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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이자 엄마인’ 이 여성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① 박제된 가족을 넘어
※ 사랑과 안식의 상징인 가족, 그러나 한국 가정의 53.8%는 ‘폭력’가정입니다. 그럼에도 가정폭력은 ‘남의 일’, ‘감히 참견해서는 안 될 가정사’로 여겨집니다. 이제, 가정폭력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기획은 한국여성의전화 ‘5월 가정폭력 없는 평화의 달’ 캠페인의 일환으로 연재됩니다. 이 기사의 필자 김홍미리 님은 한국여성의전화 회원입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끔찍한 일들
▶ 한국여성의전화 ‘5월 가정폭력 없는 평화의 달’ 캠페인 중에서
2016년 4월 5일, 나는 열아홉 살 때부터 지속된 형부의 성폭력으로 아이를 출산한 여성이 그 아이를 살해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아픈 언니와 조카를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 형부를 성폭력범으로 신고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이모이자, 처제이자, 엄마인 이 여성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별거 중인 아내를 불러내 지하 창고에 감금하고 폭행한 남편에 관한 기사도 접했다.(2015년 3월 28일) 남편이 아내를 불러낸 명분은 자녀의 ‘면접교섭권’이었다.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자녀’다. 법은 가정폭력 가해자이기에 앞서 아버지인 그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 ‘가족을 지키려는’ 법의 의지 앞에서 가정폭력은 신중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덕분에 이혼 과정에서 살해되는 여성들이 꾸준하다.
2015년 12월에도 남편은 면접교섭권을 빌미로 아내와 아이를 불러내 둘 다 살해했다. 죽어가는 이들을 떠올리며 연거푸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법이 지키려는 ‘가족’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잃을 바에는 같이 죽거나, 죽인다’는 이 아버지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올 3월에는 아내와 딸을 살해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지난해 10월에는 50대 가장이 말기 암 투병중인 아내와 특목고에 다니는 딸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일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0년 전에 미국 LA에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내와 두 자녀에게 총격을 가하고 자살한 아버지와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딸의 이야기는 올해 4월 LA타임즈 기사로 우리 앞에 돌아왔다. 살아남은 딸에게 ‘가족’이란 무엇일까.
당신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우리는 가족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할 때 종종 주어를 생략한다. 마치 가족은 누구에게나 똑같을 것을 가정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처럼. 하지만 가족은 그 속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구체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의미는 주체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가족이 무엇인지 말할 때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묻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누구’라는 주어를 생략하고 삶의 맥락을 삭제한 채, 가족을 이야기하고 그 소중함을 강조할수록 가족은 점점 박제가 되어간다. 쉴 곳과 기댈 곳을 찾는 무수한 이들을 보며 누군가는 그게 바로 ‘가족’이라고 당연하듯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빼곡하게 규범으로 채운 세계에서, ‘가족’은 특정한 조건 속에서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안식’이라는 걸 준다.
안식은,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처제를 강간하는 형부에게, 그리고 폭력에 저항하기보다 ‘인내’를 선택한 아내를 지속적으로 구타하는 남편에게는 도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스로를 접고 저항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자녀와 ‘가족’을 책임지려한 ‘처제’와 ‘아내’에게는 결코 가족이 안식처라고 말할 수 없다.
▶ 가족은 누군가에게는 안식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억압일 수 있다.
동성애와 이슬람으로부터 ‘가정을 지키자’고?
지난 20대 총선에서 기독자유당 홍보물에 탤런트 서정희 씨가 등장했다. 1983년 ‘성폭행 비슷한 것’으로 인해 방송인 서세원 씨와 결혼하게 됐다는 서정희 씨는 30년을 폭력으로 점철된 생을 살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간통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동성애와 이슬람으로부터 가정을 지키자’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간통죄를 부활하는 것이 남편의 외도, 구타, 강간을 멈추게 할 리 없다. 성소수자와 무슬림에 대한 혐오는 사회에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킴으로써 결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소수자인)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는 일에 기여할 뿐이다. 결국, 이 세 가지 모두 평등하고 평화로운 가족 문화를 만드는 일과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기독자유당은, 그리고 서정희 씨는 ‘가정을 지키자’는 박제된 문장 하나로 이 모든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했다. 동성애를 처단하는 것도 ‘가정’ 파괴를 막기 위해서고, 이슬람을 처단하는 것도 ‘가정’을 위해서이며, 간통죄를 부활해야 하는 것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뿌리 깊은 한국사회의 ‘가족주의’가 정당하지 않는 일에 편의적으로 활용되는 전형적인 예다.
