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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돌보고 일도 할 수 있는 사회 만들기

<돌봄의 세대 전가>⑤ 노동시장 변화의 싹을 찾아서


※ 취업부모의 양육 책임과 부담이 조부모에게 전가되는 이른바 ‘조부모 양육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돌봄의 세대 전가’ 현상이 왜 발생하였으며 어떤 문제를 대두시키고 있는지,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김양지영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Feminist Journal ILDA

 

장시간 노동 체제에 균열이 생겨야 한다

 

부모를 대신해 조부모가 손자녀를 양육하는 현상이 긍정적인 것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로 읽히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조부모 돌봄 지원의 원인과 사회적 영향에 대해 네 편의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짧게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장시간 노동 체제에 대처하는 취업부부들의 사적인 해결방식, 조부모 돌봄 지원 받기. 그 결과 조부모에게로 전가된 돌봄, 성인 자녀세대의 시장노동 중심적인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부모 지원은 취업여성의 시장노동 수명을 5~6년 정도 더 연장하는, 한시적인 생존 전략일 뿐.”

 

지금과 같은 조부모의 돌봄 지원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은? 그것은 성인자녀 세대에서 ‘돌봄’이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는 것과, ‘아무도 돌보지 않는 노동자 모델’을 유지하고 또 재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성인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로부터 돌봄을 받아왔고, 이제는 성인이 되어 자녀 세대를 양육하며 돌봄을 해야 하는 시기다. 그러나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여전히 조부모의 양육 지원을 받으며 일 중심적인 생활을 하고 돌봄을 최소화한다. 즉, 돌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들에게 돌봄은 ‘안할수록 좋은 것’이 되고, 시장노동이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취업부부의 일 중심적 삶은 돌봄을 하지 않고 직장에서의 생존과 성공만을 중시해온 남성들의 삶과 같다.

 

조부모의 손자녀 돌봄은 자녀가 직장에서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도록 지원할 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노동시장의 기본 노동자 모델인 ‘아무도 돌보지 않을 것’이 전제되는 남성 노동자 모델을 지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인자녀들이 돌봄을 하지 않으면서 직장에서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게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봄을 직접 맡지 않고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공간, 바로 그것이 한국의 노동시장이다! 돌보지 않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은 공간이고, 돌보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처럼 노동시장 안에서 돌봄은 통합되지 못하고 분리된 채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할 문제로 남았다. 취업여성들은 일을 지속하기 위해 조부모와 같은 개인적 자원을 동원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낼 뿐이다. 그렇다면, 노동시장의 구조기 변화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노동시장의 변화는 바로 ‘돌봄’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돌봄을 하는 남성들의 가치관은 ‘다르다’

 

▶ 아이를 돌보며 일하고 있는 남성들은 한국의 장시간 노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일다


인간의 물질적 삶의 경험 차이는 단순히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인식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하트삭(Hartsock, 1983)은 경험이 곧 인식의 토대라고 말한다. 그녀는 일상적이고 세대적인 ‘재생산’을 맡고 있는 여성들이 일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 등에 관한 인식을 발전시킨다고 보았다. 그에 반해 남성들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채, 생산이 아닌 순전히 상품 거래만으로 이루어지는 추상적 삶을 살아가면서 그러한 삶에 근거한 인식을 발전시킨다고 보았다.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느냐가 곧 개인의 인식을 규정한다는 얘기다.

 

‘돌봄’이 노동시장에서 변화의 해법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돌봄 경험을 토대로 다른 인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아이를 직접 돌보며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은 직장 내 돌봄을 하는 소수자로서, 주류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돌봄 책임을 지기 위해서 시장 영역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때 이들의 위치는 시장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가치에 매몰되지 않고, 시장 영역이 어떠한 곳인지 간파하게끔 만들어주고 있다.

 

돌봄을 하는 이들에게 가장 첨예한 것은 ‘시간’이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시장노동 시간과 돌봄의 시간 간에 갈등을 치열하게 겪고 있다. 시장노동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곧 돌봄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일 뿐 아니라, 아이가 방치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퇴근 시간은 돌봄하는 이들에게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이들은 돌봄 시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시장노동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최소화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당연히 한국의 장시간 노동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갖고 있다.

