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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진리는 알아도 페미니즘은 모른다?
<치마 속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시작하며
※ 예술가 홍승희 씨의 섹슈얼리티 기록 “치마 속 페미니즘” 연재가 시작됐습니다. Feminist Journal ILDA
인도에서 반 년 간 지내면서 만나게 되었던 한국인 커플이 있다. 인도로 함께 여행을 올 만큼 가치관, 세계관, 취향도 비슷해 보였던 그들은 보고만 있어도 훈훈한 커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몇 주 후 여자 친구였던 ㄱ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ㄱ은 얼마 전 남자친구와 이별했다고 한다.
‘여성혐오라는 표현은 극단적이야’, ‘나는 여자를 좋아하니까 혐오한 적 없어.’ 이런 발언을 하는 남자친구였던 그는 겉으로 보기에 참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하고 좋은 사람 같아 보였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힘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며, 이제라도 이별한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페미니즘 앞에서 태도를 바꾸는 남자들
나 역시 두 달 전 인도에서 만나 사랑 비슷한 걸 했던 사람이 있다. 한국으로 귀국 후 거의 매일 마음이 헛헛했다. 한국 땅의 답답함, 그를 포함한 인도가 그리운 나에게 그는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런 그와 얼마 전 연락을 끊었다. 아마 우리는 다시 보지 않을 거다. 이유는 ㄱ과 비슷하다. 그는 참 창의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지만, 페미니즘 앞에선 달랐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OO씨가 페미니즘을 진짜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OO씨 자신을 위해서.’ 그랬더니 돌아온 답장. ‘저는 공부하기 싫어요. 우주라는 진리를 알면 되지요.’ 페미니즘은 위대한 우주철학보다 덜 중요해 보이는 걸까? 너와 내가 여자와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 온전히 만나기 위해 공부하자는 것이 그렇게 귀찮은 일인가? 남자로서 당신이 저지르는 폭력이 있을 수도 있고, 나도 나보다 약한 존재(동물, 성소수자 등)에겐 폭력일 수 있으니 함께 공부하고 성찰하자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걸까.
나도 우주철학 좋아하고 주역 공부도 하고 있다. ‘하늘은 남자 여자는 땅’ 따위의 기호를 필터링 하면서. 그런데 그는 주구장창 ‘여자는 음, 남자는 양’이라고 말한다. 여성 남성의 이분법은 성소수자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고, 그런 인식은 필터링하면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다.
그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나는 함께 공부하고 성장하고 삶을 나누는 오늘을 꿈꿔요. 그렇지 않은 관계는 서로를 더 외롭게 할 뿐이라는 걸 알아요. 잘 지내요.’ 폴리아모리(polyamory, 일부일처제에 비판적인 다자간 연애)에 대해서도 존중하던 그는 여자/남자의 이분법은 깨지 못했다. 자신이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못했다.
인도에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은 그러했다. 인도철학을 사랑하고 우주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들은 여성이 받는 차별, 성역할 이분법 앞에서는 태도가 돌변했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돈 많이 버는 여자도 있어. 왜 아직도 여성이 차별받는다고 생각해?’ 착하게도 나는 통계를 말하며, 부랴부랴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페미니즘을 공부할 것을(책 한 권쯤은 읽는 것을) 추천하면 그들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왜 공부해야 돼? 나는 페미니즘 공부 안 해도 여자 좋아해서 여자혐오 안 해.’ 혹은 ‘나는 우주의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페미니즘이라는 지식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아’라는 소리를 정성스럽게 쏟아놓았다.
차별이 존재하는데, 그걸 방치하겠다는 건가. 자신이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그 무지함, 게으름, 오만이 놀랍다. ‘우주의 소리’도 듣는 그들은 왜 곁의 비명은 듣지 못할까. ‘민주주의의 함성’에 환호하면서 ‘XX년 같은 욕설은 하지 말라’는 목소리엔 귀 막는 여느 그들과 다를 게 없다. 대화를 깊이 하면 할수록, 구체적인 주제(여성혐오, 성역할 고정관념, 비혼, 소수자 차별 등)로 이야기 나누면 나눌수록 그들에 대한 호감, 일말의 섹시함은 뚝뚝 떨어진다. 우주 얘기, 민주주의 얘기를 할 때는 참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는데.
