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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정치는 안 돼’ 핀란드 정치에 주목하라
여성주의당 지방의회 진출, 정치권의 인종주의 논란 확산
“한국에서 선수할 생각 없습니다.” 퉁명한 어조에 북쪽 억양이 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이민 갈 거예요.”
“이민? 해외진출? 오, 좋지. 해외 어디?” 그녀를 붙잡아야 하는 남성 감독은 태연한 척 묻는다. 여기에 돌아온 답변은, “핀란드요.”
“핀란드. 와! 아이스하키의 천국.”
영화 <국가대표2>에 나오는 장면이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고 한다. 여기에 나온 대로 핀란드는 아이스하키의 천국일지 모른다. 얼음 위에서 펼쳐지는 속도감 넘치는 경기. 공이라고 할 수 있는 ‘퍽’은 시속 160킬로미터 또는 그 이상의 속도로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의 빠르기는 아니지만, 얼마 전 핀란드 정치권에서 아이스하키 속도에 비견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주인공은 바로 여성주의당(Feministinen puolue)이다.
여성주의당 등록 3개월 만에 지방의회 진출
지난 4월 9일, 핀란드에서 지방선거가 치러졌다.(자치구역인 Ahvenanmaa-Åland 제외) 선거 결과 여성주의당이 헬싱키 지방의회에서 의석을 얻었다. 당이 법무부에 공식 등록된 것은 올해 1월로, 겨우 3개월 만에 이룬 성과다. 당이 출범한 때가 작년 6월 15일이니 창당 10개월 만에 의회 진출을 이뤄냈다.
▶ 카튜 아로 핀란드 여성주의당 대표. 헬싱키 지방의원 당선 후, 성소수자 축제에 함께한 모습. ⓒ출처: 당 페이스북
출범 당시 본보기로 삼았던 스웨덴 여성주의당의 경우, 2005년 4월 창당해서 2010년 9월에야 지방의회 진출로 이어졌다. 참고로 노르웨이에도 여성주의당이 있는데 역시 스웨덴의 영향을 받았다. 노르웨이 여성주의당은 2015년 3월 출범해서 같은 해 9월 지방선거에 도전했고, 의미 있는 성적을 얻진 못했다. 지금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 9월 11일 총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
다시 말해 핀란드는 스웨덴이 5년 남짓 걸려 해낸 일을, 그리고 노르웨이가 2년이 넘도록 해내지 못한 일을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뤄냈다. 이러한 성공의 핵심에는 카튜 아로(Katju Aro) 당대표가 있다. 창당의 주역이기도 한 그녀는 이번에 지방의원으로 뽑힌 장본인이다.
아로 대표는 지난 1월에 필자와 진행한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선거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느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헬싱키(핀란드 수도) 지역에서 의석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벌써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이 말을 떠올리며 당선을 축하한다는 편지를 보냈더니 아로 대표는 정말 기뻐했다. “우리가 감히 바랐던 것을, 그대로 이뤄냈어요!”
핀란드 여성주의당의 “승리”는 여러 가지로 고무적이다. 무엇보다 다음 총선이 2019년 4월에 있을 예정인데 그 결과가 벌써부터 주목된다.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여성주의당의 성과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핀란드 선거가 비례대표제로 치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웨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선거제도가 중요하다. 예컨대 한국의 경우, 현 제도에서 개선이 없다면 여성주의당 같은 군소 정당의 의회 진입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핀란드 의회 해산 위기까지 불러온 ‘인종주의’
다시 ‘아이스하키 정치’로 돌아가서, 올해 6월 13일 창당과 함께 곧바로 (지방이 아닌) 중앙의회에 진출하고, 나아가 핀란드 연립정부의 동반자로 떠오른 당이 있다. 초고속 핀란드 정치의 주인공은 푸른미래당(Sininen tulevaisuus).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답은 극우 성향의 핀란드인당(Perussuomalaiset)에서 찾을 수 있다.
핀란드인당은 6월 10일 전당대회를 통해 새롭게 당을 이끌 이를 선출했는데, 유시 할라-아호(Jussi Halla-aho) 대표다. 그는 2008년 헬싱키 지방의원, 2011년 국회의원, 그리고 2014년에는 유럽의회 의원으로 뽑혔다. 문제는 언어학자이기도 한 그가 특히 인종차별 발언을 해왔다는 점이다. 일례로 2008년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로 재판을 거쳐 2012년에 벌금을 냈다. 인종주의 발언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이가 당대표가 된 것이다.
