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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예찬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공간의 발견②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9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공간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한낮의 더위가 가신 마당은 선선하다. 저절로 큰 숨이 쉬어진다. 서늘한 기운이 가득한 마당은 밤이 주는 고요 속에 잠겨 있다. 날이 흐려 별도 없는 캄캄한 하늘 아래 멀리 서쪽 산에서 휘리리릭~ 밤 새 우는 소리만이 고요를 가로지른다.
여름밤의 마당이라…. 이 집에서 산지 9년째이지만 여전히 마당은 낯선 세계이고 설레는 공간이다. 잠 안 오는 밤 뒤척이다가 불현듯 ‘아, 마당이 있지~’ 하고 아이처럼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깨닫게 된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는 순간, 다른 세계가 거기에 있다. 갇혀 있는 공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명들의 수런거림, 예측할 수 없는 우주의 한 세계가 펼쳐진다. 완전히 밖도 아니고 온전히 안도 아닌, 이 또 다른 공간이 주는 적당한 여유와 자유, 안정감에 나는 아직도 익숙하지 못해 놀라워한다.
맑은 밤공기를 마시며 마당에 한참을 서 있다.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산과 옆집의 기와지붕은 적요감으로 더욱 검다. 뒤뜰의 자귀꽃 향이 바람을 타고 온다. 마당을 걸어본다. 혼자 중얼 거린다. “마당이구나, 마당…” 처음 말 배우는 아이가 같은 단어를 입 속에서 수없이 중얼대듯 나 또한 수없이 웅얼댄다. 그래도 이 공간에 대한 설렘과 낯섦이 가시지 않는다. 거의 십 년이 되어가는 세월을 살고 있어도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곳. 잘 믿기지 않는 곳이다.
▶ 삼 대째 마당에서 지내는 들고양이들. ⓒ김혜련
내 것인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닌 세계
마당은 독특한 공간이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다.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으니 내부적 공간임에 틀림없지만 완전히 닫힌 공간은 아니다. 공적인 영역도 아니고 아주 사적인 영역도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말을 묻기도 하고, 내가 말을 걸기도 하고, 잠시 들어와 툇마루에 앉아 차 한 잔을 하기도 한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니기도 한 공간. 이 공간이 주는 적당한 허전함과 적당한 채워짐이 늘 새롭다.
무엇보다 이곳은 숱한 생명들이 생멸(生滅)하는 공간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그 생명의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그토록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 ‘집’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내가 통제할 수 없고, 다 알 수도 없는 생명들의 세계가 내 집 안에 있다! 집에서 겸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십년이 되어가는 마당은 이제 더는 신생(新生)의 공간이 아니어서 온갖 생명들이 자란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풀들, 꽃들…. 그 생명들을 다 놔둘 수 없어 어느 것은 뽑고 어느 것은 기른다. 아마도 이 작은 마당에서 살고 있는 식물들의 수를 다 센다면 수백 가지는 넘을 것이다. 땅은 무엇이든 생명 지닌 것을 품고 키워내는 법이라, 비 한 번 오고 나면 새로운 생명들이 솟아나고 또 솟아난다.
식물들뿐이 아니다. 이 마당에서 살거나, 잠시 들러 가는 곤충과 동물들 또한 헤아리기 힘들다. 벌과 나비, 거미, 잠자리, 여치, 방울벌레, 자벌레, 딱정벌레, 온갖 종류의 애벌레… 삼대 째 새끼를 낳고 기르는 들고양이, 현관 지붕에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는 딱새들, 별채 처마 밑을 자기 집으로 삼아 밤이면 와서 자고 아침이면 날아가는 박새, 가끔씩 우르르 떼 지어 날아와 마당에서 놀고 가는 참새들, 들비둘기, 까치…. 가끔씩은 내가 모르는 아주 귀한 손님들도 온다.
몇 년 전 머리에 관 같은 것을 쓴, 부리가 긴 새를 마당에서 처음 봤다. 뾰족하고 긴 부리로 땅을 쪼다가 푸르르 나는데 머리에 추장의 깃털 같은 화려한 깃털이 순간 화악 펴졌다 닫혔다. 그 새를 알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고 새에 관한 책을 찾고, 지인들에게 전화를 했다. 드디어 그 새가 ‘후투티’라는 것을 알았다. 머리 깃털 모양을 따서 일명 ‘추장새’라고도 한단다. 그때의 충격 같은 감동을 뭐라 설명하기 어렵다. 뭐랄까,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터무니없이 귀한 선물을 받았을 때의 어리둥절함이랄까. 자연이 주는 선물은 이유가 없고,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염없다.
▶ 같이 공부모임을 했던 ‘웃는 혜란’이 그린 후투티. ⓒ김혜련
새들뿐 아니다. 마당의 여기저기에 터널을 뚫는 두더지, 어두워지면 날아다니는 박쥐들. 가끔은 뱀도 어슬렁거리며 기어 다니고, 독특한 소리로 울어대는 청개구리… 온갖 생명들이 이곳을 자기 집으로 삼기도 하고 임시거처로 지내기도 한다.
내가 모르는 마당의 세계는 더 많을 것이다. 몇 년 전 여름,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마당에 널어두었던 멍석 위에 머리와 꼬리만 남은 쥐의 주검이 있었다. 쥐의 얼굴은 고통으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가까이 가니 머리 아랫부분에 창자가 남아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꼬리가 있다. 고양이가 식사를 하고 간 흔적이었다. 그 흔적이 어찌나 생생하게 남아있는지 꼭 내가 생선 발라먹은 흔적 같았다. 머리 남기고 뼈와 꼬리를 남기는….
