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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이랑 어울려 사는 게 어때서
<노년여성의 경험을 잇다>4. 할머니 탐구생활
※ 노년여성들이 살아온 생의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이 역사 속에 그냥 묻히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며 다음 세대와 교류할 수 있도록, 노년여성을 만나 인터뷰 작업을 해 온 여성들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내가 사는 마을에 간혹 외지인들이 찾아온다. 죽순철에는 죽순 끊으러, 버섯철에는 버섯 따러, 각종 나물이나 약초 캐러…. 간혹 야생화 사진을 찍거나 백두대간 산행을 위해 찾아오는 이도 있다.
어쩌다 그들과 마주치게 되면, 이 마을에 젊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는 눈치다. 마치 아마존에 사는 원주민을 만난 듯이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문명인이 미개인을 상대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걸어온다.
▶ <할머니 탐구 생활: '할머니'라는 지혜의 창고에서 발견한 삶의 보물들> 정청라 저, 임종진 사진(샨티, 2015)
여기 살면 공기 하나는 끝내주게 좋겠다는 둥, 그런데 마을에 할머니들뿐인데 심심하지는 않냐, 문화생활에 대한 아쉬움은 없냐, 아이들 교육은 어쩌냐…. 어쩌면 그렇게 비슷비슷한 질문들을 퍼부어 대는지, 외지인을 위한 ‘자주 묻는 질문과 답변’(F&Q)을 따로 준비해 두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그들은 대체로 시골 마을에는 깨끗한 자연환경 외엔 누릴 게 없다고 여기는 듯한데, 오랫동안 그런 시선을 맞닥뜨리면서 나는 나대로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있었다. 말하자면 ‘도시에만 그럴듯한 삶이 있는 줄 아느냐, 삶은 여기에도 있다. 할머니들과 사는 게 지루하기만 한 줄 아느냐, 속 깊이 관계 맺고 살다 보면 재미도 있고 배울 게 많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펴내게 된 책이 <할머니 탐구생활>(샨티, 2015)이다. 열 가구 남짓 되는 산중 마을에서 내가 할머니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
힘든 일 겪을 때마다 할머니 내비게이션
책 출간 이후 모 신문사 기자분과 전화로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그분이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 이야기를 담은 책은 이 책 말고도 많이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 책의 차별성은 뭐죠?”
“제목에 ‘할머니’가 들어가니까 할머니에 방점이 찍히지만, 제가 진짜 이야기하려는 것은 제 삶이에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든 의미 있게 살아가려고 하는 제 자신의 삶이요.”
그렇다. 나는 박제된 할머니의 삶을 구경꾼으로서 기록하는 데 그친 게 아니라, 그녀들과 함께 새로운 나의 오늘을 살았다. 할머니들의 이야기에서 끝난 게 아니라 그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고나 할까? 골동품 가게에서 구한 맷돌을 전시용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걸로 밀가루도 빻고 콩물도 내어 빵도 굽고 콩국수도 해 먹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과 공간 속에서 최선의 역할모델을 찾아야만 했고,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할머니였다. 도시 환경과는 다른 시골이라는 공간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 인생의 온갖 마디를 건너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남은 사람, 크게 실감이 나지 않지만 머지않은 날 내가 살게 될 노년을 먼저 살아가는 사람… 그들은 나를 귀농으로 이끈 헬렌 니어링 같은 위인들보다 훨씬 위대할 뿐 아니라 아주 실용적인 내비게이션이 되어주기도 했다.
▶ 나물 도사님과 그녀의 수제자가 고사리 끊으러 가서 한 컷. ⓒ 정청라
당장 산나물을 하러 산에 간다고 해보자. 나 혼자 이 산 저 산 헤매고 다니는 것보다 할머니를 따라 가면 쉽다. 할머니는 이미 이 마을의 온갖 골짜기를 다 누비고 다니면서 어디에 산더덕이 있고, 어디에 깨침(고비)이 나는지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할머니 머릿속엔 세밀하고 방대한 생태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어 있는 셈! 이 마을에 뿌리 내리고 살자면 나 역시도 내 나름의 나물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할머니들을 따라 다니면서 모든 정보를 몸에 새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셋째 아이를 낳을 때도 할머니 내비게이션은 큰 효력을 발휘했다. 병원이 아니고 집에서 애를 낳다 보니 진통 중에 별별 걱정과 두려움이 다 밀려왔지만, 그럴 때마다 마을 할머니들의 말과 삶을 떠올렸던 것이다.
‘싯째부턴 훨썩 수월혀. 몸이 인자 질(길)이 나가꼬 앞에 만큼 아프든 안혀. 근다 해도 칼로 배떼기를 두어번 훑는다 싶어야 애가 나오지만 말이여’, ‘두꺼운 솜이불 있제? 그걸 둘둘 말아서 끌어안고 있어 봐. 훨썩 전딜만 혀. 나도 누가 갈켜줘서 둘째부터는 그렇게 했드만 낫더랑께’, ‘딸이라 했제? 딸은 아들에 비하믄 암것도 아니여. 뼈가 보드라워서 나올 때도 덜 아퍼. 아들은 날 때부터 고생이여 고생….’