‘박제된 가족’의 옳지 않은 활용 예
한국에서 ‘가정’은 눈 가리고 아웅 할 때 사용하는 만능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청년 세대의 절망에 대해 결혼 못해서 슬프겠다고 퉁치는 일(삼포, 오포, 육무)이라든가, ‘외국 처녀라야 총각딱지 떼는’ 농촌총각을 불쌍히 여겨 인신매매성 국제결혼을 국가가 나서서 실천하는 일(국제결혼지원조례), 저출산(과거에는 고출산)을 경제성장 발목 잡는 주범으로 지목하는 일, 37만 명 성감별로 낙태된 여아를 뒤로하고 ‘올해 총각 6명 중 1명은 결혼불가-최악의 남초’를 걱정하는 일 등. 불평등하게 구축된 젠더 관계와 글로벌자본주의 문제를 가뿐히 삭제한 후, 가정 문제(결혼 못하는 문제와 출산 안하는 문제)로 분리되어 안착한다.
공사 영역이 완벽히 구분된다는 근대식 믿음은 마치 가족에 일어나는 ‘변화’들이 사회와는 무관한 것처럼 가족을 진공 상태로 상상한다. 글로벌자본주의와 젠더 체계를 ‘가정’에서 떼어내고서 오로지 개인의 인내와 노력, 그리고 (낙태/결혼/출산) 선택의 문제로 단순화시킨다. 결국 공-사 이분법은 모든 골치 아픈 문제를 가정이 책임지고 개인이 노력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완성시키는 첫 번째 단추였던 셈이다.
저출산이 문제라며 여성들을 들들 볶고, 심지어 알레르기 질병의 유병율 증가를 ‘핵가족화와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인한 청소 기회 감소’로 지목한다. 이런 추세라면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다 가정이 바로서지 못했기 때문이고, 가정을 버리고 과욕을 부려 사회로 나가려는 여자들 때문이라고 할 날도 머지않았다.
그런 ‘가족’이 뭐라고, 가족을 구성하는 데에도 자격을 묻는다. 성적 지향과 장애, 나이, 인종, 종교 등을 둘러싸고 결혼과 출산의 자격을 묻는다. 동성애자의 결혼과 장애여성의 출산, 그리고 다양한 가족구성의 권리가 ‘정상가족’ 형태만을 수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침해당하는 중이다. 시민과 비시민을 가르는 경계에 ‘가족’이 있고, 그 자격 기준 운운하는 사이에 정작 가족은 부족한 개인들의 공동체적 연대의 개념에서 점점 멀어지는 중이다.
▶ ‘누구’라는 주어를 생략한 채 가족의소중함을 강조할수록 가족은 점점 박제가 되어간다.
‘정상가족’ 코스프레하는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올해도 어김없이 가정의 달이 찾아왔다.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세계 가정의 날(15일)에 이어 부부의 날(21일)까지! 일 년의 한 달만이라도, 한 달에 하루만큼은 가족의 소중함을 기억해보자는 취지로 풀이된다. 가족은 소중하다. 그런데 이 문장의 포인트는 ‘소중하다’가 아니다. 소중해야 할 그 ‘가족’이 과연 무엇인지, 왜 소중하다는 말이 재차 강조되는지가 포인트다. 가족이 무엇인지 되짚지 않고서 소중하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외칠 때, 우리는 ‘가족’을 박제화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을 소외시키기 시작한다.
어린이날 인기 선물을 한 달 전에 미리 확보해둔다거나, TV에 나온 맛집을 어버이날 전에 예약해 둔다거나 하는 식으로 ‘가족행사’를 잘 치르기 위해 노력하면서, 사람들은 가족의 소중함만이 아니라 가족의 무거움도 감지한다. 가족의 지겨움과 고단함, 가족 구조의 서열과 경직성, 가족에 대한 내 감정의 난해함을 함께 경험한다. 복잡한 감정의 회로를 ‘가족’이라는 단어에 새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은 소중하다’는 말 아래에 숨고서, 그 말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방식으로 복잡한 마음을 꾸역꾸역 눌러 담는다. 이런 억지스러움을 포장지에 싸는 다급함으로 5월 가정의 달에 ‘정상가족’ 코스프레는 정점을 찍는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진정 가볍게 ‘가족에게 잘하기’ 코스프레나 하고 살면 되는 걸까?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하나 있다.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는 관계를 그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산다. 독립적인 시늉을 하려 애쓰지만 ‘별에서 온 그대’가 아닌 이상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누군가를 위로하고 누군가에게 위로받으며 산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그런 관계를 표현하는 적절한 말로 ‘가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까 망설인다. ‘가족’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무수한 폭력들 사이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이 따뜻함의 의미를 복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의심을 거두고 가족의 이름으로 누구나의 안식을 바라는 일을 기대해도, 될까? ▣ 김홍미리/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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