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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아픈 이와 관계 맺기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아픈 사람을 대할 때 주의할 점들


“아픈 사람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됐어요.

그런데요, 그럼 아픈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가 오랫동안 아픈 몸으로 살고 있어서, 이 연재 칼럼을 자주 본다는 지인이 묻는다. 명확한 답변을 해주고 싶은데, 아직 나도 잘 모른다. 사람들이 아픈 내 몸을 어떻게 대해주길 원하는지, 때로 나도 혼란스럽다.

 

지난 몇 년 간 몸이 아프면서 여러 불편함을 마주했다. 그런데 그걸 뭐라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 불편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 때가 많았고, 그때 마다 답답함을 일기장에 쏟았다. 그 일기장 속 이야기 일부를 이곳 칼럼으로 옮겨 적어보는 중이다. 내가 느낀 불편함의 맥락을 다각도로 추적해보면서 말이다. 그러니 나도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는 셈이다.


▶ 아픈 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도 잘 모른다. ⓒ이미지: 조짱

 

‘아픈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냐’고 질문했던 지인이 고민을 꺼낸다. 칼럼을 읽기 시작하면서 아픈 친구와 연락을 잘 안하게 됐다며 무척 무거운 표정이다. 아픈 친구의 질병을 성격 탓으로 여기던 부분도 있었는데, 그것을 사회적 맥락과 함께 보게 됐고, 아픈 이의 고민과 어려움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어서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픈 친구를 만나면 어떤 말을 하는 게 적절한지, 적절하지 않은지 고민하게 됐는데, 대부분 답을 찾지 못 하고 방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주 침묵하게 되고, 침묵이 쌓이면서 만남이 부담스러워졌다는 것이다.

 

친구를 이해하는 마음은 예전보다 깊어졌는데, 관계는 더 소원해졌다며 자책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면서 나에게 부탁을 하나 해도 되냐며, 아픈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 일종의 주의 사항이나 매뉴얼 같은 걸 써줄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애초 이 칼럼을 시작하면서 매뉴얼 형태의 글은 가능한 쓰지 않으려고 했다. 아픈 몸을 둘러싼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아직 턱없이 부족하고, 지금은 매뉴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질문을 더 풍부하게 던질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매뉴얼 같은 건 실제 상황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질문을 휘발시키기도 하고 어떤 것을 고정화시킨다. 성급하게 이게 더 옳고 저런 말은 부적절한 것으로 규정해 버리면, 질문과 상상력은 생명력을 잃고 박제된 답만 갖기 쉽다.

 

하지만 앞서 말한 지인의 무거운 표정이 며칠 동안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아마 여러 질문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당장 아픈 이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가야 할지 막막해 하는 이가 그 뿐만은 아닐 것 같다. 그래서 몇 가지 내용을 나열해 보려고 한다. 너무 많은 고민으로 침묵에 빠져 버린 관계가 있다면, 이것을 소재 삼아 아픈 몸들과 대화하면서 새로운 물꼬를 터 볼 수 있다면 좋겠다.

 

# 아프다는 건, 사람의 정체성 중 하나일 뿐

 

아프다는 건, 그 사람이 지닌 정체성의 일부이지 전부는 아니다. 아마도 질병이 그의 삶에서 중요한 이슈이긴 할 테지만, 언제나 그것을 대화 소재로 삼고 싶진 않을 것이다. 특히 장기적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질병이라면 더욱 그렇다. 모든 관계와 대화의 순간에서 자신이 아픈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게 지겹거나, 싫을 수도 있다.

 

정체성이란, 관계 안에서 형성되고 규정되는 것이다. 그에게서 아픈 사람이라는 정체성만 봄으로써 다른 정체성이 축소되지 않도록 유의하자.

 

# 걱정은 정보가 아닌 것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몸이 아프다고 하면, 사람들은 걱정스런 마음에 뭐라도 도움을 주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은 병원이나 의사는 물론, 이로운 음식, 다양한 운동, 대체요법, 투병하는 마음 자세까지 수많은 정보를 전하곤 한다. 하지만 아픈 사람 입장에서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정보가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누구는 저 병원이 좋다고 하고, 누구는 그 병원은 별로라고 하고, 각 개인들이 쏟는 정보가 너무 상이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시기는 정보가 아니라 위로가 필요한 때라서, 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듣기 싫을 수도 있다. 정보가 필요한 지 묻고, 그가 원하는 만큼만 전달하자.

 

▶ 아픈 사람 입장에서, 이런 말들을 듣게되는 건 유쾌하지 않는 일이다.  ⓒ이미지: 조짱

 

# “긍정적인 자세로 노력하면 반드시 나을 수 있어”

 

얼핏 희망을 전하는 말로 들린다. 나도 저런 말이 위안이 됐던 적이 있다. 그런데 노력해도 몸이 잘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자 ‘내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이 좋아지지 않는 건가’ 라는 자책이 들었다.

 

질병이 호전되는 데에는 환자의 노력이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다고 학교에서는 가르치지만, 현실은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빈곤하기 쉽다. 자수성가 성공담과 암 극복의 기적이 TV 프로그램을 채우지만 그건 복권 당첨처럼 낮은 확률일 뿐 아니라, 노력만으로 누구나 이룰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희망이나 격려는 필요하지만,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 걸 자책으로 이어지게 하는 말은 위험해 보인다.

 

# "OO도 같은 병이라는데, 너는 왜 그래”

 

동일한 질병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질병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동일 질병이지만 사람마다 증세가 현저히 다를 수 있다. 겪는 고통의 정도가 다를 수도 있고, 치료법이 다를 수도 있다. 심지어 한의학에서는 동일한 질병(증세)에 대해서 각 몸의 특성에 따라 상이한 처방을 하기도 한다.

