸을 일으켜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가더니 평소엔 잘 보지도 않던 거울을 오랫동안 가만히 들여다보던 모습이 기억난다. 평소 50킬로그램 남짓 되던 몸무게가 35킬로그램까지 빠져서 앙상해질 대로 앙상해진 얼굴이며 몸을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이미 한쪽 시력이 꺼진 후였고, 나머지 한쪽도 흐릿해진 상태였건만 엄마가 보려고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병이 더 진행되어 돌아가시기 1~2주 전부터는 마약 성분이 든 진통제도 듣지 않아 몹시 힘들어 했다. 음식도 거의 못 드셨고, 잠도 거의 못 주무셨다. 자주 의식을 놓기도 하고 울기도 하셨다. 60대 중후반 ― 세상을 뜨기엔 아직 이른 나이였다. 회한 많은 생애를 보내고 이제 좀 삶의 질곡에서 놓여났나 싶었는데 덜컥 병을 얻어 집요한 통증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나는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자면서 거동이 힘든 엄마의 기저귀를 갈고 몸을 닦아 드리고 병원 식사와 탕약을 권하고, 매일 물을 포함한 음식물 섭취량과 배변량을 체크해서 간호사에게 알렸다. 엄마의 멍한 시선을 따라가 보거나 대답을 못 하시리란 걸 알면서도 말을 걸어보거나, 병실 밖으로 나가 울거나, 엄마가 한숨 돌리며 잠깐 눈을 부친다 싶을 땐 책이나 신문 따위를 들여다보고는 했다.

 

그리고 병실 밖으로 벚꽃이 환하던 만우절 아침, 엄마는 거짓말처럼 세상을 뜨셨다.

 

▶ 2008년 여름, 엄마에게 쓴 ‘부치지 못한 편지’ 중에서.    ⓒ산하

 

외면해온 아버지를 간병하게 되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난 아버지가 계신 집에 거의 가지 않았다. 서울로도 가지 않았다. 몇몇 지인이 사는 농촌 마을을 떠돌며 텃밭농사를 짓기도 하고 배낭을 짊어지고 몇 달씩 다른 나라로 날아갔다 오기도 했다. 결혼한 오빠가 며칠에 한 번씩 아버지를 뵈러 가서 당신을 챙긴다는 얘기를, 아주 가끔씩 걸려오는 오빠의 전화를 통해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실 당시엔 특별히 편찮은 데가 없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당신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세월의 더께 탓에 엄마와 달리 자식들로부터 살뜰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혼자 살고 있다시피 하던 아버지였다.

 

연락을 잘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가도 1년에 두어 번, 하루 이틀 얼굴 비치다 오는 게 거의 다였으므로 아버지가 어떤 상태인지 속속들이 모르고 있던 내게 어느 날, 오빠가 긴 이메일을 보내왔다. 아버지가 입원을 했고 오래 걸리면서 돈도 많이 드는 치료가 필요한 병중이라고. 입원중인 지금도 그렇지만 퇴원한 후에도 집과 병원을 오가며 누군가 아버지를 지속적으로 돌봐야 할 상황이라고. 그 일을 네가 해주면 좋겠고, 아버지도 그편을 원하고 있는 듯하니 이제 그만 좀 떠돌고 이 집에 와 있으면서 아버지 돌보는 일을 할 수는 없겠냐고.

 

원래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별반 없기도 했거니와 엄마의 사망 이후엔 정말이지 아버지에게 무심했던 나를 돌아봐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남자형제들에 비해 물질적인 기반이 없는 내가 몸으로라도 자식의 도리란 걸 해야 할 때가 온 건가 싶기도 했다. 병원비는 오빠와 남동생이, 돌봄노동은 딸인 내가 ― 뭐 이런 상황이 도래한 걸 파악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보험 가입의 필요성을 느껴 아버지 명의로 보험에 가입하려고 했으나 70세가 넘은 나이라 가입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병원비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으므로 오빠와 남동생은 하던 일을 계속 해가며 돈을 벌어 병원비를 대야 하기도 했다.


