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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마지막 자유

<페미니즘으로 읽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연출 <내일을 위한 시간>

 

‘삶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로고 테라피(Logo therapy)를 창안한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은 사람이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마지막 자유에 대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자신만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다.’

 

▶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마리옹 꼬띠아르, 파브리지오 롱기온 주연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2014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2014)을 보며 나는 내내 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떠올렸다. 주인공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우울증 치료로 한동안 직장을 쉬었고 조만간 복직을 앞두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금요일 오후 걸려온 온 한 통의 전화는 그녀의 일상을 갑자기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다. 직장 동료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을 복직시키는 대신에 보너스를 받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러나 투표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제보로 월요일 아침 재투표가 결정된다. 주말 동안 열여섯 명의 동료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보너스를 포기해 달라고, 자신의 복직을 위해 투표해달라고 설득하게 된 산드라. 그녀에게 일은 가족의 생계가 걸린 생존에 관한 문제였기에 절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여정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이혼하고 남자친구와 새 출발해야 하기 때문에 보너스가 꼭 필요한 동료, 일 년 치 가스비와 전기세를 충당할 수 있는 보너스를 놓칠 수 없다는 동료 등 사람들의 사정은 다양하다. 그뿐인가?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동료는 집에 없는 척하며 산드라를 피하고, 어떤 동료는 보너스를 선택한 게 미안하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그렇다, 동료들에게는 보너스를 받을 만한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물론, 보너스를 포기하고 산드라의 복직에 한 표를 던지려는 동료들도 있다. 과반 수 이상의 표를 얻어야 복직이 결정되기 때문에, 산드라가 동료들을 찾아갈 때마다 영화는 곤두서지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동료들을 설득하는 그녀의 말은 매번 똑같지만, 이야기는 매번 다르게 펼쳐질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동료들이 ‘보너스가 필요하다’고 말할 때마다 신경안정제를 가방에서 꺼내 허겁지겁 먹거나, 자학적인 울음을 터뜨리는 산드라는 마치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탑승한 것 같다. 처음부터 그녀가 동료들을 설득하는 여정에 흔쾌히 들어선 것도 아니지만, 잦은 감정기복은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흔들어대는 주범일 터. 그렇다. 희망은 연약할뿐더러 아직 뿌리도 채 내리지 않은 것 같다. 보너스를 포기하겠다고, 그녀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동료들의 말이 얼핏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산드라의 내면을 몇 배는 더 깊이 잠식해버리는 것은 늘 ‘한마디의 거절’이다. 그것도 아주 힘센 소리가 되어 그녀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치기 일쑤다.

 

“그들이 옳아.

난 존재하지 않는 거야. 아무것도 아냐.”

 

절망의 바닥에서 그녀가 울면서 토해내는 말은, 그래서 그 메아리의 소리다. 우울증을 앓았던 그녀가 잔여물처럼 붙들고 있었던 자괴와 수치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끝까지 동료들을 찾아가 설득의 여정을 완주할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남편과 가까운 동료의 응원이 있었지만, 열여섯 명의 동료들을 산드라가 일일이 찾아가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을 위해 투표를 해달라고 말했던 그 과정 자체가, 그녀에게 근원적인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나는 문득 들었다. 산드라가 동료들을 찾아가 한 행위는, 바로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계속 일하고 싶다’고 그녀 안의 간절한 소망을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 말을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점점 자라나는 만트라가 되어 그녀를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전율이 일었다. 처음엔 움츠린 채 포기하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 안의 욕구를 말하는 것을 매순간 선택했던 산드라의 모습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빅터 프랭클에 의하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동료들을 설득할 때마다 구걸하는 거지가 된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 여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통스럽지만 매순간 ‘말하기로’ 선택을 한 것이다.