‘나는 여덟을 나았어. 두 번은 성님이 받아주고, 나머지는 나 혼자 쪼그려 앉아서 발발 떰시로 나았제. 나아서 탯줄을 인자 발가락 사아에 걸고 요만치(20센티 정도)나 되게 가위로 짤르믄 되아. 애 낳고 태(태반)도 내가 묻었는디 뭐. 태 묻으믄 짐승이 파먹지 못 하게 돌로 꽉 눌러 놔야 혀’, ‘난 말이여, 딸이라고 시엄니가 미역국도 안 낋여 주드랑께. 내가 인나서 낋여 먹고 얼마 안 되아서 못자리 한다고 들에 나갔어.’
그녀들의 경험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산통을 참을 만했다. ‘애를 낳아서 받아서 태까지 묻고, 낳은 지 얼마 안 지나서는 못자리 하러 들에 나간 사람도 있는데 이깟 진통쯤이야’ 싶었던 것이다. 애를 받아주러 오신 조산원 원장님은 ‘어쩌면 소리 한 번 안 지르고 애를 낳느냐’고 놀라워하셨다. 그 비결은 바로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면서도 의연했던 할머니들의 삶을 부여잡았던 것!
▶ 마당에 온갖 화초와 콩을 심어 가꾸는 동래 할머니 뒷모습. 기역자로 꼬부라진 허리로 풀을 잘도 매신다. ⓒ 정청라
그러고 보면 우리 마을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삶을 살았다. 아홉 살에 열병을 앓은 뒤로 눈이 멀게 되어 그때부터 별별 수난을 다 겪으며 살아온 할머니, 노름하는 남편 빚 갚는다고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베 짜서 노름 빚을 갚은 것은 물론 논밭까지 장만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온 할머니, 시어머니의 모진 구박을 삼십 년 넘게 견디며 살아온 할머니, 자살한 자식을 마음 한 켠에 묻고 눈물 지으며 살아온 할머니까지…
한 분 한 분 이야기를 들어보면 누가 누가 더 기구한가 경연대회라도 하는가 싶고, 어떻게 그런 세월을 살아오셨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저 멀리서 바라봤을 때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할망구’였는데, 가까이서 듣고 보는 할머니는 얼마나 강인한 존재인지!
그러니 그 앞에서 나는 힘들다 어쩌다 명함도 내밀 수가 없었다. 나도 나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지만, 그녀들이 겪은 세월에 비하면 고생의 ‘고’자도 모르는 격이라고 여겨져서 말이다. 애 키우기가 쉽지 않아서 힘들어 하다가도, 신랑이랑 티격태격 다투고는 마음상해 하다가도, 널리고 쌓인 집안일 앞에서 한숨을 짓다가도, 할머니들의 삶을 떠올리면 ‘이까짓 게 뭐라고’ 싶어 정신이 번쩍 나곤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들의 한 말씀 한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다.
마주침 속에 생겨나는 ‘무엇’이 있기에
실제로 나는 비리비리한 젊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들께 많은 도움을 받고 신세를 지며 살고 있다, 고구마 모종을 제대로 못 키워 고구마 심을 때를 놓칠라치면 어느새 알고 심고 남은 고구마순을 갖다 주시는 할머니도 있고, 김치가 떨어져서 어쩔까 하고 있으면 김치 담그라고 열무를 갖다 주시는 할머니도 있다. “열무도 소금에 절여서 김치 담그나요?”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으면 “열무김치 담글 줄도 모르간디? 인줘. 내가 담가다 줄게” 하시며 담가다 주시기까지 하고 말이다. (이상하게 똑같은 방법으로 음식을 해도 할머니가 갖다 주시는 음식이 훨씬 맛있다. 손맛에도 연륜이 깃드는 것일까, 아님 ‘다시다 안 넣었다’ 하시고는 살짝 넣으신 걸까?)
김치 담그는 것은 물론 된장 담그는 거, 나물 말리는 거, 떡 하는 거, 도라지 씨 세우는 거…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나는 그때마다 할머니들의 도움을 받으며 하나하나 배우며 익혀 나가고 있다.
▶ 앞집 한평 할머니가 꿰매주신 양말. 할머니는 비 오는 날이면 구멍난 양말을 꿰매는 취미를 갖고 계신다. ⓒ 정청라
그리고 가끔은 나도 내가 가진 변변치 않은 재주(한글 읽기, 전화 걸기, 이야기 들어주기… 시골에선 이런 것도 재주가 된다)로 그녀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는 한다. 글 못 읽는 할머니가 우편물 좀 읽어 달라 하시면 읽어 드리고, 전화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할머니가 택시 좀 불러 달라 하시면 불러 드리고, 속엣말을 하고 싶어 찾아온 할머니가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면 잠자코 이야기를 들어드리면서 말이다.
