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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왜 작은 것에 분개할까?

<치마 속 페미니즘> 혁명과 섹스③


※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 홍승희 씨의 섹슈얼리티 기록, “치마 속 페미니즘” 연재입니다.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나는 작은 것에 분개하지 않았다 

 

나는 김수영 시인을 좋아했다. “시까지도 잊어버리는 삶, 온 몸으로 쓰는 시!”라고 고함치는 맨 몸의 진정성이 좋았다. 그가 우산이 부서지도록 마누라를 때린 것을 시로 적어놓아도 특별히 부대끼지 않았다. 그의 시 중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에서 “나는 왜 작은 것에만 분개하는가”를 말하며, 시인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통찰하고 자신의 옹졸함을 성찰하고 각성한다.

 

나는 작고 사소한 일상의 적들이 아니라, 진짜 적에 대해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더욱더 걷잡을 수 없이 막나가는 정권의 악랄함에 몸서리쳤다. “시는,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시인의 고함소리를 품고, 공사장 벽에 대통령 풍자 그래피티를 새기고 광장에서 피켓을 들었다.

 

나는 작은 것에 분개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외모에 대해 평가하거나, 친한 남성 동료가 아무렇지도 않게 밤늦게 모텔로 불러도 분개하지 않았다. 술 마시고 하는 실수이거나, 흔한 한국 사회의 문화라고 느꼈다. 아는 지인이 술에 취해 모텔로 끌고 가려고 손목을 붙잡고 놓지 않았을 때처럼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나는 그의 행동을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 분개할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고, 국가권력이 저지르는 몰상식한 폭력에 비하면 이것은 폭력의 축에도 못 낀다고 느꼈다.

 

‘왜 작은 것에 분개하려 하는가? 큰 것에, 진짜 적에 분개하자.’ 이런 내 시야에서 그들은 시스템의 희생양, 국가권력에 탄압받는 나와 같은 비참한 인간일 뿐이었다. 나의 자비로움은 그들을 여전히 좋은 인간관계로 남게 했다. 그들은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여전히 나를 다정한 친구, 친한 동료로 느꼈다. 그것은 나에게 감수할 만한 익숙한 불편이었다.

 

여성의 몸을 빗댄 풍자쯤이야…

 

국회에서 국정교과서가 날치기로 통과된 후 정부청사 앞에서 밤을 지샜다. 예술행동을 하느라 바쁜 어느 날이었다. 한 작가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국정교과서 문제에 여성과 남성의 권력관계를 대입해 풍자화를 그려서 공유했는데, 온라인에서 여성을 대상화했다며 비판받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네가 보기엔 어때, 문제가 있는 걸까?”라고 내게 물었다.

 

풍자화를 찾아봤다. 그림 속에서 여성이 도구처럼 이미지화 된 것은 맞지만, 폭력이라고 느끼진 못했다. 너무나 선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봐와서일까. 그 정도의 불편은 ‘원래 있는 불편’으로 여겼다. 선배에게 말했다. “제가 봤을 땐 괜찮은데요. 여성들이 봤을 때 불편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폭력적이진 않아요. 그리고 여성이 아니라 권력을 풍자하려는 의도니까요.” 선배에게 나는 “힘내세요, 신경 쓰지 마시고” 라고 덧붙였다.

 

당시 온라인에서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를 중심으로 많은 여성들이 여성을 대상화하는 행위를 사회 문제로 공론화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들은 미디어와 기업에서 여성을 도구화하는 광고에 항의하고, 기득권 정치인의 성추행 발언과 성추문을 비판하고, 성인사이트 <소라넷>의 몰카 영상 유포 문제를 고발했다. 페미니즘을 잘 몰랐을 때에도 그들의 문제의식에 공감했다. 하지만 선배의 연락을 받은 후, 권력을 풍자하는 작가까지 비판하고 있는 그들이 불편해졌다.

 

‘왜 그 정도의 불편도 감수하지 못하는 걸까’,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왜 저 사람들은 시국의 심각성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문제제기를 하는 걸까’ 생각했다. ‘혹시 일베나 정권에서 풀어놓은 댓글 알바는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김수영 시인의 정신도 떠올랐다. ‘왜 그들은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것일까’, ‘시국이 어느 때인데. 키보드로 분개하고 있을 시간에 광장으로 나와서 국정교과서 막는 일 좀 거들어주지’ 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풍자는 익숙한 한국의 ‘저항’문화였기 때문이다.

