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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사람이 아닙니까?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⑧ 언어의 성차별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사람들(men)은 남자들(men)인가?

 

케케묵은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아이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가 수술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수술에 배정된 의사가 아이를 보더니 집도를 거부한다. “전 못 하겠어요… 쟨 내 아들이에요.” 어떻게 된 일일까?

 

사실 이 문제의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아버지와 의사가 친부와 양부 관계일 수도 있고, 동성 결혼한 파트너일 수도 있는데, 흔한 답은 ‘의사가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의 함정은 의사가 남성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이 수수께끼는 사람들이 성별 묘사가 없을 경우 의사를 으레 남성으로 가정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 미국 작가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지호, 2001)


미국의 작가이자 편집자인 앤 패디먼(Anne Fadiman)은 <서재 결혼시키기>(지호, 2001)에 실린 에세이 “그/녀의 문제”에서 남성형 일반명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3인칭 대명사 ‘그’(he)에는 남자가 아닌 사람도 당연히 들어간다고 봐야 하나? 어떤 작가가 불특정 개인을 ‘그’라고 지칭할 때, 속으로는 여성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두었지만 편의상 생략한 것뿐일까? ‘인류’(mankind)는 여성들(womankind)을 포함하나?

 

앤 패디먼은 이러한 의문을 작가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볼 기회가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 작가이자 유명한 방송인이었던 클리프턴 패디먼(Clifton Fadiman)이 오래 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men”이라고 쓴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당시에 칭한 ‘사람들’(men)이 정말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지 묻는 딸에게, 클리프턴 패디먼은 솔직하게 대답한다.

 

“남성들이지. 나는 남성들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는 문학계를, 아니 예술적 창조의 세계 전체를 남자들의 세계로 보았지. 대부분의 작가들이 다 그랬어. 1950년 전의 작가-아, 물론 남성 작가지- 가운데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거야.”

 

같은 칼럼에서 앤 패디먼은 자신의 어머니 애널리 제이커비(Annalee Jacoby)의 일화도 소개한다. 종군기자였던 어머니는 시어도어 화이트(Theodore H. White)와 공동 저작으로 <중국으로부터 들리는 천둥소리>(Thunder Out of China)를 펴냈다. 그런데 책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똑같이 올랐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앤 패디먼에 따르면 그 차이는 서문에서부터 분명히 드러났다. “해리슨 솔즈베리는 새로 나온 판본에 서문을 쓰면서, 화이트는 19번 거명했지만 나의 어머니는 딱 한 번 거명했다.”

 

화이트를 19번 거명하는 해리슨 솔즈베리의 서문은 “결국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는 적당한 사람(man)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앤 패디먼은 이에 반발해, 이 책의 저자는 남자(man)가 아니라고 지적하는 편지를 보낸다.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장소에 있는 적당한 여자를” 대신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편지를 받은 솔즈베리는 바로 수긍하고 사죄하는 답장을 한다. 앤 패디먼은 “그/녀의 문제”를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솔즈베리에게 어떤 악의나 성차별을 할 의도가 있었다고 믿지 않는다. 나의 어머니가 여자였기 때문에 엉뚱한 순간에 엉뚱한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언어를 막론하고 아직도 때때로 사람들(men)은 남자들(men)만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가 아닌 사람은 자연스레 배제된다. ‘여자’와 사람의 거리는 의사와 ‘여’의사, 주인공과 ‘여’주인공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성별에 따라 불균등하게 쓰인다. 미(美)중년이라는 말은 어떤가. 이 말은 으레 잘생긴 중년의 남성을 뜻한다. 얼굴에 주름이 지고 옷을 단정하게 입고 연륜을 쌓은 남자들이다. 그러나 중년의 여성이 얼굴에 주름이 지고 연륜을 쌓은 모습은 좀처럼 미중년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대신 그녀들에겐 ‘나이가 무색한 미모’, ‘20대 뺨치는 뒤태’처럼 얼마나 젊은지 견주는 말이 칭찬으로 쓰인다. 여자라면 젊은 외모 이외에는 매력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작년 5월 21일자 영국 가디언지(The Guardian)에 따르면,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의 영화배우 매기 질렌할(Maggie Gyllenhaal)은 37살에 55살인 남자배우의 연애 상대 역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는 20대 여자배우의 상대역으로 50대 남자배우가 너무 늙었다고는 하지 않는다.

 

▶ 우디 앨런 영화 <매직 인 더 문라이트> 주인공 커플을 연기한 배우들은 나이가 두 배나 차이 나지만, 영화는 이를 무시한다. 성별이 반대인 경우도 그러할까?

