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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전하는 일본인 여성

오타케 요네코 “언제까지라도 계속해 씨를 뿌릴 겁니다”


‘오와다 시드’라고 불리는 시민들의 세미나와 교류를 위한 커뮤니티 공간이 일본 치바현 야치요시에 탄생했다. 젊은 건축가가 설계한 모던하고 멋진 건물은 간토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오랫동안 힘써온 오타케 요네코 씨가 퇴직금으로 지은 것이다. 여든여섯 살인 오타케 씨는 무슨 마음으로 이 공간을 만들었을까.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관동) 지역에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그런데 불안과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쳤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대대적인 ‘조선인 색출작업’이 벌어졌으며, 희생자 수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조선인이 살해됐다. 희생자 수는 6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는 233명에 그쳐, 아직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이다.>

 

조선인들을 죽이고 암매장한 주민들

 

▶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오랫동안 힘써온 오타케 요네코 씨  ⓒ촬영: 오치아이 유리코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된 오타케 요네코 씨는 부임 받은 치바현 나라시노시 시립제4중학교에 ‘향토사 동아리’를 만들었다. 1977년의 어느 날, 정년퇴직한 선배교사 고(故) 아베 코 씨가 “해줄 얘기가 있다”고 했다.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아베 씨의 집을 찾았다.

 

아베 씨는 자신의 집이 있는 오와다 신덴에서 간토대지진을 겪었다. 당시 아홉 살이었다. 아베 씨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세 조선인이 길거리에 꿇어앉혀져 있었고, 이웃에 사는 여성이 주먹밥을 가져다주었지만 먹지 않았고, 결국 셋은 그 지역 남성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 나누곤 했었다는 것이다.

 

“저도, 학생들도 (이야기를 듣고) 너무 무서워, 돌아오는 길은 여느 때 같은 활기는 사라진 채 다들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며 주변 지역 주민들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아베 씨의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인쇄물을 만들고, 교내 축제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오타케 요네코 씨는 이듬 해 동료들과 ‘치바현 간토대지진과 조선인 희생자 추모·조사 실행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지역에서 조사를 시작했다.

 

“지역 사람들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으로 마을의 명예를 지키려고 했던 거겠죠.”

 

하지만, 무거운 입을 열고, 죽은 조선인들 매장을 도왔다는 사람, 집에 있던 일기장을 제공해준 사람도 있었다.

 

그 덕에 조금씩 일대 부락에서 일어났던 일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군은 육군 나라시노포로수용소에 ‘학살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격리했던 조선인들 중에서 불온분자로 판단했는지, 16명을 다카츠, 오와다 신덴, 카야다 마을로 보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죽이게 했다. 다른 현의 학살에서도 유례가 없는 사례였다.

 

학살의 책임은 누가 질까?

 

학살의 장이었던 ‘카야다시타’와 다카츠의 ‘나기노하라’에서는 발굴 작업도 진행했다. 나기노하라는 공유지이기 때문에 주면 주민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지역 대표자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집 한 집 돌며 발굴 허락을 받아주었다.

 

1998년 9월 24일, 조용히 발굴이 시작되었다. “땅을 파던 사람이 축축한 땅을 손으로 만져보더니, 곧 나오겠어요, 하더군요. 아래쪽으로 깊고 길게 파인 구멍에서 겹겹이 쌓인 유골이 차례차례 나왔습니다.” 일기장에 적혀있던 대로 여섯 명이었다.

 

“화장할 때 지역 사람들, 절의 주지스님, 유족 대리인으로서 자이니치(在日: 재일조선인) 분들, 저희 실행위원들이 함께 기다렸어요.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요. 그런데 자이니치 분이 주민들에게 ‘당신들은 이미 자식이나 손자 세대잖아요. 집에 돌아가면 조상님들 위패에 전해주세요. 오늘로 다 끝났다고’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렇게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하고 오타케 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해한 민족인 우리에게 그걸로 끝인 걸까, 싶은 거예요.” 마을 사람들의 자손들이 자기 일처럼 발굴에 입회하고 발굴된 유골을 세척했다. 그 모습에는 저도 모르게 감상에 빠지기도 했지만, 사실관계는 분명히 해야 한다.

 

“죽임을 당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책임은 누가 질까. 엄격하게 추궁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맙니다.”

 

“93년이 지났지만,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 가토 나오키 씨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블로그를 통해 알리며, 책으로 엮은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갈무리, 2015)


일본 정부는 군대의 관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타케 씨를 포함한 뜻있는 시민 들은 2010년에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묻는 모임’을 결성하고, 일본 정부의 사죄, 그리고 자료의 공개와 보존을 요구하는 운동도 시작했다.

 

작년 8월, 한국 서울에 처음으로 간토대지진 학살 희생자 추모식이 열렸다. “아쉽게도 가지 못했어요. 93년이 지났지만, 치바에서도 젊은 연구자나 시민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오타케 요네코 씨는 전쟁 시기를 오사카에서 보냈고, 근로동원으로 병사의 잠방이를 꿰매야 했다. 패전 전에 니시이즈로 피난 간 덕에 오사카 대공습을 피했고, 농가의 뜰에서 천황의 패전 방송을 들었다. 37년 간의 교사 시절을 포함해 이야기하자면 길다.

 

오타케 씨는 지금은 ‘오와다 시드’에서 지금까지 모으거나 작성한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인권이나 평화를 위해 지역에서 애쓰고 있는 분들이나 일반 시민들도 여기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우리 지역의 역사를 알았으면 합니다. 아이를 데려온 어머니들이 꽃꽂이하는 장소로 쓰도 하고요.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가 참 좋죠? 만들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너그럽게 웃는다. 건축가가 붙여준 ‘오와다 시드’(seed)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다. 오타케 씨는 의기양양하게 계속해서 씨를 뿌릴 작정이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무로타 모토미 씨가 작성하고 고주영 씨가 번역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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