 

효녀연합과 오빠연합의 메타포

 

몇 개월 후, 한일 정부 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이 졸속적으로 타결된 소식을 들었다. 나는 광화문 소녀상 앞에서 예술행동을 시작했다. 어버이연합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즉흥적으로 ‘대한민국 효녀연합’ 퍼포먼스를 했다. 퍼포먼스가 언론 매체에 노출되면서 나는 많은 오빠와 아저씨들의 응원을 받았다. (효녀연합 페이스북 페이지에 “좋아요”를 누른 사용자의 70%가 남성, 그 중 60%가 이른바 486세대 사람들이다. 페미니즘 게시물을 올리기 시작한 후로는 여성 비율이 늘었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한 후 얼마 안 있어 효녀를 지켜주겠다는 오빠연합도 생겼다.

 

당시 나는 무조건 더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 이슈에 관심을 갖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오빠와 아저씨들의 반응이 왜 문제인지 느낄 겨를도 없이, 나는 마냥 즐거웠다. 마치 잔치처럼. 오빠연합은 효녀연합의 팬클럽 같았다. 마치 아이돌을 응원하는 오빠들처럼. 쏟아지는 응원과 칭찬의 메시지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누군가 나를 그렇게 대단한 무엇으로 본다는 건 유혹적이었다. 

▶ “MY BODY IS NOT YOUR OBJECT”   ⓒ홍승희, 2017

 

게다가 “기특한 개념녀, 지켜주고 싶은 우리의 효녀”라는 말들은 단어 선택만 달랐지 지금까지 맺어온 남자선배,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주로 느꼈던 ‘애정’의 표현이 아니었던가. “너는 우리의 꽃이야, 빛이야, 간판이야” 따위의 표현 말이다. 그런 공기를 마시고 살아온 사람이 공기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란 쉽지 않다. 뭔가 이상하고 찝찝한데,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작은 것에 분개하지 말고 대의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여성으로 드러나고 오빠가 응원을 하기 시작하면서 애초 이슈의 본질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집중되지 못했다. 여성폭력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광장에서 여성이 또다시 대상화되는 참사가 벌어지고 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나의 작업과 관계없이 나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가 부각됐다.

 

특히나 ‘오빠’는 나를 지켜주겠다고 말하면서, 또 내가 더 잘 아는 걸(예컨대 정치) 굳이 가르치려드는 불편하고 끈적한 관계들이 아니었나. 그 관계의 메타포가 <효녀연합과 오빠연합>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불쾌해졌다. 나는 광장에서 퍼포먼스를 했을 뿐인데 갑자기 누군가가 지켜줘야 하는 효녀가 된 것이다. 내 의미와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여성’으로 읽혀졌다. 박근혜의 오만가지 잘못을 뒤로 하고 하필 여성인 걸 부각시키는 것처럼.


“왜 작은 것에 분개하니?” 


뭔가 찝찝하다고 느끼면서도, 큰 것에 집중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혼란스러웠다. 그때 언니가 <효녀연합>을 맹목적으로 응원하고 영웅화하면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시선을 비판하는 글을 공유해주었다. 나는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성찰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 글을 공유했고, 같은 문제의식을 느낀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왜 지금 시국에 여성 이슈로 몰고 가냐, 대의를 위해 힘을 합쳐야지’, ‘잔치 상에 재 뿌리지 말자’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언니가 동생을 질투해서 그러네’ 라는 식으로,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는 여성혐오 프레임으로 우리 관계를 조롱했다. 언니와 나의 관계성을 떠나 이것은 인격살인이라고 느꼈다. 꼭 그 자리에 서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역사속 많은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인격살인 말이다.