오빠의 설득과 요청을 받아들인 나는 아버지가 사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본격적인 간병을 하게 된 거였다. 아버지는 다양한 연령대의 남성환자 4~5명과 한 병실을 썼다. 아내 어머니 여동생 딸 ‘여성’직업간병인이 그들을 돌보고 있었다.(예전에 엄마가 계시던 병실들에서도 집중적인 간병을 하던 이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었지 남성을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따금 남편이며 아들이 다녀가긴 했으나 거의 종일 곁에서 본격적인 간병을 하는 이들은 환자들의 딸이거나 며느리거나 자매거나 엄마였다. 내 동생은 꽤나 드문 경우였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수술을 받던 날 하루, 병상에 딸린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잤다. 그 다음날부터는 병실에서 잠을 자지는 않고 매일 병원을 오갔다.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쯤 가서 식판을 내놓고 양치하는 걸 도왔다. 밤사이 채워진 아버지의 소변통을 비우고, 마실 물과 약을 챙겼다. 병실에 딸린 화장실이나 병실과 비교적 가까웠던 욕실 정도까지는 천천히 아버지 혼자 걸어서 이동하는 게 가능했으므로 옆에서 링거대를 잡아주며 동행하는 정도였다. 치료나 검사를 위해 다른 층으로 갈 때는 휠체어에 앉으시게 해서 휠체어를 밀고 다녀오곤 했다.

 

점심식사 후 아버진 제법 긴 낮잠을 주무셨다. 나는 이때, 한숨 돌리면서 볼일을 보거나 근처 시장통을 어슬렁거리다 오곤 했다. 오후 5시 반에서 6시 사이, 아버지가 저녁식사를 마치면 식판을 내놓고, 약 드시는 것까지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진 식사량이 매우 적었다. 난 아버지가 남긴 밥과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병원 근처 분식점에서 김밥을 사 들고 가거나 이따금씩 조미김이나 밑반찬 한두 가지랑 밥만 조금 싸들고 가서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했다.

 

입원과 퇴원을 두어 번 반복하다가 투석을 겸하는 요양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남아 있는 당신의 재산이랄 게 별반 없었음에도 1인실을 원했다. 그래도 된다고 판단했던 모양인지 그 부담을 자식들에게 지우는 것에 대해 별반 개의치 않아 했다.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입원할 즈음 나는 주중에 며칠만 출퇴근하는 일터에 나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던 집을 일상적으로 비워둘 수가 없어서 그 집에서 기거하며 퇴근길에 들러 아버지 옆에 앉았다가 오곤 했다. 아버지의 끼니를 매번 챙긴다거나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는 일 등의 돌봄노동에서 제법 놓여나긴 했으나, 그 집이 있는 도시를 떠나 새로운 거처에서 원하던 농사를 짓고 살아갈 만한 상황이 되지는 못했다. 그리 긴 생이 남아 있어 뵈지 않는 아버지 옆에 있어도 상관없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요양병원에 계실 때는 덜했지만, 쓰러지셔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집과 병원을 오갈 때, 집에서 매 끼니를 챙기며 아버지 곁을 지켜야 했을 때, 꽤나 자주 내속에서 다툼이 일곤 했던 것 같다. 내가 딸이자 비혼여성이고 크게 할 일 없어 보이는 ‘반백수’라서 간병을 강요받는 듯한 느낌과, 스스로 지운 얄팍한 의무감과, 성별과는 크게 상관없어 보이는 ‘약자를 돌보는 일에 마음이 기우는’ 내가 지닌 어떤 성향 내지는 ‘선한 의지’ 따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분열된다고 해야 하나. 무책임하면서 더할 나위 없이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오랫동안 아내와 자식들을 힘들게 하다가, 이제는 늙고 병든 모습으로 약자의 처지가 된 아버지를 향해서는 엄마를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복잡한 심경이 되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를 간병하느라 온종일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하던 그때, 만약 환자나 그의 가족이 많은 부담을 안고 간병인을 두거나 가족이 보호자가 되어 간병인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국가에서 지원하는 서비스가 널리 실시되고 있었더라면 난 기꺼이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건강보험 적용 시범사업의 하나로 최근 몇 년 새 도입되어 실시중인 ‘간호·간병통합서비스’(2013년 7월에 국가 시범사업으로 처음 실시되었다) 같은 것이 전국 병원 곳곳에서 두루 실시되고 있었더라면 말이다.

