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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시그리드와 헬레나를 찾아서

<영화로 읽는 페미니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필자 소개: 지아(知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연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영화칼럼을 비롯해 다양하고 새로운 실험으로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 줄리엣 비노쉬 주연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2014. 

 

<나이를 잃어버린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나이 먹는 것이 두려웠다. 세월의 무게에 눌린 채 시들어가는 젊음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여자는 두꺼운 화장과 과장된 생기발랄한 제스처를 내세워 사람들에게 자신의 나이를 속이기 시작했다. 거짓말은 분명 효과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여자의 나이는 불어나지 않았으며 때론 마술처럼 줄어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제 여자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없다. 놀랍게도 여자 자신도 나이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여자는 행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무수한 나이들 속에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여자는 회한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친다.

 

“난 내가 누구인지 정말 모르겠어!”>

 

오래전 필자가 한 잡지에 썼던 어른을 위한 우화의 한 부분이다. 이야기 속 여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나이에 대해 적잖이 부담스러워하고 때론 곤혹스러워한다. 어렸을 때 나이 듦은 미래로 가는 빛나는 통과의례처럼 느껴졌지만, 시간에 가속도가 따라붙으면서 나이는 삶을 무례하게 추월하는 과속 차량처럼 느껴진다.

 

물론 ‘나이 듦’을 지혜에 접목해서 칭송하는 이야기가 세대를 초월해서 나오고는 있다. 하지만 젊음을 과도하게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젊게 보이는 것, 젊어지는 것은 필수적인 미덕이 되어버린 듯하다. TV만 틀면 나오는 아이돌과 걸 그룹, 건강과 미용산업을 등에 업은 ‘동안 열풍’은 흡사 이 시대가 젊음을 물신 숭배하는 느낌마저 전해주는 데 결코 모자라지 않다.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올리비에 아싸야스 감독, 2014)는 나이 듦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년의 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라는 한 여성의 내면을 여행한다. 여행 중에 길을 잃기 쉬운 것은,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기억과 감정들의 충돌 속에서 그녀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마리아(줄리엣 비노쉬)와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마리아는 가장 먼저 죽음과 만난다. 스위스 알프스 지역에 있는 산골마을인 실스마리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감독 빌렘의 부고를 듣게 된 것이다. 빌렘은 마리아가 이십년 전 출연한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감독으로, 그녀를 일약 유명한 배우로 만들어준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다. 마침 그녀는 시상식에 거부감을 느끼는 빌렘의 대리수상을 위해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함께 취리히 시상식장에 갔다가, 감독이 사는 실스마리아로 가려던 중이었다.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는 중년의 여성 헬레나와 그녀의 젊은 비서 시그리드, 두 여성의 사랑 이야기다. 결국 연인에게 버림받은 헬레나가 자살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이 연극을 이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젊은 남자감독 클라우스가 리메이크하려고 마리아에게 출연 제의를 한다. 하지만 마리아는 망설인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주어진 역할이 이십 년 전 그녀의 배역인 시그리드가 아닌, 중년여성 헬레나이기 때문이다. 비서 발렌틴이 마리아에게 출연을 설득하지만, 여전히 시그리드 배역에 집착하는 마리아는 대본연습에 들어간 후에도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발렌틴과 계속 미묘한 신경전과 갈등을 겪게 된다.

 

언젠가 연예기획사 대표에게 중년 여배우들의 고민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배역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좁다는 것이다. 영화나 TV 드라마 주인공 대부분 이십대가 차지하고 있고 중년의 여자배우들에게 할애된 역할은 젊은 주인공들의 엄마나 고모, 이모 등, 대부분 특화되거나 한정된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하루빨리 늙어서 할머니 역할을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는, 다소 씁쓸한 이야기로 기억이 된다.