 

▶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감독, 마리옹 꼬띠아르, 파브리지오 롱기온 주연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2014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눌려온 감정과 생각을 ‘말하라’

 

그런 산드라의 모습에서, 지난해 일어났던 강남역 살인 사건이 떠올랐다. 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나고, 얼마 전 강남 역 10번 출구 앞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며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고 소리 높여 외쳤던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리는 것 같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작년 5월 17일 강남역 인근의 남녀 공용화장실을 이용하던 한 여대생이 알지도 못하는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혐오’ 살인사건으로, 가해자 김씨는 살인죄가 인정되어 징역 30년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당시 김씨의 범행은 조현병으로 인한 우발적인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경찰에서 조사됐다. 김씨가 ‘평소 여성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조사과정에서 분명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 이 사건을 여혐 살인으로 바라보는 것이, 마치 불필요한 남녀 갈등을 조장하고 심지어 페미니스트들이 사건을 왜곡하고 여성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라며, 피해자 추모집회에 나온 여성들을 강하게 몰아붙이는 남자들도 등장했다. 그들의 생각이야말로 우리 사회에 여혐이 뿌리깊게 자리 잡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일 터.

 

이렇듯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오해 속에서 조롱을 당하면서도, 여성들이 소리 높여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절박하고도 단순하다.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활보하는 도시에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엄청난 공포가, 사건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들로 하여금 거리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사건이라고 반복해서 말하게 한 것이다. 영화에서 산드라가 동료들을 향해 포기하지 않고 똑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목소리들이 지속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여성혐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에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는 용기 있는 목소리를 지금까지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은 아닐는지.

 

나의 글쓰기 수업에 왔던 한 중년여성의 고백도 중첩되어 떠올랐다.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가부장적인 남편에게서 받는 고통스러움을 그녀는 글로 썼는데 사소한 언쟁에도 물건을 부수고, 한밤중에도 기분이 안 좋으면 집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며 욕설을 하는 그녀의 남편은 가족들에게 툭하면 공포를 선사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들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아 서운해서 화가 났고, 아내와 아이들이 자신의 신경에 거슬리는 말만 하지 않으면 집 안에 큰 소리 날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을 습관처럼 달고 다니는 그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주는지 알리는 만무했다.

 

오랜 세월 동안 권위적인 남편에게 억눌린 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던 그녀에게 더 이상 공포를 추상적으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자기 안의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라고,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조언해준 기억이 난다.

 

여성들의 두려움과 고통을 고질적인 습관으로 치환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자들에게 진실을 알려주기 위한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이 생활 속에서 깊이 공감하지 못하고 체감하지 못하는 두려움,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끊임없이 소리 높여 말하는 것뿐.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가 동료들을 설득하는 방법 또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자기표현이 아니었던가? 산드라가 처음부터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는 여성이 아니었다는 점을, 그래서 나는 주목하고 싶다.

 

▶ 선택을 이야기하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Deux jours, une nuit, 2014)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칼럼을 읽고 나서 나를 만난 사람들 중에는 ‘센 언니의 이미지로 상상했었는데 직접 만나니 다르네요’ 라는 말을 한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어떤 이는 내가 글과는 다르게(?) 어리바리한 모습에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가감없이 말하자면 나는 예민하고 불안지수도 높은 편이다. (과거의 불안지수에 비하면 많이 낮아졌지만)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겁이 많은 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랬던 내가 몇 해 전 교회를 성실히 다니고 있을 때 4대강 사업의 불법성에 대해 교회에서, 마을에서 이야기하다가 졸지에 (생뚱맞게도) 사람들에게 빨갱이 취급을 당해서 고통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 스스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마음이 여려서 상처도 잘 받는 내가 진실을 말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아마도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살아 있는 강을 ‘살린다’고 거짓말하며 식수오염을 버젓이 자행하여 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정부의 불법적인 작태에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일면서,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마을에서 혼자 숨죽이며 외쳤던 소리는, 도시의 광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외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주었다. 산드라 또한 걸핏하면 감정적으로 요동쳐지는 여린 심성의 소유자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서 점점 단단해져 간 것 아닌가.

 

그런데, 당연한 권리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왠지 동료들에게 미안해하는 산드라의 모습은 어쩐지 불편하다. 마치 그녀가 동료들의 보너스를 빼앗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산드라의 복직과 동료들의 보너스라는, 양자택일의 대립구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 중에서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이상한 구조를 만든 사람은 바로 사장이다. 그는 반장을 앞세워 산드라의 복직을 마치 공공의 적 내지는 골칫덩어리로 만들어버리고, 그녀가 복직되면 다른 직원들이 잘릴 수도 있다는 거짓 소문까지 야비하게 퍼뜨린다.