 

이런 폭력을 목격하면서, 나는 내가 임의로 진단 내렸던 ‘작은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할 수 있었다. 집단적 폭력을 고발하고 공론화하는 일은 작은 일도, 사적인 일도 아니다. 누가 누군가의 고통을 함부로 작은 것이라고 재단하는가? 여성의 고통은 늘 작고 사소한 것 취급 받아왔다. 사회 문제로 인식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내가 폭력의 시선과 표현 속에서 가만히 있는 만큼, 내가 방관한 폭력들이 더 딱딱한 돌멩이처럼 굳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두고 간 돌부리에 누군가는 계속 걸려 넘어질 거라는 것도.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앞의 돌멩이 하나하나를 치우면서 구체적인 오늘을 청소하고, 창조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불쾌함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효녀’의 상징적 의미에 맞지 않게 가부장의 호의를 (감히) 거부하고,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왜 거기서 (여성 이슈에) 걸려버려서 멈춰있느냐고, 다시 전처럼 대의를 위해 나와서 투쟁해달라고 말했다. 언니와 나 둘 다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는데, 작은 것에 분개하는 페미니스트라고 세간에 오르내렸다. ‘큰일을 해야지, 왜 작은 것에 분개하나요. 대의를 위해주세요. 원래 유명해지면 구설수도 많아지고 그래요. 그럴 때일수록 담대하게 통크게 쿨하게 행동해주세요.’ 사람들은 내게 여전히 저항의 예능감, 대인배적 세련됨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예능의 이슈가 아니라, 폭력과 삶의 이슈다.

 

이 폭력의 무게와 온도를 사람들은 제멋대로 해석하고 재단했다. 몇몇 페미니스트도 내게 말했다. ‘그런 악플에 쿨하게 대처하고 행동하세요, 거기서 상처받아버리면 안돼요. 오히려 재전복을 해야지요.’ 아니, 누가 그걸 모르는가? 이 말은 회사에서 직장상사가 성적으로 불편한 말을 해도 유연하고 유머러스하게 대처하라는 것과 같다. 게다가 그 정도의 여유가 있으려면 비위가 강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비위가 약해졌다. 예전처럼 불편함을 느껴도 적당히 맞춰주고 적당히 흘려보내기 어려울 만큼. 불편함은 불쾌함이 되고, 속이 거북하고 마지막엔 화가 났다. 뒤늦게 화상을 입는 사람처럼.

 

나는 예전의 내가 중얼거리며 페미니스트를 비난했던 것처럼, “작은 것에 분개하고 있는 여자”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환멸을 느꼈다. 그렇게 톡톡히 값을 치르며 깨지고 배웠다. 이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걸.

 

저항의 예능감? 여성 섹슈얼리티 활용 전략들

 

정치, 예술 모두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가부장’은 문화적 코드로, 여성이 대상화되는 것은 문화적 행위로 간주되어왔다. “웃자고 하는 소리”로 여성의 외모나 나이를 거들먹거리는 일상의 문화처럼. “풍자는 풍자일 뿐”, “예술은 예술일 뿐”이라고 말한다. 여성을 대상화한 게 아니라고 발뺌할 수 있는 권력은, 자신의 위치성을 모르는 의도된 무지에서 나온다.

 

몇 년 전에는 팟캐스트 <나는꼼수다>에서 구속된 정봉주 의원을 응원하는 비키니 입은 여성의 몸에 대한 성적 발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때도 나를 포함해 그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왜 이렇게 예민하고 진지해, 사소한 것에. 웃자고 한 얘기인데. 시국이 어느 때인데!” 이미지 권력의 시대다. 더군다나 거대권력에 맞서기 위해 우리 편의 ‘쪽수’가 중요하다는 사고방식. 그런 사고방식으로 꽉 차 있던 나 역시 여성들의 불편함은 부차적인 문제이고, 그런 표현이 폭력이라는 걸 느끼지 못했다.

 

남성 동료들, 남성 선배들은 저항에도 ‘예능감’이 필요하고, 예능감에 여성 섹슈얼리티의 매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집회를 축제처럼 하자는 문화기획자, 예술행동을 하는 선배 모두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은근히 활용했다. 대상이 되지 않는 남성관객에게 무대는 잔칫상이고 신나는 축제다. 여성은 저항의 주체이면서도 (여성 게임 캐릭터가 그러하듯) 매력적인 여전사가 되기를 주문받는다.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져라”고 말하는 사회의 주문처럼, “얼굴도 예쁘고 가슴도 큰데, 개념까지 있는” 개념녀를 주문한다. 이런 문화 속에서 나는 훌륭하고 거뜬하게 적응했다. 불편한 순간들을 제외하면, 익숙한 공기였으니까.