연애 상대에 대한 리트머스지
나는 이성애(아직까지 확인된 바로는)자다. 무의미투성이 인생을 견디기 위한 몇 가지 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연애라고 불리는 관계다. 관계의 구속과 규정이 싫어서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를 해왔다. 서로의 껍질을 벗겨주고 삶을 고양하게 하던 관계가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성애의 사랑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예전에는 참 쉽게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7년 전까지만 해도 내 이상형은 ‘남자다운 사람’이었다. 그때 소개받았던 사람은 군인 같은 인상과 말투(과묵함)와 성격의 ‘남자’였다. ‘여자’로서의 역할에 익숙했던 나는 순조롭게 사랑하는 남녀의 역할극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여자 역 남자 역의 역할극 연애 말고, 인간으로 만나는 사랑을 하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를까.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낙태수술 후 잠수를 탔던 그는 페미니즘을 함께 공부한 사람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페미니즘 ‘책’을 읽었을 뿐이다. 글과 삶은 다르고, 앎과 삶도 다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낫다 싶을 정도다. 그렇지 않으면 얕은 지식으로 맥락을 절단한 채 ‘진정한 페미니즘’ 어쩌고 할 테니까. 본질은 각성, 성찰, 열린 감각과 태도가 아닐까.
온전한 만남이 가능할까. 여러 마주침을 겪으면서 적어도 마음을 열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리트머스지는 생겼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이 있는가/ 가부장제의 부조리를 인지하고 있는가/ 자기 엄마에 대한 무거운 죄책감이나 숭배 감정이 있는가/ 성폭행 피해자의 증언에서부터 XX년이라고 욕하지 말라는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려는 태도가 있는가/ 대화의 맥락을 잘 파악하는가/ 자신이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자각하는가/ 폭력을 저질렀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는가/ 공부(앎과 삶의 일치를 위한)를 게을리 하지 않는가’ 등.
“치마 속 페미니즘” 연재를 시작하며
▶ 내 몸이 기억하는 페미니즘 ⓒ홍승희(kali)
나는 페미니스트이자, 폴리아모리 연애 지향의 이성애자다. 지난 10년간 연애를 하면서 느꼈던 불편함은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실체가 명확해졌다. 배타적 일대 일 관계에서의 답답함, 일부일처제와 결혼 제도의 부조리함, 여자로서 대상화되는 나의 몸과 연인 관계에서의 성역할 취향에 대한 의문은 페미니즘과 폴리아모리 철학을 접하면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당당하게 내 욕구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섹슈얼리티는 삶 전반에 걸쳐 나를 지독하게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한한 삶의 생기를 주기도 하는 애증의 주제다. 10대~20대에 걸쳐 나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과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연재를 시작한다. 물론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페미니즘을 알기 전부터 알았던 몸의 페미니즘, 폴리아모리를 알기 전부터 겪었던 폴리아모리 연애 등 섹슈얼리티에 대한 내 생각과 경험을 기록하려 한다. 책 속의 페미니즘이 아닌 내 몸이 기억하는 페미니즘을.
‘성은 숱한 논란을 낳는 주제이며,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도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 어떻게 현재의 입장을 취하게 됐는지 그 과정을 보여줄 수 있을 따름이며, 화자의 한계와 선입관과 개성을 감안해 독자 스스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 홍승희(kali):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퍼포먼스를 한다. 일대 일 연애관계와 일부일처제, 엄마-아빠-자식의 가족공동체가 사랑의 기본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온전하게 사랑하면서 살기 위해 폴리아모리 연애를 지향하며 ‘따로 또 함께’하는 대안가족공동체와 살아가고 있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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