 

질병 명은 인간의 몸을 설명하고 치료하기 위해 의학이 부여한 분류이자, 이름이다. 질병 명 이전에 개인의 증세와 경험이 존재한다. 의학사전에 쓰인 질병과 그로 인한 증세 목록과는 다른 증세를 겪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각각의 몸이 경험하는 질병과 증세를 임의로 재단하지 말자.

 

# “꾀병 아니야?”

 

아픈 몸은 잦은 변화를 겪기 쉽다. 지난 한 달 간 가능했던 게, 며칠 사이 체력이 떨어지면서 불가능하기도 하다. 또는 전에 없던 증세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 아픈 몸은 하루에 몇 번씩 맑은 하늘과 먹구름 낀 하늘이 교차하는 대기처럼, 몸 에너지가 불안정한 상태이기 쉽다. 혹은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서 주변 환경에 더 쉽게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아픈 이에게 질병이나 증세에 대한 의구심은 삼가자. 아프다는 건 이미 쉽게 의구심 앞에 놓인다. 물론, 실제 건강한 이들조차 곤란한 상황을 면피하고자 꾀병을 부리는 경우도 있고, 의사는 진료실에서 환자가 호소하는 증세에 대해 환자가 과도하게 증세를 인지하거나 해석하는 건 아닌지 검토하기 마련이다. 의사 입장에선 필요한 과정이지만, 때로 질병 명을 진단받기 전까지 환자가 겪는 증세는 주변에서 꾀병으로 오해 받기도 한다. 자신이 겪는 증세나 고통 앞에서 타인의 의구심을 만나는 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 “아파서 너무 예민한 것 같다”

 

몸이 아프면 예민하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아프기 때문에 몸과 주변 상황에 대한 예민함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아픈 사람의 문제 제기는 그런 예민함으로 인한, 부적절한 것으로 보다 손쉽게 치부되는 것 같다. 고민 끝에 어렵게 문제 제기했더니, ‘생리중이라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때의 기분을 떠올려 보라.

 

상대에게 아파서 예민한 것 아니냐고 말하기 전에, 자신에게 물어보자. 상대의 의견이나 문제 제기 내용을 수용하거나 성찰하기 싫어서, 예민하다는 말로 회피하는 건 아닌지.

 

# “그래도 밝은 표정을 지어야지”

 

아프다고 기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 건강에도 안 좋고 같이 있는 사람도 우울해진다는 말을 흔히들 한다. 이는 아픈 이를 위한 조언일까, 자신의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일까. 아픈 이들은 다양한 통증을 겪거나, 통증이 없더라도 에너지가 저조한 상태를 겪기 쉽다. 그 과정에서 얼굴 찡그림이나 기운 없는 표정은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그럼에도 표정과 감정 관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많다.

 

특히 몸이 아픈 여성들에게 표정에 대한 ‘조언’은 더 빈번한 것 같다. 밝고 상냥한 태도는 이 사회에서 여성에게 요구되는 성역할이기 때문일까? 이미 상당수의 아픈 이들은 ‘저러니까 아프다’, ‘아프니까 예민하다’, ‘아픈 사람과 있으면 기분이 다운 된다’ 등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자기 검열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픈 이들의 표정과 기분까지 교정하려고 들지 말자.

 

▶ 아픈 사람을 대할 때, 건강관리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대상화하는 시선부터 거둬내자.  ⓒ이미지: 조짱

 

아픈 몸을 둘러싼 문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자

 

몇 년 전 ‘건강관리에 유난을 떤다’는 말과 ‘그렇게 제대로 관리를 못하니까 아픈 거다’라는 말을 각각 다른 이로부터 같은 날 들은 적이 있다. 그날 나는 아픈 사람으로서 적절해 보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도대체 아픈 사람의 적절한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프다는 건, 새로운 삶의 정체성이 추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아픈 몸이라는 특성을 안고 어떻게 사회와 관계를 형성할지, 정체성을 협상하고 고민하는 과정에 놓인다는 뜻이다.

 

아픈 이와의 관계에서 필요한 태도는 무엇인가? 나를 포함한 아픈 이들도, 아프지 않은 이들도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요즘 아픈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자주 있는데, 그러면서 점점 많이 드는 생각이 있다. 아픈 사람마다 질병이 자신의 자아감에 미치는 영향, 사회적으로 겪는 고통, 그리고 필요로 하는 사회적 태도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주제가 정말 많다는 걸 새삼 느낀다. 동시에 아픈 몸을 둘러싼 문화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빈곤함을 느낀다.

 

우리 모두 질병과 관련한 빈곤한 문화에 놓여 있기 때문에, 아픈 사람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 답하기 어려운 게 당연한 것 같다. 질문하고, 이야기하자. 그러기 위해서 먼저 아픈 사람을 대할 때, 건강관리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대상화하는 시선을 거둬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시작이다. 그리고 잊지 말자, 누구도 당신에게 아픈 사람을 간섭하거나 통제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감시원의 시선을 거두자.

 

마지막으로,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이야기가 벽의 못에 고정된 액자처럼 존재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시작이다. 저 이야기들이 물 위를 떠다니는 아메바처럼 분화해서 번식하고,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 더 풍부하게 되길 바란다. 돌아다니면서 다른 질문을 만들고, 누군가에게는 마중물처럼 활용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픈 이들이 자신의 불편함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위에 열거한 내용 이외에 아픈 몸으로서 불편했던 이야기들이 덧대지기를 기대한다. (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 하늘을 나는 교실 2016 가을학기 프로그램에 반다 님의 <질병과 함께 춤을!> 강좌가 개설되었습니다. 참여를 원하는 분들은 수강 신청하세요! http://bit.ly/2bC80k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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