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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명절 탈출기 

<질문교차로 인문학카페36.5º> 다양한 가족, 다양한 명절 (홍승은)

  


명절이 되면 단체 카톡방이 쉼 없이 울린다.


“얘들아, 명절은 쉬는 날이 아니었어. 나 오늘 하루 종일 일하다가 베란다에서 세탁기 잡고 울었다.” 2년 전 결혼한 친구의 메시지를 시작으로 다른 친구들의 증언이 속속히 울린다.


몇 달 전 결혼한 친구는 ‘남자친구’가 ‘남편’이 되자마자 태도가 확 바뀌었다며 하소연하고, 명절에 전만 부치다가 기름 냄새가 온 몸에 배어서 계속 속이 울렁거린다는 친구도 있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의 사정도 다르진 않다. 아침부터 짜증내는 아빠 때문에 엄마가 중간에서 자신의 눈치를 봤다며 한숨 쉬거나, 남자는 거실에 여자는 부엌에 있는 구도를 더는 참을 수 없다며 분노한다. 올 설에도 어김없이 카톡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들의 호소에 “얼른 명절에서 탈출하길 바라.” 라고 말했다.


명절의 모습은 ‘가족오락관’이 아니었다

 

어릴 때 명절하면 떠올랐던 이미지는 ‘가족오락관’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과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누고, 윷놀이 하고, 맛있는 음식 배불리 먹고, 헤어질 때 슬쩍 용돈을 건네받는 풍경이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완벽하다고 믿었던 관계 속에서 걸리는 점이 보이기 시작한 건, 내가 초등학생 무렵이었다. 여자들은 부엌에서 일하고 남자들은 앉아서 텔레비전 보는 모습을 볼 때, 엄마는 할머니 집과 외할머니 집에 가서도 일하고, 아빠는 어디를 가도 쉬는 모습을 볼 때 그랬다. 자식 자랑, 집 평수를 비교하거나 스포츠, 정치 이야기로 날 세우는 식상한 대화와 친척들의 고나리질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참고 웃었던 이유는 가족만이 인간관계의 ‘핵’이며 가장 소중한 관계라고 모두가 말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십 대 초반까지 명절을 맞이하며 내 키가 자라고, 친척들의 모습이 달라지고, 조카가 생기고, 큰엄마의 자리를 그 집 며느리가 채우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았던 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명절의 풍경이었다.


스물두 살에 맞이한 설날, 나는 외가댁에 갔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들 속에는 사촌 오빠와 결혼한 새언니가 있었다. 눈빛이 상냥했던 언니에 대한 기억은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밖에 없다. 언니와 외숙모의 일하는 뒷모습을 보다가 거실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외삼촌을 보았다. 순간 들었던 생각. ‘외삼촌의 저 여유와 인자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분주한 부엌풍경과 대비되는 평온한 삼촌의 모습이 그날따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 간극에서 느껴지는 부조리에 나는 애써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평범한 식사 시간이었다. 여자들이 차린 식탁의 상석에는 남자들이 앉았고, 가장자리에 여자들이 앉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식후 고나리질이 시작됐다. 당시 한창 학생운동을 하던 나와 동생을 못마땅하게 보던 아빠는 외삼촌들에게 ‘얘들이 취업 준비는 안 하고 마르크스 책이나 읽는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집중 포화가 이어졌다. 정신 차리고 돈 벌어서 시집갈 준비해야 한다, 마르크스 같은 거 읽어서 뭐하느냐, 다른 사촌처럼 똑똑하게 살아야 한다며 비교하기도 했다.


지적의 내용보다 우선 나를 화나게 했던 건, 그때에도 과일을 깎고 있었던 새언니의 모습이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일이나 거들고 나에게 조언하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또 모두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매번 밥 먹기 전에 ‘이웃사랑’을 실천하자고 기도하면서, 지금 나에게 이웃 생각은 말고 너부터 돈 벌어 시집갈 준비나 하라고 말하는 태도는 얼마나 모순적인지. 조금 전 외삼촌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와 같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날 외삼촌 집을 나서며 동생과 나는 다짐했다.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말자고. 우리가 존중하며 관계 맺는 관계가 아니라면, 굳이 머리수 하나 채우는 일은 하지 말자고. 그 뒤로 나는 명절에서 자유로워졌다. 정확하게는 명절이 아닌 가족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하는 게 맞다.


명절 끝나면 마누라한테 잘해주라고?

