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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섬망’, 한 달간의 간병이 내게 남긴 것

비혼여성의 가족간병 경험을 듣다①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신우미  


※ 고령화와 비혼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비혼여성들이 부모나 조부모, 형제를 간병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개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다>는 가족을 간병했거나 간병 중에 있는 비혼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공유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

 

내 나이 서른아홉, 아빠 나이 일흔 살 때였던 2015년 12월 어느 날 아침, 아빠가 대학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배를 쿡쿡 찌르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어제 저녁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갔는데 검사를 받아보니 급성 폐렴이라고 했단다.

 

병원으로 달려가 의사를 만났다. 폐렴이 패혈증(미생물에 감염되어 전신에 심각한 염증 반응이 나타나는 상태)으로까지 번진 상태였다. 양쪽 폐 중 한 쪽이 거의 다 염증으로 뒤덮여 있었다. 염증 때문에 몸에 산소 공급이 제대로 안 되고 있었다. 의사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떻게 몰랐냐면서 빨리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다고 말했다. 살 확률과 죽을 확률이 반반이라고도 했다.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 전혀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얘기였다. 고혈압이 있어서 약을 드시긴 했지만 아빠는 특별히 아픈 데 없이, 타고난 건강을 자만하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걸음도 나보다 훨씬 빨랐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40분을 걸어서 헬스를 하고 다시 40분을 걸어오는 양반이었다. 아프면 바로바로 병원에 가고 양약을 타 먹었다. 꼼꼼하고 깔끔한 성격이라서 가사노동도 도맡아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듯 아빠도 당신이 응급실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계속 두리번거리며 몸에 꽂힌 각종 링거 줄을 만지작거리고 심장박동, 산소포화도 등을 나타내는 계기판을 확인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불안이 아빠의 영혼을 잠식한 것 같았다.

 

▶ 아빠가 입원해 계실 때 매일 드나들던 병원  ⓒ신우미

 

은퇴 후 우울증을 앓던 아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빠는 정년퇴직 후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계셨다. 아빠 인생에선 직업적 성취가 가장 중요했는데 그게 없어지고 나니 별다른 인생의 의미를 못 찾는 것 같았다. 동네 할아버지들과 어울려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성격도 아니었고, 문화센터나 복지관에 가서 뭐라도 배우라는 엄마의 권유도 전혀 듣지 않았다. 오매불망 오빠 부부가 애 낳기만을 기다리면서 오빠 부부에게 스트레스를 줬다.

 

아빠에겐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무의미해 보였다.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여전히 그 일로 세상에 기여할 체력도 의지도 있었지만, 노년인 아빠가 그걸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이 사회 안에는 없었다.

 

35년 동안 매일 저녁 소주 1병을 반주로 곁들여 드셨던 아빠는 점심에도 소주를 1병씩 먹기 시작했다. 그것 때문에 엄마와 다툼이 생길 때면 새벽이나 아침에도 소주를 먹고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려고 하는 등 행패를 부리곤 했다. 한번은 엄마가 빨리 집에 와 보라고 해서 갔더니 아빠가 술을 먹고 나를 붙잡고 우는 것이었다. 아빠는 외롭고 서럽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아빠에게 연민이 들었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자식한테 신세지고 싶지 않다면서 독립적으로 살았던 아빠와의 관계가 변하고 있었다. 아빠가 응급실에 가기 약 보름 전의 일이다.

 

아찔한 선택, 인공호흡기

 

중환자실로 아빠를 옮긴 후 매일 아침, 저녁 정해진 시간에 면회를 갔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다음 날, 아빠는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무조건 회복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호자 동의 서명을 했지만 만약 인공호흡기를 달고서도 아빠가 회복하지 못했다면? 현행법상 인공호흡기는 한번 달고 나면 보호자가 원한다고 해서 뺄 수 없다. 인공호흡기를 한 채로 가족들과 어떤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아빠가 죽었을 수도 있다. 아찔하다.

 

당시 나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고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엄마한테 아빠 간병이 다 떠맡겨지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나에겐 3살 터울인 결혼한 오빠가 있는데, 오빠보다 사회생활 경험도 많고 친화력도 있는 내가 의사나 간호사와의 소통을 맡았고 병상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에 가면 아빠는 고열에 땀을 흘리면서 수면제나 근육이완제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의식이 있는 사람이 인공호흡기를 달면 거부반응이 심하기 때문에 이런 주사들을 놓는다고 한다). 그나마 정신이 있을 때는 상체를 벌떡 벌떡 일으키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아빠가 너무 낯설었다.

 

아빠가 자꾸 일어나려고 해서 간호사들은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손과 발을 다 침대에 묶어놓았다. 의사는 아빠가 벌떡 일어나 걸어서 중환자실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했었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아빠의 정신이 이상해지다

 

▶ 링거줄을 빼 버리는 바람에 손과 발이 묶여버린 아빠  ⓒ신우미


천만다행으로 일주일 정도 지나자 고비를 넘기고 염증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일반 병실로 옮기기 하루 전날, 의사가 나에게 아빠가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아빠가 불안이 심해서 그래요”라고 대답하면서 ‘무슨 의사가 저런 식으로 말을 해?’라고만 생각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중환자실, 멀쩡한 사람도 들어가면 미쳐버릴 수 있다는 중환자실에서 지내다보면 좀 불안해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두고 정신 이상 운운하다니.