 

어쩌면 더 이상 젊은 여성의 역할이 허락되지 않는 배우 마리아가 느끼는 불안에는, 여성을 젊음과 등가시키고 싶어 하는 가부장제 사회의 뿌리 깊은 시선이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젊음을 잃어버린 여성은 더 이상 확실한 효용가치가 사라지고 존재 자체로 인정받기 어려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더구나 날이 갈수록 정신적인 가치조차 물질화되어버리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그것은 대상화되고 소비되는 여성의 몸을 남성의 시선으로 다시 확인하고 검증받는 정체성이 아니던가?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가 ‘서로를 잡아끄는 힘에 대한 관계’ 즉, 관계에서의 힘의 우위를 다룬 작품이라고 여기는 마리아의 생각에서도 그 시선을 만날 수 있다. 젊은 여자와 나이 든 여자는 확연한 대립구도이고, 극중에서 헬레나가 자살한 것처럼 ‘젊음’에게 밀려난 ‘나이 듦’에게는 몰락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기다 이십 년 전 헬레나를 연기했던 배우 수잔이 공연 후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은 사실은 그녀에게 ‘나이 듦’을 마치 불길한 징후처럼 각인시켜 버렸다. 무대에서 빛나 보이는 역할은 오직 무모하지만 빛나는 ‘젊음’이라고 마리아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잔인한 시그리드에 반해, 자신의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서 말하는 헬레나가 오히려 순수하고 인간적이라고, 그런 헬레나를 다시 바라보라고, 발렌틴은 마리아에게 말한다. 그녀가 젊음의 특권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는 냉정한 조언도 비서로서 잊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감독 클라우스에게 ‘나는 여전히 시그리드예요’라고 말하며, 시그리드 역을 할 할리우드의 사고뭉치 배우 조앤(클로이 모레츠)의 치기어린 열정마저 질투하는 듯하다.

 

그렇다. 그녀는 결코 시그리드를 떠나고 싶지 않다. 육체는 몰락의 징후를 드러내지만, 조앤의 당돌하리만치 튀는 자신감은 한 때 마리아가 당당히 소유했던 것들이 아닌가? 마리아의 생각 속에 헬레나는 그저 늙은 패배자일 뿐이다.

 

▶ 연극에서 시그리드 역을 맡게 될 할리우드 신예 조앤 역의 클로이 모레츠.

 

마리아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마흔이라는 나이를 넘기면서 나는 ‘불혹’이라는 단어에 잠시 골몰했던 적이 있었다. 이 생경하고 무거운 단어는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왠지 많이 성숙해져야 할 것 같은 이상한 부담감을 주는 단어였다. 또, 호기심과 열정을 갖고 있으면 어쩐지 어색하고 위험해지는 단어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와 성숙을 등가시키는 것이야말로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사고에 편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 문득 들었다. 왜냐하면 내 안에는 여전히 미성숙한 열다섯 살 소녀부터 스무 살의 젊은 열정이 다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대에서 순서대로 페이드 아웃되길 기다리지 않았을뿐더러, 결코 사라지지도 않았다. 마흔이 되었다고 내가 갑자기 성숙해지는 것도, 갑자기 모든 열정이 소진되어 늙는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난 마주했다. 나는 나일뿐이었다.

 

어쩌면 시그리드는 마리아에게 존재의 진실에 반대되는 에고일지도 모르겠다. ‘에고 속에 모든 사람이 되고 싶어 하거나, 스스로 자신에 대해 가정하는 이상들이 응축되어 있다’라고 라캉이 분석한 것처럼 말이다. 에고가 우리 자신의 타자라고 한다면, 영화에서 마리아의 에고는 연극 속 시그리드요, 비서 발렌틴이요, 또 할리우드의 신애 조앤이다. 그들은 마리아 안에 상주하고 있는 스무 살 무렵의 자유롭지만 때론 무모한 젊음이요, 타자인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할리우드의 SF 오락영화의 캐릭터들이 진정성이 없다고 빈정대며 젊은이들의 인터넷 문화가 충동적으로 소비된다고 여기면서도, 카지노에서 판돈을 다 걸고 배팅을 하는, 스스로 충동적이고 무모한 모습을 연출한다. 그런 혼돈스러운 모습에서 그녀 안에 시그리드와 헬레나가 공존함이 느껴진다. 결국 두 인물이 실은 하나의 인물이라는 걸 그녀가 자각할 때까지, 그녀 안에서 과거와 현재, 의식과 무의식이 폭죽처럼 분열하는 것도 감지된다.