▶ 부패한 국가권력은 여성의 이미지를 이용하고, 부패한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남성들도 여성의 이미지를 활용한다.  ⓒ홍승희, 2016

 

최근에는 대통령 누드 풍자화가 논란이다. 여성작가라면 그런 풍자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입장과 체감의 차이다. 나는 ‘일베’에 의해 내 얼굴과 나체의 이미지를 합성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풍자화를 그릴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다. 첫 번째는 그것이 폭력이라는 걸 몸의 감각으로 알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 사회의 최고 강자에게 약자 이미지를 씌어주어 약자 코스프레로 물타기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때부터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여성의 아이콘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아이콘이다. 길거리 성추행을 당하고, ‘결혼이냐 정규직이냐’를 중대한 인생의 문제로 걱정하는 여성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권력을 통째로 쥐었던 아빠의 딸이다.

 

여성을 들먹이며 권력자들이 물타기하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국정원 여직원이 댓글 조작으로 대선에 개입하는 헌정 파괴의 범죄를 저질렀을 때도, 그들은 뜬금없이 여성인권 문제라고 우겼다. 여직원의 인권을 이유로 실루엣 청문회를 했다. 청문회가 끝나고 나가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기사에는 현란한 무늬의 미니스커트와 반짝이는 백, 하이힐을 걸친 국정원 ‘여’직원이 있었다. 대선여론을 조작한 무시무시한 국가권력의 남용 문제를 여성의 이미지로 몰아간 것은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 범죄현장을 붙잡기 위해 문 앞을 지켰던 사람들을 ‘여자를 감금하는 성폭력범’이나 하는 짓이라고 표현했다.

 

대통령 누드 풍자화는 박근혜 대통령이 원하는 ‘여성’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 줌으로서, 그들의 힘과 명분을 강화해주었다. 전략의 실패를 넘어, 그들의 전략 속으로 기어들어간 셈이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표현의 자유와 성희롱할 자유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예술 검열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듯 주장한다. 왜 굳이 권력자들을 여성으로 대상화해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그들이 원하는 물타기를 돕는 것일까? 왜 그 정도 전략밖에 상상하지 못할까.

 

권력자에 이용되고, 저항으로 활용되는 ‘여성’


우산으로 때린 마누라가 시의 소재가 되는 것처럼, 여자는 단지 예술과 정치의 좋은 소재, 매력적인 대상이다. 시대는 흐르지만, 여성을 도구화하는 문화를 가장한 폭력은 계속된다.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부패한 국가권력은 여성의 이미지를 이용하고, 부패한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남성들도 여성의 이미지를 활용한다. 교활하게 이용하거나 쿨하게 풍자하거나.

 

남성 시청자들만의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사회의 구성원 반을 차지하는 인간들을 설득하려면 그들을 대상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도 나오는 결론이다. 당위 뿐 아니라 전략으로도 여성을 대상화하는 일은 좋지 않다. 많은 여성들이 광장에 나왔고, (실은 오래 전부터) 여자가 정치‘에도’ 관심이 있는 것은 의외성이 아니라는 것을 읽지 못하는 게으름이다. 혹은 그렇게 믿기지 않는(믿을 수 없는) 고집이거나.

 

나는 이제 우산으로 마누라를 때리던 그 시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피부로 만나는 작가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온 삶으로 부조리를 부수고 다녔던 나혜석 작가, 창녀도 혁명에 포함시켜준 고정희 시인, 자기기만을 부수는 고통의 언어로 말 걸어주는 최승자 시인. 그녀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글쓰는 방식도 변했다. 예전처럼 선험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들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는다. 나를 메시아적 위치에 갖다놓은 과도한 진정성은 폭력의 경중을 따지며 구체적인 타인의 자리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에서 남는 건, 사업의 수완과 쿨한 예능감 뿐이다. ‘섹시한 진보!!!’ 그런 식의 저항은 많은 깃발은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체적인 일상과 삶을 움직이진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를 대변할 유능한 영웅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을 직접 말할 수 있는 환경과 관계를 확대하는 일이다.

 

종종 상상한다. 그때 여성을 소재로 국정교과서 풍자화를 그린 선배에게 “이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풍자는 모든 사람들이 웃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건 여성을 배제하는 작업인 것 같아요. 그리고 여성인 저도 이 그림이 불쾌해요” 라고 말했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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