얼마 전에 말썽쟁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살면서 본의 아니게 아들살이를 하고 있는 할머니가 나를 찾아오셨다. 할머니는 아들이 떠맡긴 손주 둘을 여태껏(중3, 고2 될 때까지) 키워오셨는데, 주말에 애들 데리고 모 때우기(기계로 모내기를 하면 가장자리에 모 심기가 안 된 자리가 있다. 그걸 채워 심는 걸 ‘모를 때운다’고 한다)를 했단다. 그랬더니 아들이 ‘왜 내 자식들 개고생 시키냐’면서 다음부턴 자기 허락 받고 일을 시키라며 몹시 화를 냈다는 것이다.
지금껏 손주들 뜨신 밥 차려 주려고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했는데, 엄마 고생하는 건 안 보이고 제 자식들만 눈에 보이는가 보다며 얼마나 서럽게 우셨는지 모른다. 너무 안쓰러워서 눈물을 닦아드리며 이야기를 들어드렸더니, 마지막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집이한테 얘기하고 나면 속이 후련혀. 내 자식 숭볼까 봐 남한텐 말도 못하고 내 속에만 담고 있는디, 집이가 말없이 들어중께 을매나 고마운지 몰러.”
할머니는 우리 집을 나서며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내가 어떤 해결책을 마련해 드린 것도 아닌데, 그저 이야기를 들어드린 것만으로도 정말 뭔가 도움이 된 걸까? 내가 받은 도움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은혜 갚고 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마주침 속에서 우리는 뭔가를 주고받고 있고, 그렇게 서로의 삶을 고마워하고 있다.
▶ 앞 못 보는 소리실 할머니가 울면서 마당의 풀을 매고 계신다. 할머니는 풀 난 것도 서럽단다. ⓒ 정청라
노인 문제는 없다, 내 문제가 있을 뿐
안타까운 것은, 할머니들과의 마주침도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이 마을로 이사 올 때만 해도 여덟 분의 할머니가 계셨는데, 벌써 세 분이 돌아가시고 한 분은 요양원에 맡겨지셨다. 그래서 빈 집처럼 보이던 집들이 정말 빈집이 되어버렸다.
할머니들은 대체로 혼자 집을 지키다가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이 아프거나 기력을 잃게 되면 바로 요양원이나 병원으로 실려 가신다. 가까이에서 보살펴 줄만한 동거인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부터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된 아흔네 살 동래 할머니만 하더라도, 가족이 곁에 있다면 굳이 요양원에 갈 이유가 없었다. 약간의 치매기는 있지만 마당에서 텃밭 농사까지 하실 정도로 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었으니까. 때문에 하루 두 시간 요양보호사의 보살핌만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만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요양보호사가 올 수 없게 되자 자식들은 할머니를 바로 요양원으로 보냈다.
다른 할머니들은 말한다. 이제 생전에 동래떡 얼굴은 볼 수 없을 거라고. 이곳 할머니들 사이에서 요양원은 ‘죽어야만 나오는 감옥소’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그래서 죽는 것보다 ‘요양원행’이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쌍지떡 보러 요양병원엘 갔다 왔는디 만날 희멀건 죽이나 준께 그런가 뱃가죽이 등에 딱 달라붙었드랑께. 쌍지떡이 내 손을 꽉 잡음시로 그래. ‘한평떡, 나 된장국이 먹고자퍼. 집에 가믄 된장국 낋여줄 거제? 그라는디 얼마나 짠하던지… 내가 쌍지떡 딸이믄 당장 집에 데꼬 올 거여. 거기다 둔께 못 보겄어. 나도 그라믄 어쩌까이…”
잘 죽기 위해 귀농을 결심했던 나이기에, 할머니들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내 마음 역시 편치 않다.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햇살을 느끼며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이다!’라고 읊조리며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을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어느 시설에 몰아넣고 삶을 증발시켜버리는 구조는 잔인하다. 그것은 죽음 이전에 그 사람이 걸어온 고단함과 의연함의 세월, 그 찬란했던 날들에 대한 모독인지도 모른다.
▶ 우리집 아이들에게 동물과 친숙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신 쌍지 할머니. 할머니는 사람보다 개를 사랑하셨다. ⓒ 정청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노년을 지금 삶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왜 우리는 꽃에만 열광하고 씨앗에는 관심이 없는지, 왜 우리는 삐까뻔쩍 화려한 도시의 삶만 추구하고 시골은 ‘인생의 종착점’ 정도로만 여기는지, 왜 우리는 ‘함께’이길 거부하고 ‘제각각’ 살아가는지, 왜 우리는 죽음이라고 하는 삶의 관문을 삶 밖으로 몰아내려 하는지….
할머니들이 늙어가는 만큼 마을도 늙어가고, 할머니들이 떠나가는 만큼 마을도 텅 비어간다. 그리하여 나는 마을 할머니들을 대신해서 소리 높여 말하고 싶다.
“노인 문제는 없다. 내 문제, 우리 문제가 있을 뿐!” ▣ 정청라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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