 

▶ 부모님의 납골묘 앞에서.  ⓒ산하

 

병원이 임종을 앞둔 몸을 ‘다루던’ 방식

 

부모님의 죽음이 아주 가까이 왔을 때, 담당의들의 권유에 따라 상대적으로 편히 머물던 병실을 떠나서 옮겨가게 된 장례식장이 딸린 큰 병원들에서 부모님을 비롯한 환자들의 병든 몸을 ‘다루던’ 방식을 떠올리면 수년이 지난 지금도 화가 난다.

 

엄마는 한방병원 2인실에 계시다가 구급차를 타고 호스피스병원 응급실을 거쳐 그 병원 3인실로 가셨다. 그리고 사흘 후 눈을 감으셨다. 그 사흘간 인상 깊게 목격한 건, 의료진을 포함한 병원 직원들의 죽음을 터부시하는 태도였다. 환자들이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에 대해 그들이 외면하고 있다고 느꼈다. 대부분 노인들인, 죽음을 목전에 둔 이들이 커다란 병실에서 다닥다닥 붙은 수십 개의 병상에 성별 구분 없이 누워 있었다. 병실에서는 악취가 풍겼고, 일하는 이들이 커튼도 치지 않고 함부로 환자복을 벗기고 입혔다. 새로 지어 시설이 쾌적하다고 해서 옮긴 병원이었건만 겉만 번드레할 뿐 실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이들을 일일이 돌보는 일이 힘든 건 알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사람을 어찌 그리 ‘함부로’ 대할 수 있는지. 이윤을 추구하는 병원 운영 시스템의 폐해이기도 했겠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 병실에 다녀온 후 병원 측의 계속되는 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입실을 거부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에서 편한 상태로 돌아가시게 하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결국 앞서의 병실 근처에 있는 비어 있던 3인실로라도 옮기라고 했고, 우리 가족은 받아들였다. 그곳에서 엄마는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요양병원 1인실에 계시던 아버지는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담당의의 권유로 요양병원에서 멀지 않은 한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가야 했다. 앙상한 몸, 초점 잃은 퀭한 눈 ― 누가 어떻게 봐도 얼마 남지 않은 목숨임을 모를 리 없었을 텐데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아버지의 몸을 두고 온갖 기구가 동원되어 각종 검사가 이뤄졌다. 아프다고 내내 신음소리를 내도 검사는 막무가내로 진행되었다. 보다 못해 의사를 찾아가 항의했으나, 병원에서 정한 매뉴얼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말을 듣는 게 다였다. 응급실에서 이틀간 약간의 물 외 아버진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다.

 

아수라장 같은 그곳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아버진 홀로 임종을 맞았다. 잠 못 들고 집에서 ‘대기’ 중이었건만, 병원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한 시간가량이 지난 뒤에야 연락을 해왔다. 가족들이 왜 이제야 연락을 받아야 했냐고 물었으나 담당 의사는 난처해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이 없었다. 병실을 오가는 간호사들은 고단하고 분주해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두 분은 긴긴 잠에 드셨다. 한평생이 몇 줌 가루로 바수어져 공동묘지 한 귀퉁이에 묻히었다. 당신들의 ‘그날’을 돌아보면 아득하다. 병을 어떻게 겪고 죽음을 어찌 맞이할 것인가에 관한 구체적인 상을 아직 상세히 그리고 있진 못하지만, 또 다시 가까운 이들의 병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야 할 때가 온다면(그 당사자가 내가 된다고 해도) 적어도 내 의지가 작동하는 한에서는 두 분을 떠나보낼 때처럼 그들이나 내가 죽음을 맞도록 하지는 않을 것 같다.