몸이 오그라들었다. 쥐의 일그러진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고통에 감염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고양이 입장에 서 보았다. 햇살 짱짱한 날, 먹이를 찾아 물고 푹신한 멍석 위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느긋하게 식사를 즐겼을 고양이. 고양이의 시간은 얼마나 한가롭고 즐거웠을까. 자연의 세계에 내 감정을 이입하는 게 헛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난 쥐의 고통과 고양이의 즐거움 모두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 없을 때 이 장소에서 삶과 죽음의 치열한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마당은 내 것인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닌 세계들로 차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마당
마당은 계절과 날씨를 그대로 겪는 공간이기도 하다. 집 안에서는 계절 감각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다. 마당은 생생히 살아있는 계절이 있다.
봄의 마당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생명을 보는 기쁨이 있다. 조금씩 다른 시기에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마당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땅의 신비에 그저 찬탄하게 되는 공간이다.
여름 마당은 울울하다. 잎이 무성해진 나무들 사이로 강렬한 햇살이 깃드는 모습도 좋고, 소나기 지나가는 마당의 활활발발(活活潑發)함도 좋다. 멀리서 하늘이 검회색으로 변하고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바람의 결이 달라진다. 작은 생명들은 스르르 기어서 어디론가 피신을 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후드득거리며 소나기가 들이닥치면 마당에서 올라오는 자옥한 흙먼지, 텁텁한 흙냄새, 먼 그리움의 냄새다. 마당에 놓인 평상은 짙어지고 항아리엔 윤기가 흐른다. 어둑해진 마당은 잠시 온갖 타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장이 된다.
▶ 가을 햇살을 품은 마당에서 고추가 말라가고 있다. ⓒ김혜련
가을의 마당은 비어있다. 햇살도 가득하고 생명들도 가득하지만, 비어있다. 햇살을 품고 있는 마당은 한없이 너르고, 그 빈 곳에 나는 나를 넌다. 가을 햇살은 봄 햇살과 다르다. 봄 햇살이 집중적이라면 가을 햇살은 흩어지는 빛이다. 사물에 습기를 거두고 마르게 하고 익게 하는 빛.
평상에 가득 널어 말리는 것은 호박이나 가지, 고추들이지만, 나는 나를 말리고 싶다. 쓸데없이 무겁기 만한 머리를 가을 햇살에 담근다. 언제나 그늘진 습지 같은 뇌를 햇살 빗으로 가지런히 빗겨 말리고 싶다. 오래되고 낡은 내장들을 꺼내 옥양목 이불 호청 말리듯 꼬득꼬득 말려 탁탁 털어 다시 넣고 싶다. 근심과 불안, 헛된 욕망으로 찌뿌둥한 마음을 햇살에 바래어 날깃날깃 헤어지게 하고 싶다. 말라가는 식물들의 한없이 작아지는 몸체와 부피처럼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말라서, 비어서, 가벼워지고 싶다. 가을마당은 한없이 비어지는 마당이다.
겨울 마당은 밤이 좋다. 겨울밤 마당에서 바라보는 초승달 그리고 차갑게 반짝이는 별들은 지상 너머 어딘가에 대한, 평생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겨울 밤 마당에서 나는 내 영혼의 별자리를 생각한다.
안의 폐쇄성에 갇히거나, 밖의 황량함에 떨지 않는
마당에 나오면 다른 내가 된다. 한 생각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히거나,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해질 때 마당으로 나온다. 아침에 눈 뜰 때, 맨홀 밑바닥의 역겨운 냄새처럼 올라오는 공허와 우울! 그 때 방안에만 있으면 내 존재 전부가, 온 방이 지하실의 음습한 우울로 차오른다. 그러나 마당으로 나오면 나의 우울은, 그 오래고 끈질긴 습관은 아주 작아지고 초라해져서 어디론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마당의 숱한 생명과 하늘과 빛과 바람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나는 내 집이라는 안정된 공간에서 나를 넘어설 수가 있다. 안이 주는 폐쇄성에 갇히지도 않고, 밖이 주는 황량함에 떨지도 않으면서 바로 내 집, 내 마당에서 새로운 내가 된다.
마당은 내가 가꾸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내가 알 수 없는 공간이고, 마당에서 만나는 자연은 나를 내 안에 가두지 않게 한다. 스스로를 넘어서게 한다. 인간이 자연의 한부분이며, 내가 겪는 숱한 일들이 이 자연의 생멸 속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 비어있는 마당 ⓒ김혜련
옥탑방이라도 마당이 있는 삶
“여행할 땐 좋았지,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또 답답해지는 거야.”
“남들은 가질 거 다 가졌다고 부러워하는데 정작 난 왜 이리 공허한 건지….”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이런 푸념을 하면 난 무슨 만병통치약을 선전하는 야바우 약장사처럼, 또는 자신도 잘 모르는 신비에 대해 말하는 선무당처럼 말한다.
“마당 있는 집에서 살아 봐~”
도시의 옥상이나 작은 공간에라도 마당을 만들어 가꾼다면 유랑의 무리들처럼 전국적으로 떠도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자연을 만나러, 새로운 시간을 만들기 위해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다. 바로 내 집에서 그토록 원하는 신선한 시간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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