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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매력에 반하다

다문화 유행속에서 '차이'를 이야기하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09. 1. 22. 12:34
일하는여성아카데미 활동가 박진영씨

“방콕에 있을 때 언어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 깊이 있는 표현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답답했죠. 거기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일하다 보니까 그만큼 많이 배운 것 같아요.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언어의 차이, 사고방식의 차이에 대해 깨닫게 되었죠.” 
 

태국서 일하며 ‘차이’에 대해 깨닫됐다.

태국에서 살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사람은 올해 마흔이 된 박진영님이다. 1996년부터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인연을 맺고 일해온 그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3년간 방콕에 있는 아시아여성위원회(CAW) 프로그램 간사로 일했다. CAW(Commitee for Asia Women)는 아시아 여성노동운동을 지원하는 국제단체다.
 
“(태국에) 갈 때는 모르니까 용감해서 준비 없이 갔어요. 사람들 간의 차이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다르다’고만 생각했죠.”
 
박진영님은 타지에 가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문화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비로소 ‘다르다’는 것, ‘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한국사람들은 꽤 격한 문화잖아요. 나는 부드러운 스타일에 속하는 편인데, 태국에선 달랐어요. 그곳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이거나 부정적인 표현을 하면 미성숙한 사람으로 여기거든요. 대놓고 비판하거나 소리를 키우지 않아요. 그런데 의견을 이야기하는 나의 태도가 태국사람들에겐 충격적이었나 봐요. 미리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박진영님은 “시행착오를 겪은 만큼 배웠다”고 말한다. 손해도 보았지만 많이 배웠노라고.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 그의 신조 중 하나다.
 
“내겐 당연한 것이 다른 이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호흡이 잘 맞는 스텝들과도 a부터 z까지 설명을 해야 했고. 그러면서 사고가 넓어진 것 같아요. 안에서는 이렇게 보지만, 바깥에선 저렇게도 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아시아, 다문화에 대한 갑작스런 관심 속에서
 
3년 간의 일정을 마치고 작년 8월까지 미국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서 귀국한 박진영님은 현재 일하는여성아카데미 국제사업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빈민여성들과 노동조합원, 아시아여성활동가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네트워킹 사업을 한다.
 
진영님은 한국을 떠나있던 5년 사이, 체감하게 된 우리 사회의 변화 중 하나로 “아시아, 다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것을 꼽았다. ‘한류’의 영향으로 아시아를 큰 시장으로 보게 되었다는 점도 한 몫 할 테고,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 이주여성들이 많아진 탓도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진영님은 바깥에서 본 한국사회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덧붙이길, “시민운동의 경우도 아시아를 한국이 주도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운동수출’이라는 말이 한동안 돌았어요. 국내 시민운동을 아시아로 수출한다는 얘긴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거부감이 확 일었어요. 아마 태국에서 있다가 왔기 때문일 거예요. 나도 한국에서만 줄곧 있었더라면 별 생각이 없었을 수 있지만, 운동수출이란 것이 ‘아류 제국주의’ 같다는 느낌이 들었죠.”
 
아시아 지역의 여성노동운동 조직과 활동가들을 교육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해온 박진영님으로선 ‘운동수출’과 ‘지원’ 그리고 ‘연대’의 방식 사이에 깊은 고민이 있을 터였다. 진영님은 운동의 역량을 교류하고 지원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지만, 다른 사회의 문화와 운동방식에 대해 섣불리 진단하거나 개입하려 해선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사회마다 각기 다른 역사와 맥락을 가지고 있잖아요. 다른 국가의 (시민)운동이 우리 눈에 답답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사회에선 가장 적절한 방식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20대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괴로웠지만…
 
바깥에서 본 한국사회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박진영님의 모습은, 10년 넘게 여성노동운동을 하며 한 길을 걸어온 사람답게 차분하고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이 미리부터 예견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아이러니해요.”
 
진영님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에나 대학에 다닐 때에나 영어를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엔 대학이 동맹휴업을 해서 수업도 잘 안 했지만, 졸업하면 영어를 쳐다보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원에 가니 영어 텍스트를 보게 되고, 국제회의에 가게 되고, 결국 CAW에까지 가서 일하게 되었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성학과에 진학한 것도 기대와는 달랐다. “단지 여성운동을 하고 싶어서, 평생 여성운동을 하는 방법이 뭘까 생각하고 (여성학과에) 들어갔는데, 막연히 그린 그림과는 달랐어요. 말 그대로 학문이었죠. 그만둘까 하다가 1년 휴학하면서 푹 쉬고 나니 다시 공부할 자신이 생겼어요.” 그런데 한국여성노동자회에 들어와 자료수집하고 연구보고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 결국 여성학을 배운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인생이란 어떤 인연으로, 어떤 길이 열리고 닫힐지 모르는 일이다.
 
진영님은 20대를 돌아보면 “너무 힘든 시기”였다고 했다. “질문하고, 괴롭히고, 뭐가 뭔지 모르겠고.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어요.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몰라 괴로웠죠.”
 
여성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선 시기인 30대부터는 자신을 괴롭히던 의문이 많이 사라졌다고 했다. “나이 드는 게 좋아요. 안정적이고, 내 일에 만족해요.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분명해졌어요. 감정의 동요가 일 때에도, 나 자신이 휩쓸리지는 않는다고 할까요?”
 
어머니와의 관계도 전환기를 맞이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안정감과 만족감이 사회생활을 하고 경험을 쌓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박진영님은 자신을 추슬러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2001년 어느 날부터 명상을 시작했다.
 
“일하다가 소진해서 힘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뭔가 잡지 않으면 나가떨어질 것 같았죠. 그래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내 욕구가 무엇인지, 선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인지 물어보았죠.”
 
명상은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고, 당당해지고, 담담해졌다. “여전히 흔들리고 삐걱대지만, 내 결점은 인정하고 수긍하게 되었어요. 툭툭 털고 씩씩하게 살 힘이 생겼어요.”
 
마음 한 켠에 부담으로 자리하고 있던 어머니와의 관계도 전환기를 맞이했다.
 
“어릴 적엔 TV에 지혜로운 어머니, 따뜻한 어머니, 현모양처만 나왔어요. 왜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을까 불만이었죠. 그런데 여성학과 수업과제로 ‘나에게 여성학적으로 가장 멀다고 생각되는 이’를 인터뷰하는 게 있었어요. 심리적 거리가 먼 엄마를 인터뷰했죠. 엄마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부를 더 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고 사회적으로 자아실현하고 싶어하는 젊은 여성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엄마가 ‘한 여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녀관계가 조금씩 좋아졌다. “적어도 내 쪽에서 ‘당신은 날 이해 못해’ 하고 대화를 단절하는 일은 없게 되었죠.”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외국에 나갔다 오고, (엄마 눈에) 변변치 않은 직장에 다니는 딸로서 “엄마가 달가워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이 항상 짐스러웠다는 진영님. 그러나 최근에 어머니는 ‘엄만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지 않냐’는 딸의 말에, “널 자랑스러워 한다고, 자랑스러운 딸이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한다. 신뢰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사실 진영님과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 중에는, 최근 1년여 간의 한국사회 변화와 암울한 미래를 진단하는 내용이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긍정적인 예견을 하기가 어려운 시대다. 그래도, 그렇기에 더더욱, 물질을 추구하는 경향이 극도로 강해진 사회에서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지켜갈 것이라고 말하는 박진영님과의 만남이 든든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 조이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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