 

우디 앨런의 영화 <매직 인 더 문라이트>(2014)의 주연 커플은 26살의 엠마 스톤(Emma Stone)과 54살의 콜린 퍼스(Colin Firth)가 맡았다. 그러나 영화는 두 사람의 나이차가 대여섯 살쯤 되는 것처럼 매끄럽게 무시한다. 일흔이 넘은 로버트 드니로(Robert De Niro)는 멋지고, 남자답고, 경험이 많은 노년의 주인공 역할로 여전히 스크린에 오르는 중이다. 나는 케이트 블란쳇(Catherine Blanchett)이 일흔이 넘을 때 그처럼 멋진 노년 주인공 이야기를 여러 편 찍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미중년”과 “미노년”의 자리는 남성에게 훨씬 관대하게 열려 있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라서 25살이 지나면 안 팔린다’는 말을 듣고 자란 나는, 부끄럽지만 정말로 내가 20대에 퇴물이 되어 연애를 못 할 줄 알았다. 나이 들수록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매력이라고, 남자들에게만 당연해보였던 과정이 내게도 당연히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딸이라서 듣는 말들

 

딸로 살면서 듣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에 비하면 어머니와 딸의 위치는 남보다 더 상냥하기를, 더 착하기를 요구받는 자리다.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내게 심한 말을 할 때마다 사사건건 갈등을 겪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수없이 많은 충고를 들었다. ‘네가 딸이니까 먼저 애교도 부리고 사근사근하게 굴어야지’, ‘여자애가 뭐 그리 고집이 세니’, ‘딸이니까 말을 잘 들어야지’, ‘아버지가 상처가 많아서 그래. 딸인 네가 이해해라.’

 

딸이니까, 여자애니까… 참 이상하고 지긋지긋한 얘기들이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났을 뿐이지, 참하거나 착하거나 애교가 많은 사람이라고 정해지진 않았다. 여자가 아니라고 참하거나 착하거나 애교가 많은 사람이 아니리란 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상냥하고 착하게 굴라는 충고는 폭력에 더 쉽게 친숙해지는 남자아이들이 들어야 하지 않을까? 내 아버지가 가족에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욕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문제이지, 딸인 내가 애교가 없는 탓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가 유별나게 폭력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란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타인을 상처 입히는 언행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수용하는 분위기는 무섭다. 내가 아버지 때문에 힘들고 무서웠다고 이야기할 때 가장 싫었던 반응은, 폭력을 겪는 당사자인 내 입장을 빼놓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라고 하는 얘기, 바로 “너네 아버지도 불쌍하다”였다. 평범하고 악의 없는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강력한 말이기도 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따라오는 “불쌍한 남자” 서사는 흔하다. “네가 화나게 해서” 두들겨 팼다는 아내폭력 이야기, “그년이 밤늦게 다녀서” 덮쳤을 뿐이라는 강간 이야기, “취업을 못 해서”, “집나간 마누라랑 닮아서”, “말대꾸를 하길래” 홧김에 저지르고 말았다는 온갖 폭력 이야기들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심지어 ‘여자들이 나하고 연애를 안 해줘서’, ‘여자들이 편하게 살아서’ 힘들다고도 한다. 반대로 그 여자들에게는 ‘네가 딸이니까’처럼 ‘네가 여자니까 알아서 조심해야지’, ‘어딜 여자가’라는 말이 돌아간다.

 

나는 그런 “불쌍한” 이야기를 보면 오히려 거기 동원되는 “괘씸한” 아내와 딸과 연인과 애꿎은 여자들을 생각한다. “불쌍한 남자” 서사가 지배적인 한 그 외의 사람들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내가 겪었듯이 자주 생략되고 삭제되기 때문이다.

 

여직원만 받는 질문들

 

▶ YTN 뉴스에서 보도한, 어느 마케팅 회사의 인턴 구인 광고 논란


직업 세계에 진입하는 여자들, 내 나이대의 여성은 ‘여직원’에게만 던져지는 질문에 답할 대비를 한다. 여자인데 야근할 수 있나, 여자인데 술은 마시나, 여자인데 왜 졸업이 늦었는가, 앞으로 결혼 계획이 있나, 결혼하면 애는 어떡할 건가.

 

나는 취업 상담과 모의 면접에서 ‘안 그래도 여자인데 너무 세보이면 안 된다’, ‘조직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여서 윗선에서 싫어한다’는 지도를 받았다. 먼저 회사에 들어간 여자 선배들은 ‘면접까지 올라갔더니 여자가 나밖에 없더라’는 경험담, ‘상한선은 정말 스물다섯이더라’는 푸념, ‘애는 꼭 어머니가 봐주신다고 답하고 육아휴직 얘기는 생각도 말라’는 충고를 주고받았다. 결혼하는 여직원에게 “우리 회사에는 여자가 결혼하고 근무한 선례가 없다”며 퇴사하라고 압박하는 일은 놀랍게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다.

 

여직원에게 주로 붙는 ‘용모단정’이라는 조건은 진짜 단정함을 뜻하지 않는다. 작년 12월 어느 마케팅 회사는 마케팅/기획 분야에서 인턴을 구하는 광고에 자격 요건으로 “C컵 이상”, “미모와 지성을 겸비”를 내세웠다. 모집 및 채용시 성별로 자격을 제한하는 것은 남녀고용평등법 위반이다. 게다가 마케팅 인턴이 맡는 일은 섹스어필이 아니다. C컵 운운은 결국 여성을 같이 일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선언인 것이다.