 

하지만 6인실로 옮긴 후 하루 종일 아빠를 대면해 보니 그건 사실이었다. 아빠는 낮에도 밤에도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3분(문자 그대로 ‘3분’이다. 재 봤다)마다 한 번씩 깨서 “술 가져와라”, “담배 한 대만 피우자”라고 하거나 마치 여러 사람 앞에선 연사처럼 큰 소리로 연설을 하거나 끊임없이 주절거렸다. 엄마랑 나는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3분마다 아빠를 달래야 했다.

 

기억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엄마나 오빠, 나는 기억했지만 나머지 가족은 못 알아보았다. 집 주소는 예전 집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자신이 일했던 학교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섬망’이었다. 섬망은 불면, 초조, 안절부절못함, 소리 지르기 같은 과다 행동이나 환각 등이 자주 나타나는 증세를 말한다. 주로 노인들이 큰 수술을 하거나 입원했을 때 발병하는데 ‘심한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와 쇠약으로 인해 정상적으로 자신과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 뇌가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치매와 비슷해 보이지만 치매는 뇌세포가 파괴되는 것이고 섬망은 뇌기능이 일시적으로 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이상운 지음 <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문학동네, 참조)

 

아빠는 모든 상황과 사람을 통제하는 것으로 자신의 힘과 살아있음을 확인해왔다.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서는 특히 그랬을 것이다. 그런 자신이 갑자기 무력해져서 요도에 카테터(Katheter)를 연결해 소변을 봐야 하고 대변은 기저귀에 봐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나보다. 어떤 자유 의지나 선택권도 없이 자신의 몸을 외부에 맡겨야 하다니, 차라리 정신줄을 놔 버리는 게 더 나았던 거다.

 

아빠가 끊임없이 주절거리자 “잠 좀 잡시다”, “치매 아냐?”, “정신병원 가야 되겠네”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병실의 다른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미안하면서도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화가 뻗쳤다. 결국 하루 만에, 병실비만 하루 30만원이 넘는 1인실로 옮겨야 했다. 아빠의 섬망 증세는 나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어느 날은 창문에서 어떤 사람이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면서 신문으로 창문을 가리라고까지 했다.

 

3~4시간마다 한 번씩 도구를 아빠 입안에 넣어서 가래를 빼주는 것도 내 몫이었다. 환자가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작업인데도 보호자한테 맡기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도 그건 무섭다면서 나보고 하라고 했다. 그러다보니 집에 잠깐 쉬러갔다가도 금방 다시 나와야 했다. 오빠는 직장 때문에 밤에 잠깐 들렀다 집에 갔고 당시 일을 쉬고 있던 새언니가 낮에 잠깐씩 교대를 해 주었지만, 긴긴 밤은 엄마와 나의 몫이었다.

 

병실을 지키며 피폐해져가는 몸과 마음

 

더 이상 일에 차질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밤에 3분마다 깨는 아빠를 달래면서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곤 했다. 재택근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출퇴근을 안 하니 아빠로부터 거리를 둘 명분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점점 피폐해져갔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죽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연민이 가득했지만, 이제는 연민이고 뭐고 짜증과 미움만 커져갔다.

 

하루는 아빠가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게 해달라고 해서 엄마가 아빠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대변을 보고 아빠는 바지와 팬티를 올리지 않고 새언니와 내가 있는 병실로 나가려고 했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무너졌고 보호자 대기실로 가서 펑펑 운 다음에 집에 가 버렸다.

 

혼자 밤새 아빠를 지키면서 “제발 우리 아빠 잠들게 수면제 좀 강한 걸로 놔달라”고 간호사들에게 요구해야 했다. 집에 간 엄마는 전화를 해서 이 상태가 지속되면 아빠를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시켜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어느 날 저녁, 아빠가 묶인 팔과 다리를 잠깐만 풀어달라고 했다. 불쌍한 마음에 풀어줬더니 코에 꽂은 영양 공급 줄과 링거 줄을 단번에 빼버렸다. 다음 날 의사가 회진할 때, 내가 어제 있었던 일을 의사에게 말하니까 아빠는 고자질을 한다고 화를 내면서 내 얼굴을 발로 가격했다. 그 모습을 본 의사는 놀라서 바로 정신과 의사를 호출했다. 그제야 아빠는 정신과 진단을 제대로 받고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약을 먹으니까 회복이 빨랐다. 아빠는 밤에 잠을 자기 시작했고 서서히 기억력을 회복했다. 퇴원 후 한 달 정도 지나자 아빠는 완전히 예전 기억을 회복했다. 하지만 자신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던 사실, 섬망 증세를 보였던 사실은 기억하지 못했다.

