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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간섭받고 평가될 수 있는 ‘아픈 몸’
<반다의 질병 관통기> 사회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질병을 앓는 건 잔소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
“암환자였지만, 숨길 수 있는 한 숨겨야죠. 뭣 하러 그 잔소리 속으로 들어가요.”
그가 위암환자였던 경험을 숨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고용계약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그가 자신이 ‘생산력 떨어지는 몸’으로 인식되는 걸 염려하는 건 줄 알았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게 “잔소리”라서 상사의 간섭을 받지 않는 프리랜서가 됐지만, 이따금 씩 프로젝트 팀으로 묶여서 사무실로 1~2개월 동안 출근한다고 했다. 그가 암환자였음을 숨기게 된 계기는 암 수술 후 2년 뒤,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들어간 프로젝트 경험 때문이라고 했다.
그 회사는 회식이 잦은 분위기였는데, 특히 담당 실장이 술을 강권하는 사람이라서 몇 번 망설이다가 위암 수술 이력을 말했다고 한다. 실장은 자신의 어머니도 위암으로 오래 고생했다면서, 더 이상 술도 회식도 강권하지 않았다. 실장은 위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보며 술을 끊으려고 했지만 실패했으며, 그 대신 민족무술과 대체요법을 배워서 술도 마시면서 건강도 지키는 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에게도 민족무술과 예방의학적 대체요법을 권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이후, 실장은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을 때마다 그에게 빠짐없이 코멘트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빨리 먹으면 위에 부담이 된다, 국물을 많이 먹으면 염분 섭취가 많아져서 안 된다, 밀가루 음식은 몸을 차게 한다 등등 매번 ‘식사지도’를 받았다는 것. 사무실에서도 구부정하게 앉아 있으면 장기가 눌려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모니터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시력은 물론 뇌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지적 등이 쉼 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결국 그는 어느 날 조심스럽게 실장에게 말했다. 실장의 지속적인 지적 때문에 점심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편안하지 않다고. 도움이 필요해지면 그때 조언을 구하겠노라고 말이다. 실장은 몸이 아프면 예민해지기 마련이니 이해한다면서도, 그렇게 부정적이면 암이 재발되기 쉬우니 너그러워지라는 ‘충고’를 또 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그의 일부 동료들도 ‘실장이 좀 과한 건 맞지만, 너를 위해서 하는 얘긴데 예민하지 말라’고 조언했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이 얘기를 들은 이후 주변에 물어보니, 아프면서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주변의 “간섭”과 “잔소리”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 아플 때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간섭과 잔소리였다고 말하는 이들이 꽤 많다. ⓒ이미지: 조짱
아프다니까 염려돼서 해주는 이야기인데…
유방암 수술 경험이 있는 한 지인은 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식구들이 다 잠든 밤 혼자 미드(미국드라마)를 보는 일이었다. 그는 그 시간이 유일하게 자신을 위한 시간이라고 느껴지며, 돈 들이지 않고 누릴 수 있는 취미생활이라고 말하곤 했다. 얼마 전 그의 시누이가 몇 주간 서울에 올라와 그의 집에 머문 적 있는데, 자신이 늦은 밤 미드를 보는 취미를 가진 것에 대해 비난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간호사가 직업인 시누이의 주장은 일찍 잠을 자야 몸이 해독도 잘되고 이로운 호르몬도 활성화 되는데,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요지였다. 덧붙여 남편과 아이를 돌볼 책임이 있는 사람이 어쩔 수 없는 이유도 아닌, 겨우 미드를 보겠다는 이유로 늦은 밤까지 잠을 자지 않는 건 “이기적인 취미”라고 했다고 한다. 최선을 다해 건강관리를 하지 않는 건 아내,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태도이며, 가족들에게 미안해해야 할 일이라는 충고까지 들었다고 했다.
아내나 엄마라는 위치가 우리 사회에서 개별적 독립성을 갖기 어렵다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이렇게 일방적인 태도를 개인의 성격이나 시누이라는 관계성만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여러 이야기를 듣다보니, 무심코 흘려보냈던 내 경험들도 떠올랐다. 예전에 귀농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이웃을 만난 적 있었다. 내가 빈혈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들은 그 이웃은 자신의 어머니도 빈혈로 오래 고생을 했는데, 날것의 소 지라(비장)와 생달걀을 매일 조금씩 먹고는 병을 고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두어 달만 그렇게 먹으면 반드시 빈혈을 고칠 수 있다며 권했다. 나는 나에겐 맞지 않는 방법인 것 같다며 거절했는데, 그는 ‘아직 덜 아픈 거 아니냐’면서 자기 주변 빈혈환자들이 다 효과를 봤으니 꼭 해보라고 다시 강권했다.