 

돌보는 이들에게 있어 한국의 시장노동 시간은 지나치게 장시간이며, 비효율적인 시간이고, 돌봄이 고려되지 않는 시간이다. 이주혁 씨는 돌봄을 하는 남성이다. 그도 보통 여성들이 퇴근시간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통근 시간이 1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어린이집에 있는 둘째를 오후 7시까지 챙기기 위해서는 오후 6시에 정시 퇴근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매번 정시 퇴근은 눈치 보이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직장에서, 그니까 남자들이 제일 어려운 게 6시 땡 퇴근이 정말 어려울 거예요. 눈치가 보여서라도. 저도 나올 때마다 짜증이 엄청 나요. (지금도요?) 그럼요. 나올 때 아무리 분위기가 바뀌어가지고 6시에 나올 수 있는 환경이 됐다하더라도 노친네들이 나오지 않는 한, 사실 저도 불편해요. 불편한데 어떡할 거야. 내 새끼 당신들이 봐줄 거 아니고. 그럼 내가 가야지. 그러고 가요. 그리고 또 지각도 맨날 한 달에 몇 번씩 해요. 가끔 뭐 위에선 뭐라고 해요. 뭐 뭐 ‘애 데려다줘야 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속도 없는 소리하고. 그리고 속 속으로는 그때 화가 나요. 왜 이렇게 어렵게 애 키우는 아빠에 대한 이해를 못하고. 이 뭐시기한 직장 같으니라구 하면서.”

 

노동자의 기본모델이 ‘돌보는 사람’이어야

 

조부모 돌봄 지원 현상은 한국의 장시간 노동체제가 주요한 원인이기 때문에, 반대로 장시간 노동체제가 해결되면 굳이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해법이 나온다. 그러나 변화는 그냥 오지 않는다. 현재의 노동시장 체계가 문제가 많으며 변화해야만 한다고 인식하는 사람들 수가 많아질 때 시작될 것이다. 현재 시장 영역은 돌봄을 안하거나 최소화한 이들의 공간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은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노동시장 구성원들에 따라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 노동시장은 ‘돌봄을 하는 노동자’를 기본 전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김양지영

 

김수진 씨는 회사 내에서 그러한 변화 가능성을 예증해주고 있다. 그녀는 회사 내 맞벌이 중 다른 지원 없이 직접 아이를 돌보는 유일한 사례다. 수진 씨의 주변에는 많은 여성 조력자들(월수금 아줌마, 화목 아줌마, 아침대기조 아줌마, 펑크 나면 메워주는 친정 엄마까지)의 지원을 받으며 직장에 헌신하는 선배가 있다. 여자도 직장에 올인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해 육아휴직을 않겠다고 선언하며 베이비시터를 고용해 아이를 종일 맡기고 있는 후배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돌봄을 최소화한 선배와 후배와 같은 방식이 아닌, 적극적으로 돌봄을 하는 방식을 택했다. 김수진 씨는 회사에서 1년 넘게 육아휴직을 사용한 두 번째 여성이었다. 그녀의 육아휴직은 후배들의 육아휴직 사용을 촉진했다. 결국 회사에서는 육아휴직자가 많아짐에 따라, 부서 정원에서 휴직자를 제외시켜 인력을 배치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 휴직자들은 동료들에게 업무 부담을 준다는 미안함을 덜며 휴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남성처럼 하는 게 아니라 돌봄을 하는 전략을 취할 때, 회사 내에 돌봄이 통합될 수 있는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돌보는 남성 박진성 씨 또한 김수진 씨처럼 돌봄 경험이 직장과 사회의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상사들은 돌봄 경험이 없는 ‘삼촌 세대’라고 칭한다. 남자가 아이를 보러 집에 일찍 들어간다고 하면 “애는 엄마가 보는 거지. 니가 봐?”라고 대답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처럼 돌봄을 하는 사람이 상사가 되면 조직 문화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돌보는 이들의 출현은 노동시장 영역 곳곳에서 노동시장을 변화시킬 변화의 싹과 같다.

 

노동자의 기본 모델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돌볼 것이 전제되는 것. 바로 노동시장의 성 평등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일 것이다. 돌봄을 하면서 시장노동을 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돌봄을 하는 이들이 생존해서 조직 내 상위 직급의 구성원이 될수록, 시장은 돌봄을 중시하고 돌봄을 기본 전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변할 수 있다.

 

바로 페미니스트들이 돌봄을 강조해온 맥락과 같다.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이 여성에게만 주어짐으로써 그것이 성별 분업을 유지시키며 재생산시키는 기제로 작동해, 가족 안팎의 여성과 남성 간의 불평등을 체계화시킨다고 보았다. 여남 간의 성별 분업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변화의 대상이 더 이상 여성이 아닌 남성이어야 한다고 보고, 돌봄 영역에 남성을 결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왔다. 이것이 바로 함께 돌보고 함께 일하는 ‘보편적 돌봄 제공자’ 혹은 ‘이인 소득자, 이인 돌봄자’ 시민상이다. 지금, 우리는 ‘아무도 돌보지 않았던 남성과 같아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볼 때이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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