 

‘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난 사회

 

▶ 아빠는 요즘 손녀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조카의 백일날!  ⓒ신우미


한 달 가량 지속된 간병 경험은 나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남겼다. 고령화 사회가 되었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아빠 세대의 노인들은 노년이나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아빠에게 죽음은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아빠에게 권하기 위해 ‘웰다잉교육’을 검색해 봤다. 유언장 쓰기, 관 체험, 연명치료에 대한 생각 정리하기 등의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극히 일부의 복지관에서만 웰-다잉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노년 세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고령의 부모와 함께 늙어가고 부모를 간병하게 될 자식 세대에게도 준비는 필요하다. 나는 아빠가 존엄하게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현대의 의료체계 안에서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때 닥쳐서 이걸 고민하는 건 너무 늦은 일이다.

 

간병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후에 엄마나 아빠가 암에 걸린다거나 치매를 앓게 됐을 때 자식들 중 내가 두 분 가까이 살거나 같이 살면서 간병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성이라서 돌봄에 적합하다고 여겨질 것이며, 실제로도 오빠보다 내가 더 잘 한다. 사람들은 오빠는 결혼했고 애도 있으며 “자기 가족을 먹여 살려야 되는 사람이라서” 직업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며 그럴 때 돈을 많이 못 버는 나의 일은 하찮게 취급될 것이다.

 

아빠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 읽었던 책 <나홀로 부모를 떠안다-고령화와 비혼화가 만난 사회>(야마무라 모토키 지음, 이소담 옮김, 코난북스)에는 일본의 한 르포 작가가 부모를 간병하는 비혼여성들과 비혼남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이 담겨있다. 부모를 간병하기 위해 일을 그만둔 사람들은 경력이 단절된다. 간병하느라 돈을 벌 수 없어서 부모 연금에 의지하니 이웃들로부터 “나이든 부모 등쳐먹고 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간병하면서 겪는 고충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고, 고통을 분담할 가족이 없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한다.

 

일을 하면서 간병을 하면 또 그 나름의 고충을 겪는다. “일하지 않고 개호(介護, 곁에서 돌보아 줌)에 전념하는 사람이 느끼는 불안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과 같다면, 일하면서 개호하는 사람이 느끼는 불안은 등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을 느끼며 달리는 것과 같다”(98p)는 것.

 

고령화와 비혼화가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분명 비혼 여성/남성들이 부모를 간병하는 사례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는 고작 자식이 치매 어머니를 모시다가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나, 부모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끔찍한 뉴스뿐이었다.

 

그제야 부모를 간병하는 비혼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나보다 훨씬 오랜 시간 아픈 부모를 돌보며 이미 많이 고단해하고 있었다. 자가면역 질환으로 양쪽 눈을 실명한 아빠를 간병했던 친구, 쉰 살이 다 되도록 부모와 같이 살면서 어디 한 군데 성한 곳 없는 부모 간병을 하다 보니 새벽에 응급실 가는 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졌다고 말하는 친구, 결혼한 언니와 동생들,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암에 걸린 아빠 보호자 노릇을 하다가 호스피스에서 아빠의 죽음을 맞이한 후 이제는 혼자 남은 엄마를 돌보며 사는 친구.

 

우리는 만나서 이야기했고 서로 감응했다. 친구들은 부모의 질병으로 인해 갑자기 삶의 리듬이 바뀌었지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 끝날 것 같지 않은 돌봄 노동에 대해 불평할 수도, 악 소리조차 낼 수도 없음에 절망하면서도 그 속에서 자기만의 통찰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부모의 죽음과 늙음, 병듦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고 있고 무엇을 할지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해야 한다. 또, 홀로 부모를 떠안은 이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전파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그럴 때 부모를 간병하면서 고립되어 있는 비혼 여성들은 자신의 고통을 설명할 언어를 갖게 될 것이고 ‘부모 간병’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을 게다.

 

▶ 엄마, 아빠와 함께 한 가을 단풍여행   ⓒ신우미

 

더 많은 비혼여성들의 간병 이야기가 나오길

 

지금도 아빠는 중환자실에 있던 날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퇴원 후에, 내가 당시 써 놓은 병상일지를 자신의 수첩에 옮겨 적으면서 “내가 이랬어?”를 연발했다. 내가 사전의료 의향서(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서약서) 얘기를 꺼내면 “돈 때문에 그러냐?”고 되묻는다.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싶어서 자서전 쓰기를 권했더니, 업적 중심으로 몇 년도에는 승진을 했고 몇 년도에는 무슨 상을 받았다는 리스트를 적고는 끝이란다.

 

자식이 부모 뜻대로 되지 않듯 부모도 자식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는 아빠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행동을 중단했다. 아빠는 다시 담배도 태우고 술도 마신다. 다행히 3월에 조카가 태어나서 요새는 조카 보는 낙과 카카오톡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얘기 보내는 낙, 드라마 챙겨보는 낙에 살고 있다.

 

아마 또 다시 내가 아빠나 엄마를 간병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엔 더 많은 비혼 여성들의 간병 이야기가 세상에 나와 있길 바란다. 그 이야기들이 나와 당신을 살릴 것이므로, 그게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이므로.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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