▶ 인종주의 발언으로 벌금형을 받은 바 있는 유시 할라-아호 핀란드인당 대표.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당선된 뒤 꽃다발을 받은 모습. ⓒ당 트위터
할라-아호 의원과 관련된 논란은 그가 당대표 선거에 나서기 전부터 불붙었다. 작년 12월 그는 선거 출마 가능성을 내비쳤는데, 녹색당과 좌파당 그리고 스웨덴인민당은 그가 대표가 된다면 ‘핀란드인당과의 협조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참고로 핀란드인당은 중앙당이 이끄는 연립정부에 국민연합당과 함께해왔다. 곧,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여당인 셈이다.
야당의 우려는 3월 초, 20년 동안 핀란드인당 대표를 맡아왔던 티모 소이니(Timo Soini) 외무부 장관이 당대표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현실이 됐다. 얼마 뒤 할라-아호 의원은 출마를 공식 선언했고, 결국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핀란드 공영방송 <윌레>의 6월 11일 보도에 따르면, 부대표로 세 명이 뽑혔는데 여기에도 올해 초 인종차별 발언으로 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이가 포함됐다. 새로운 지도부의 구성은 인종주의와 국수주의에 기초한 반이민 정책과 반유럽연합 노선이 깊어질 것을 예고했다.
이에 6월 12일, 중앙당 소속의 유하 시필라(Juha Sipilä) 총리는 핀란드인당이 더 이상 연립정부의 동반자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이는 정부가 의회에서 차지해왔던 다수 의석을 잃게 된다는 뜻으로, 총리는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핀란드는 의원내각제 성격이 포함된 대통령제 국가다.) 핀란드 의회는 모두 200석으로, 중앙당과 국민연합당이 86석, 여기에 핀란드인당이 37석(원래 38석이었으나 작년 6월 사회민주당으로 한 명 옮김)을 더해 그동안 연립정부가 123석으로 국정을 운영해왔다.
이와 관련해 총리는 스웨덴인민당(10석)과 기독민주당(5석)을 새로운 동반자로 끌어들여 101석의 아슬아슬한 다수당 정부를 만들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하여 다음 날인 6월 13일, 총리는 의회 해산을 위해 대통령 방문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 만남이 있기 직전, 20 여명의 핀란드인당 의원들이 할라-아호 대표와 함께할 수 없다며 전격 탈당한다. 다시 말해 절반 이상의 의원들이 당을 떠나 곧바로 신당(원래 이름은 신대안당 Uusi vaihtoehto이었지만 6월 19일 푸른미래당으로 당명 변경)을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총리는 대통령과의 만남을 급하게 취소하고, 새로 만들어진 당과 함께 정부를 계속 이끌 것이라고 발표한다. 참고로 탈당했던 의원 중 두 명은 핀란드인당으로 돌아갔는데, 6월 30일 또 한 명이 탈당했다.
‘인종차별 용납 못해’…정치권의 책임의식 확인
정리하자면, 핀란드인당의 새로운 대표가 선출된 지 사흘 만에 당이 분당됐고, 이로써 핀란드 의회/정부는 해산 위기를 극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혐오정치에 대한 핀란드 사회의 대응이다. 특히 이번 사태는 ‘인종차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가 작동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사회는 없다. 문제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핀란드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사회가 그 역사적 배경과 고유의 맥락을 바탕으로 문제를 어떻게 짚어내고 풀어가느냐, 또는 그러한 노력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느냐일 것이다.
물론 핀란드인당을 탈당한 이들의 속마음은 정부 안에 남아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일지 모른다. 또한 정치권에서 쟁점이 되는 인종주의와, 핀란드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있는 인종주의는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의원들의 탈당과 이에 앞선 총리의 의회 해산 계획은, 혐오정치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 의식이 제도권 정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스스로를 “인종주의에 맞설 대안”이라고 강하게 규정했던 여성주의당의 승리도 그래서 더욱 의미 있지 않을까. (박강성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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