 

비서 발렌틴은 그녀의 무의식의 한 부분을 이룬다. 상대역(시그리드 배역)으로 대본 리딩 연습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마리아의 젊음이 직접적으로 투사된 분신으로 점점 드러나는데, 그로 인해 현실의 대사와 연극의 대사는 계속 중첩되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점점 허물어 간다. 연극 속 갈등이 현실 속 발렌틴과 마리아의 갈등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관계에서의 힘의 우위’가 어느 순간 마리아에게서 발렌틴에게 기울어지는 것도, 연극 속 관계역학과 비슷하다.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나가는 발렌틴에게 마리아가 묘한 질투심을 보이는 것 역시, 동성애를 다룬 연극의 에로스적인 긴장감을 연상시킨다.

 

이렇듯 현실이 허구에게, 허구가 현실에게 말을 건네는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과거와 현재를 카오스로 만들어버린 채 마리아의 무의식을 보여준다. 꿈에서 리허설을 하는데 과거와 현재가 마구 뒤섞여 있었다는 그녀의 말처럼 말이다. 그녀에게 과거는 여전히 가장 살아있는 생생한 현재, 머릿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자유롭고 파괴적인 시그리드가 아니던가? 마리아는 고통스럽지만 과거의 자신과 대면한다. 과연, 난 누구인가?

 

▶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말로야 언덕에 오른 마리아

 

말로야 스네이크, 죽음 이후 재생의 이야기

 

실스마리아에 있는 빌렘 감독의 집에서 대본 연습을 하게 된 마리아가 눈보라를 뚫고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러 말로야 언덕에 올라갔을 때, 동행한 발렌틴이 갑자기 사라지는 장면은 모호하지만, 강렬하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실스 마리아의 말로야 계곡에 출몰하는 구름의 움직임을 묘사한 단어로, 그 모양이 마치 뱀처럼 흐른다고 해서 ‘말로야 스네이크’(Maloja snake)로 불린다. 100년 전에 촬영된 다큐멘터리 <말로야 스네이크> 영상을 보고 영감을 얻어 연극을 만든 빌렘 감독이 자살한 장소가 발렌틴이 사라진 말로야 언덕이라는 점도 공교롭다.

 

마리아는 말로야 스네이크가 나타난 줄 알고 소리쳤다가 안개에 불과한 걸 안 순간, 발렌틴이 사라졌음을 뒤늦게야 발견한다. 이 장면 이후 말로야 스네이크는 영험한 신비로움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그녀가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죽기 전에 빌렘 감독이 이곳에서 말로야 스네이크를 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쉽게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말로야 스네이크가 악천후의 징후로도 여겨진다는 이야기는 내게 삶의 비의(秘義)로 다가온다. 징후는 늘 불안을 대동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어쩌면 말로야 스네이크처럼 삶은 아슬아슬하면서도 황홀한 그 무엇이 아닐까.

 

날마다 새롭게 변하는 첨단문화를 등진 채 나이 듦을 우아한 몰락으로 자위하며 불길함의 징후로만 읽었던 마리아가, 리메이크되는 연극에서 여성의 나이 듦에 관해 새롭게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익숙했던 것들과의 결별은 그녀에게 꼭 필요한 과정이 아니었을지. 산에서 발렌틴이 떠나고, 영화 초반에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남편과의 이혼소송 문제를 전화로 통화하고, 또 그 와중에 감독 빌렘의 부고를 들으면서, 그동안 질긴 옷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던 수많은 페르소나와 결별을 그녀가 시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라는 역할에서, 시그리드라는 역할에서 풀려나 오롯이 혼자가 되어야만 마침내 만날 수 있는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비로소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부고를 듣는 기차 장면이 마치 어둔 동굴처럼 페이드 아웃되고 빌렘 감독이 죽은 실스마리아의 눈부신 설산이 나오는 것은, 슬프지만 찬란하다. 그것은 앞으로 마리아에게 일어날 죽음과 재생의 이야기를 역설적이지만, 복선처럼 말해주는 듯하다.

 

다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화한다

 

생전에 빌렘 감독은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속편을 구상하고 있었다. 스무 살 무렵의 마리아에게 이십년 후 시그리드를 해줄 수 있느냐고 말했었는데, 당시 마리아는 이십 년 후 시그리드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십 년 후 마리아가 맡은 헬레나는 바로 성장한 시그리드인 셈이다.