 

일하는 20-30대 여성들을 인터뷰해서 기록한 한국여성민우회의 <나만 힘든가?>는 직업 세계에서 여자라서 겪는 일들이 ‘나만’ 겪는 일이 아님을, 아주 흔하고 아주 강력해서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를 정도임을 보여주는 책자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다.

 

“첫 직장에서는 업무 평가를 희한하게 했던 게, 팀 별로 상대평가를 했어요. 팀 인원이 대여섯 명인데 그 안에서 A, B, C, D, E 이렇게 나오니까 결국 한 명은 E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여기서 이유 없이 하위로 평가되는 여직원이 많았어요. (…) 남자는 처자식이 있어서 빨리 승진을 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애당초 능력이랑 상관없이 남자부터 승진이 되게 되어있었어요.”

 

반대로 여직원에게 향하는 결혼계획 질문은 승진보다는 퇴사 여부를 묻는 쪽에 가깝다. “남자는 처자식이 있어서” 승진이 필요하다는 말은 흔하지만,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리는 등 부양가족이 있거나 1인가구 가장인 여자들의 필요는 잘 고려되지 않는다. 여자의 자리는 집, 여자의 본분은 내조라는 생각이 유지되는 한 직장에 있는 여성들은 임시 일꾼이나 예외 사례 취급을 받는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6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여자인 내게 매겨질 월급 평균은 남자의 62.8%다. 그게 현재 한국 여성노동자의 평균값이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전문 직종이라도 ‘그래봤자 여자’라는 평가절하에서 자유롭지 않다. 예전에 들은 여성주의 수업에서는 ‘남자 교수는 교수님으로 칭하면서 여자 교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그런 질문이 나오는 이유를 안다. 예전에 내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주었던 다른 학과 남자 교수가 내 전공학과에 대해 “여자 교수가 많으냐”고 묻더니, 바로 “예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유명하냐”든가 “프로젝트는 잘 따오냐” 같은 질문이었다면 차라리 대답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전공학과의 교수진에 관한 말 중 “예쁘냐”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질문이었다. 아마 그분에게는 “교수”와 “여교수”는 다른 범주였을 것이다. 내가 “여교수”들의 연구 성과나 교수법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는 없었다.

 

▶ 평범한 말, 그냥 하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늘 싸워왔다”

 

미국의 SF작가 캐머런 헐리(Kameron Hurley)는 <우리는 늘 싸워 왔다: ‘여자들, 가축들, 노예들’ 내러티브에 저항하기>라는 글에서, 알래스카 오지 비행사들을 다룬 리얼리티 쇼를 본 이야기를 한다. 모든 비행사에게 소개가 붙었지만 그중 유일한 여성비행사는 다른 비행사의 여자친구라고만 나왔다고 한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야 그녀에게 제대로 된 소개가 붙었는데, 그녀는 전 남자친구보다 경력이 네 배 길고 사냥, 낚시, 암벽등반에도 능한 에이스 비행사였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경험담도 이와 비슷하다.

 

“판사 시절, 어떤 남성이 내게 ‘마거릿 대처 수상은 한 나라의 수상인데도 매일 남편의 아침 식사를 차려준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라고 말했었다. 대처 수상이 실제로 매일 아침 식사를 차리는지 않는지 알지도 못하거니와, 대처 수상이 훌륭한지 아닌지를 그런 기준으로 따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실 그 말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맞벌이 여성들이 대처 수상만큼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는 말이었을까? 당시 나는 매일 남편과 아이들은 물론 시부모님의 아침 식사까지 차려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에 대적할 생각도 하지 않고(실은 일일이 대꾸할 기운이 없어서) 웃어 넘겨버렸었다.” -김영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2016) 추천의 말 중에서

 

여성주의는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 개념”이고 “‘인간’과 ‘인간의 여자’로 나누는 권력에 대한 질문”(정희진 “그 남자의 여자들, 제2의 성” <한겨레> 2015. 7. 3)이다. 평범한 말, 그냥 하는 이야기들이 내게 끊임없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리고는 그런 언어 속에서 실제 여자들, “말하고 설치고 생각하는” 여자들, “여자에겐 불가능”하다는 일을 이미 해낸 여자들은 지워져버린다.

 

한국에서 ‘여자다움’을 요구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나는 ‘여자는 사람이 아니냐’고 되묻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여자인 내가 무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를 대등하게,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말들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다른 많은 분야에서 그렇듯, 말을 바꾼다고 그 속에 든 차별과 고정관념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나하나 바꾸는 것이 곧 차별과 고정관념에 저항하고 변화를 꾀하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여자인 사람들에게 의사나 교수나 동료나 사람이 아니라 여자이기만 하라는 말들 말이다.  나선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 가디언지 기사 보기: Ben Child, “Maggie Gyllenhaal: At 37 I was 'too old' for role opposite 55-year-old man”, <The Guardian>(2015. 5. 21.) http://me2.do/5U7oBriG

 

※ 캐머런 헐리 <우리는 늘 싸워 왔다>: Kameron Hurley, <We Have Always Fought: Challenging the ‘Women, Cattle and Slaves’ Narrative>(2013) http://me2.do/FkceNj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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