 

▶ 부모님 묘가 있는 공동묘지의 소나무.   ⓒ산하

 

숨어있는 노동, 돌봄이 족쇄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 것인가’만큼이나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점점 더 많은 이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반세기 사이, 집에서 태어나고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게 자연스럽던 시절은 시나브로 저문 듯하다. 이제 대다수가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어가고, 한 인간이 태어나 살다가 죽기까지의 길거나 짧은 과정에는 무수한 ‘돌봄’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제껏 그 역할을 대체로는 여성들이 해왔다.

 

부모님을 간병하기 위해 병원에서 지내거나 병원을 오갈 때,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오랜 시간 집중적인 간병을 해오는 중이던 많은 여성을 만나고 보았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거친 잠자리와 부실한 식사를 감내하며 묵묵히 간병이라는 지루하고 고된 돌봄노동을 해내고 있었다. 일찍이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지적한 것처럼 ‘숨어있는’ 노동 ― 대가 없이 하는 노동이면서 노동하는 당사자의 “자립과 자존을 파괴하는” 그림자 노동의 대표적인 예가 (가족)간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치료 과정의 일부인 간병이 직업간병인을 둘 수 없는 처지인 가족일수록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적지 않은 병원에서 간병하는 가족에게 24시간 환자 옆에 있으면서 환자를 돌볼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국가는 이러한 현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된지 오래임에도, 필요한 제도를 마련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이 사회 곳곳이 간병을 비롯한 여성들의 갖가지 ‘그림자 노동’에 의해 오늘도 지탱되고 있다.

 

복지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못한 사회일수록, 살아가면서 처하게 되는 갖가지 곤궁 앞에서 가족이라는 고리는 족쇄로 작동하기 쉽다. 국가는 허술한 사회안전망을 ‘가족 된 도리’와 의무를 강조하거나 강요하여 그들의 노동력과 지갑을 앗고 터는 것으로 보충하려 한다. 늘어나는 평균 수명만큼이나 병의 가짓수와 환자 수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지만, 간병을 책임져야 하는 환자 가족들이 드나들 수 있는 복지 서비스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내가 부모님을 간병하는 동안 병원 안팎에서 목격하고 겪어야 했던 고충과, 우리 사회가 질병이며 죽음을 대하고 다루는 불합리한 태도의 문제는 결코 나나 우리 가족만이 겪어온 문제가 아닐 것이다. 간병과 간호를 병행할 수 있는, 다양한 ‘성별’을 아우르는 전문 인력이 대폭 개선된 ‘노동환경’ 속에서 성차를 떠나 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가 하루라도 빨리 마련되어 자리 잡아 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환자들의 가족(주로는 여성인)에게 부과되어온 간병이라는 무거운 짐과 더불어, 환자 당사자가 몸의 통증에 더해 떠안게 되는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기를….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다치고 병든다. 크고 작은 아픔이 몸에 깃들었다 떠나고를 반복하다가, 깊이 앓아눕기도 하면서 몇 가지 병을 매달고 늙어가다가 죽음 쪽으로 이우는 것이 대체로의 인생 아닌가. 이렇듯 돌보아지기도 하고, 돌보기도 하다가 생은 저물어간다. 그 과정이 돌봄의 주체에게도 객체에게도 더 가볍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육아나 부모 부양이 그렇듯 가족간병이라는 돌봄노동도 족쇄나 질곡으로 여겨지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부모님을 돌보며 하고는 했다.

 

간병을 비롯한 돌봄 행위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제도적 변화가 인식의 변화를 불러온다면 나아가 죽음이며 이에 관한 사유 또한 지금처럼 삶과 분리되어 한쪽에서 웅크리고 있지만도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삶’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죽음’에 관해서도 공공연히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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