 

영화 속 사장과 반장을 보며, 여성들이 차별을 이야기하면 얼척 없는 역차별을 말하면서 여성과 남성을 허구헌 날 대립 프레임으로 만드는 남자들이 연상되었다. 당연한 권리를 말하는 여성들에게 갈등을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입을 다물라고 말하는 남자들이 생각났다. 여성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강력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못 본 척하는 남자들도 떠올랐다. 여성이 차별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가부장제 사회의 홍위병 같은 남자들이 사장의 모습을 통해 수없이 걸어 나왔다.

 

▶ 동료들이 자신의 복직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날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는 담담히 들어온다. <내일을 위한 시간>

 

월요일 아침 투표에서 결국 과반 수 이상의 지지를 얻지 못한 산드라는 복직에 실패한다. 하지만 자신을 지지해준 동료들 한 명 한 명을 껴안으며 고마워한다. 그 순간, 사장의 깜짝 제안이 그녀를 부른다. 여덟 명의 지지를 이끌어낸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서, 동료들에게 보너스도 주고 그녀를 복직시켜 주는 해피엔딩의 전주곡 같은 제안이다. 그런데, 산드라는 단칼에 거절해버린다. 자신의 복직은 계약기간이 곧 만료되는 계약직 대신에 들어가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수는 없다’는 소신을 밝히고 사장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산드라의 얼굴이 햇살에 밝게 빛난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얼굴, 자신만의 길을 선택한 자유의 얼굴!

 

“우리 잘 싸웠지? 나 행복해!”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며 길을 걸어가는 산드라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나지만, 우리는 안다. 지금부터, 비로소 시작이라는 것을. 내일의 시간을 위해 순간순간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함을. 침묵하지 않고 입을 크게 열어 우리 안의 두려움을 말하고, 고통을 말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말했을 때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왜냐하면 우리의 목소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산드라가 걸어가던 길 위에서, 중국의 혁명가이자 소설가인 루쉰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을 더 잘 읽기 위한 영화 미학]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산드라를 현장감 있게 따라가는 시선은, 감정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토해내는 그녀의 거친 호흡까지 가까이 포착한다. 이러한 시선은 마치 산드라와 동행하는 듯한 느낌마저 선사해주기 충분하다.

 

현실을 늘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리얼리티 속에 가장 강력한 삶의 은유가 숨어 있음을 깊이 통찰하는 형제 영화감독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의 시각은,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도 유효하다. 첫 장면에서 전화벨이 열 번도 넘게 울리지만 산드라가 눈을 감은 채 지친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이, 느지막이 겨우 일어나 전화를 받는 모습이, 산드라의 우울하고 고립된 내면을 함께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울증의 여파로 복직해도 일을 잘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주위의 우려에 대해, 그녀는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지만, 영화 초반 사장 앞에서 그만 입이 얼어붙고 만다. 동료들을 설득하러 돌아다니다가 잠시 길에 앉아 쉬던 중 들려온 새소리를 음미하며 ‘저게 나라면 좋겠어. 노래하는 저 새’라고 말하는 그녀의 갈망은 그래서 간절하고 아플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러한 과정들이 있었기에 마지막에 반장과 사장 앞에서 ‘거짓 소문으로 사람들을 겁주면 안 된다’고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장면이 더 감동을 주며 다가왔던 것은 아닐까. 다량의 신경안정제를 한꺼번에 먹어서 병원에 실려 갔던 그녀가 투표의 결과를 기다리는 피 말리는 순간, 해갈하듯 생수만 연거푸 마시는 장면 또한 그전에 불안할 때 신경안정제 알약을 꺼내 먹던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이제, 산드라는 더 이상 신경안정제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길 위에 있으라는 부름을 받은 것처럼 계속 길을 걸어가는 산드라의 뒷모습이 그 사실을 말해준다. 내면에서 울려 나오던 실패의 목소리를 허물고, 세상이 틀 지워 준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산드라의 여정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도 길은 전해준다. 작지만 힘센 희망처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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