 

▶ 어떤 사랑  ⓒ새벽(홍승은) 

 

이런 나의 변화를 말하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을 듣곤 한다. 친척들은 우리 자매에게 ‘부모님이 이혼해서 위축된 거 아니냐’며 안쓰러워한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처가 많아서 가족에 대한 반감이 생긴 거라고 말한다. 정작 명절에 자신은 힘들다고 하면서도, 그 명절에서 이탈되어선 안 된다고 나를 다그친다. 내가 ‘비혼’을 얘기할 때에 향하는 잣대와 같다.


최근 한 남자친구는 나에게 ‘명절에 듣는 훈계 정도야 흘려듣다가 용돈이라도 받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1년에 한두 번 친척들 얼굴 보는 날인데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나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그가 느끼기에 명절이 힘든 이유는 오지랖과 꼰대질 때문이었겠지만, 나에게 명절은 듣기 싫은 잔소리만 참으면 되는 날이 아니었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덜한 편이었지만, 내가 명절 때 용돈을 받는 건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에 대한 비용이다. 설사 내가 일하지 않고 버틴다 해도, 엄마가 내 몫까지 고스란히 떠안는 모습을 지켜보는 괴로운 상황이 펼쳐진다. 내가 만약 명절 때 책을 읽는다면 집안일 하나 돕지 않는 ‘자격 없는’ 존재가 되지만, 남자인 사촌이라면 똘똘하다고 지지 받을 것이다. 그러니 명절에 오로지 친척들의 잔소리에만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서있는 위치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명절은 잔소리를 참으며 적당히 타협하며 보내면 되는 일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명절 끝나면 아내에게 잘해주라는 조언은 쉽게 통용되지만, 그 말 속에 ‘아내’이기 전에 ‘한 사람’이 놓인 상황에 대한 관심은 없다. 애초에 불평등한 구조적 문제는 지운 채, 어떻게든 그 구조를 이어가겠다는 심보만 보인다. 사랑한다면 애초에 왜 사랑하는 이가 휴일에 홀로 눈치를 보고 쉼 없이 일하게 만드는 걸 방관할까. 식탁 앞에서 성별을 구분 짓고 대놓고 하대하는 모멸감을 느끼게 할까. 부모님과 아내 사이에서 눈치 보는 일이 괴롭다는 징징거림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민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집안의 평화가 이렇게 누군가의 침묵과 불평등 속에서 이어진다면, 그 평화는 누구의 언어일까.


가장 ‘사적’이라 여겨져서 알고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문제가 한국 사회의 가족문화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비혼’과 더불어 기존에 주어진 가족관계를 재정립하는 일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혁명이었다. 가족관계의 재배치가 없다면 명절의 변화도 어렵다. 명절은 가족이 가진 불평등한 구조가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일면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가지 않으면 엄마 혼자 모든 일을 다 할 것 같아서 죄책감이 느껴진다는 친구도 있다. 나도 비슷한 감정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딸’, ‘미래의 엄마’, ‘미래의 며느리’라는 역할을 거부하는 지금, 나의 몸부림이 장기적으로 엄마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도 처음에는 딸들에게 왜 가족 행사에 참여하지 않느냐며 서운함을 토로했지만, 지금은 우리의 의사를 존중해준다. 가끔은 “나도 너희처럼 진작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달랐을까…” 라고 말하기도 한다.


‘화목한 가족’, ‘정겨운 명절’이라는 아름다운 말에 녹아있는 권력과 역할극을 의식적으로 깨려고 노력한다면, 모두가 화목하고 정겨운 명절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 L은 불평등한 명절 문화와 가족 관계를 따지며 부모님과 크게 갈등을 겪은 뒤, 지금은 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부모자식 전에 한 인간으로 서로를 만나며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명절을 탈출한 사람들의 파티!


스물세 살부터 나는 명절에 혼자인 사람들과 모여서 파티를 열었다. 그마저도 2년 전부터는 명절이라고 굳이 특별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일상적으로 보낸다. 이번 설에 나는 동거인과 동생, 동생의 동거인, 명절에서 해방된 지인 둘과 함께 노래를 만들고, 음식을 해먹고, 영화를 보았다. 혼자 책 읽고 글을 썼다. 부모님과는 명절이 아닌 다른 날 중에서 서로가 보고 싶을 때 보기로 약속하고, 전화로 덕담을 나눴다.


주위에 명절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탈출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눈치, 죄책감, 모멸감이 스며들지 않는 평등하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 내 살과 감정을 비비며 맞댈 관계를 주체적으로 맺으며 살아가고 싶다. 다양한 명절 풍경이 나오길 바란다. 원래 그런 일은 없고, 이미 늦은 일은 더더욱 없다.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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