나는 약간 곤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구체적인 설명을 하며 거절 의사를 표했다. 그러니까 둘 다 생으로 먹으려면 매우 신선한 것을 먹어야 할 텐데, 서울살이에서 그런 신선한 재료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 그리고 나는 15년 전부터 ‘페스코 베지테리언’(유제품이나 계란, 해산물은 섭취하지만 육류, 조류 등은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으로 살고 있으며, 그럼에도 치료를 위해서 약간의 육식을 할 생각은 있지만, 갑자기 생으로 지라를 장기 복용하는 건 내 몸에서 흡수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말도 했다. 달걀의 경우는 나의 한의사와 내과의사가 모두 먹지 말라고 지정한 음식 목록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끔 먹는 거면 몰라도 두 달 내내 먹는 건 안 될 것 같다고 다시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아프다니까 염려돼서 해주는 이야기인데 해보지도 않고 거절한다’며 꽤나 언짢은 기색을 표했다. 나는 나름의 논리적 이유를 들어 거절한 것임에도, 그의 집요함과 언짢아하는 태도가 오히려 불쾌했다. 이후 내가 이 경험을 이야기할 때마다 공감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병을 고쳤다더라. 너도 해봐라’ 식의 강권을 곤혹스럽게 거절했다거나, 거절한다는 이유로 언짢아하는 태도를 마주했다는 건 특이한 경험이 아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 한 워크숍에서 만난 이는 내가 약통을 책상위에 꺼내놓은 걸 보고는 ‘아프다는 걸 전시해놓은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약간 불쾌한 기분이 들었고, 요즘 먹고 있는 약이 많아서 한 두 시간 단위로 약을 먹고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약 먹는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보통 알람을 맞춰놓지만, 워크숍 중에는 알람을 해지해놓기 때문에 약 먹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약통을 책상위에 올려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제서야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고, 이후 워크숍에서 만날 때마다 인사처럼 ‘약은 챙겨 먹었냐’고 물었다. 내가 ‘이따금 깜빡했다’고 답변하면, ‘그렇게 관리해서 몸이 좋아지겠냐’며 핀잔인지 염려인지 모를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 환자와 여성을 대하는 태도
나는 일련의 직간접 상황들이 일반적인 것인지 궁금해서, 이곳저곳에서 아픈 이들에게 물어봤다. 정도는 달랐지만 비슷한 경험들이 정말 많았다. 얘기를 듣다보니, 어쩌면 아픈 사람에 대해 사회가 갖는 어떤 공통된 태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사람에게 질병이나 건강관리에 대해 다들 한마디씩 할 수 있다고, 해도 된다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조차 아픈 사람을 향해 이렇게 쉽게 간섭하고 통제하려 드는 것,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위를 승인해 준걸까?
▶ 충고하고 간섭하는, 이 사회가 아픈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닮았다. ⓒ이미지: 조짱
어떤 면에서 이 사회가 아픈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여성을 대하는 방식과 약간 닮았다. 이를테면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전제로 시도 때도 없이 가르치려고 드는 것(맨스플레인;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한 신조어로,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남자를 풍자한 용어). 부적절한 상황에 문제 제기를 하면, 성찰하거나 사과로 답하는 게 아니라 ‘네가 예민한 거라고’ 충고 내지는 근엄하게 공격하는 모습(성희롱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문제 제기하는 사람이 과도하게 예민한 것!). 그리고 만날 때마다 살이 쪘다거나 빠졌다 혹은 예뻐졌다거나 안 예뻐졌다는 말로 평가하면서, 외모를 사회가 공동 관리하려는 태도 같은 것들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 사회의 표준 몸은 비장애인 남성으로 설정되어 있고, 여성의 몸은 월경과 출산을 하는 ‘표준을 벗어난’ 비정상 몸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니 또 다른 비정상 몸인 ‘아픈 이’와 여성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일면 닮아 있다는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명절에 오가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친밀하게 지내는 가족들은 물론이고, 길에서 마주치면 모르고 지나칠 법한 친척들조차 결혼, 취업, 출산 관련한 질문이나 조언을 쏟는다. 그들은 그게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라고, 다 염려돼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 마치 아픈 이들에게 다 너의 건강을 염려해서 하는 말이라고 하듯이.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명절에 오가는 그런 질문이나 조언이 사실은 간섭과 통제, 우월감을 확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걸 말이다.
‘그런 말’은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건강이 관리해야 할 개인의 스펙이기도 한 이 사회에서, 몸이 아프다는 건 관리의 실패를 의미한다. 또한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아니라, 성공한 만큼 얻는 게 ‘정의’가 된 사회에서 효율성 떨어지는 아픈 몸은 부정의한 것으로 취급되기 쉽다. 심지어 비효율적인 것은 모조리 제거해야 할 것으로 보는 문화에서, 아픈 몸은 스스로에게조차 얼마나 걸리적거리는 존재인지! 가까운 이들은 물론이고 잘 모르는 이들조차, 최선을 다해 ‘건강한 올바른 몸’을 쟁취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런 말’은 아픈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픈 몸은 이미 질병과 치료 과정에서 실망, 고통, 무력을 경험하고 있다. 나의 경우 아프고 나서 내 몸이 편안하게 느껴진 적이 거의 없다. 일상에서 계속 몸을 의식하게 된다. 음식의 적절함은 물론이고 수면, 운동, 생활환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늘 관리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쉽게 통증이나 질병이 몸을 점유하기 때문이다.
나와 달리 건강을 거의 다 회복한 이들도, 이미 아팠던 경험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대부분 이전보다 건강에 무척 신경을 쓰며 산다. 실제 건강관리에 얼마큼 에너지를 쏟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안고 있는 경우도 많다. 나처럼 질병에 포박당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시달리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말이다.
‘그런 말’은 자기 안의 내면화된 건강관리의 강박 외에도 사회적 시선에 감금되는 몸, 사회로부터 언제든 간섭받고 평가될 수 있는 몸이라는 느낌을 추가로 갖게 만든다. 그 느낌이 아픈 이들의 자아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일상에서 사회적으로 관심과 염려라기보다는 통제를 받는 느낌이 추가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까? 사회적으로 자기 통제력, 자기 주도권을 많이 가질수록 수명이 더 길거나 더 건강하다는 보고들이 있다. 아픈 몸에 대한 간섭과 통제를 넘어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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