 

이제 마리아는 이십 년의 시간을 통과한 시그리드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시그리드가 완전히 페이드 아웃되고 헬레나가 우울하게 페이드 인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두 인물이 고통스럽지만 연속적으로 디졸브 되는 과정 속에서, 수많은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거쳐 더 깊은 ‘나’에게 도달하는 이야기였다.

 

철학자 리쾨르는 ‘인간의 삶 자체가 이야기’라며 ‘삶은 이야기로 재구성되어야 의미를 얻는다’고 했다. 이는 삶의 이야기가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진화할 수도 있다는 것일 터. 몇 해 전 가정주부인 여성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면서, 바로 이 이야기의 생명력을 웅숭깊게 느낄 수 있었다. 여성들의 각자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내가 대본을 써서 무대에 올린 공연이었는데, 대본작업을 위해 속내 깊숙이 묻어둔 신산스러웠던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그때 그 기억에 함께 울고, 또 웃었다. 무거운 감정의 짐들을 털어내는 모습들이 많이도 먹먹했었다. 다섯 시간이 넘도록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들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확장되어 감을 느꼈다.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는 이십 년 후 감독 클라우스에 의해 재구성되어서 또 다른 의미를 얻게 된다. 연습 막바지 대본에 삽입된 새로운 한 장면을 마리아가 사전에 읽지도 않고 무대 리허설에 오르는 것은, 과거라는 정해진 삶의 대본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탈각하려는 시선일 터. 자유로이 흐르는 말로야 스네이크처럼 그냥 흘러 가는대로 자신을 맡기는 그녀에게서, 나이 듦을 악천후의 징후로 보지 않고 또 다른 가능성의 변곡점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한 변곡점에 관해 여성운동가 마가렛 풀러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내부로 더 깊이 내려가라는 귀한 조언을 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요구하고 남성에게 영향 받는 것을 그만두고, 오직 그들 자신의 내부로 물러나서 그들의 독특한 비밀을 발견할 때까지 인생의 토대를 탐구해야만 한다. 그런 뒤에 그들이 다시 세상에 나타날 때는 쇄신되고 정화되어, 모든 광채를 금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연극 무대 위 마리아의 모습

 

다시 쓰는 여성의 이야기

 

드디어 무대에 오른 마리아의 얼굴에는 젊은 시절 다 풀어내지 못한 욕망과 회한, 그리움, 그 모든 감정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희미하게 스며있다. 깨지고 조각난 사금파리에서 새어 나오는 얼룩진 빛이 황금으로 변해버리는 순간의 고통과 기쁨이 모두 들어 있었다. 비록 허허로운 들판처럼 펼쳐져 있었지만, 그것은 존재의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간순간의 삶을 응시하는 현존의 얼굴이다. 지금도, 세상의 가부장적인 프레임을 힘겹게 넘어서고 있는 여성들의 얼굴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이 들었지만, 아름답다.

 

나이를 먹는 기술이란 ‘무언가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는 기술’이라고 작가 앙드레 모루아가 쓴 것처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마도 끊임없이 희망을 연습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고유한 상처는 새로운 이야기, 곧 희망을 만들어내는 동인이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무대 가득 흐르던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 마치 사계절의 순환처럼 반복되는 화성 밑에서 견고한 뿌리처럼 깔려 있던 베이스 음 같은 그런 희망 말이다. 마리아에게 그 소리는, 말로야 스네이크처럼 흐르지만 영속하는 자연의 생명, 자신의 내부에 이미 소유하고 있고 결코 사라지지 않을 광채들이다.

 

막이 오르기 전 대기실에 찾아온 스물다섯 살 젊은 감독의 SF 영화에 마리아가 출연을 결정한 것도, 어쩐지 기분 좋은 징후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그녀가 맡을 배역이 ‘나이가 없지만 동시에 모든 나이를 대변하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설명도 마음에 든다.

 

의식이 성장하는 시기가 다가오면, 오랜 관습은 새로운 탄생을 맞이하고 환영해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자신을 다르게 마주함으로써 마리아의 분열된 자의식이 죽고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난 것처럼, 다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고 그래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말할 수 있을 때 아마도 우리는 더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물신화된 가부장제 세상의 프레임을 벗어나 아름답게 자유롭고 싶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다시 쓰자. 깨지고 조각난 사금파리의 빛을 모아 이제, 이야기를 만들자.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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