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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 국군과 경찰은 누구를 죽였나

[죽음연습] 집단학살과 전쟁이 야기하는 죽음을 보며③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민간인 대량학살의 전형적 사례, 제주 4·3사건

 

대량학살의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다. 당장 20세기 중반에 벌어진 제주 4·3사건과 한국전쟁이 떠오른다.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한국전쟁, 최대 30만 명의 제주도민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4·3사건은 민간인 대량살상의 전형적인 사례다.

 

▲  권귀숙 <기억의 정치> (문학과 지성사. 2006)


권귀숙도 제주 4·3사건에 대한 자신의 소논문들을 묶은 책 <기억의 정치>(문학과 지성사, 2006)에서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밀그램의 실험을 이용해 4·3사건이라는 대량학살 사건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가해자가 대량학살을 어떻게 합리화, 정당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해자는 ‘우리’와 ‘그들’을 구분해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비인간화’한다. 또한 명령을 내리는 상관에게 복종하는 ‘권위화’를 통해 학살 집행자는 책임감이 약화되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되고, 폭력과 살상 행위를 기계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잔혹한 비도덕적 행위에 무관심해지는 ‘일상화’ 과정을 거친다.

 

권귀숙은 이런 과정을 통해 대량학살의 범위가 넓어지고 폭력성과 잔혹성의 강도가 더해짐을 주시한다. 4·3사건에서 학살자 집단이 대량학살이 전개되는 동안 ‘우리’가 아닌 ‘그들’의 범위를 변경, 확대시켜 나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여주는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제주도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에 시작되어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된, 제주도민의 10%, 3만여 명(최대 30만 명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의 목숨을 앗아간 대량학살 사건이다. 이 학살의 희생자 다수는 어린아이, 여성, 노인을 포함한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가해자 집단은 진상조사 결과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등으로 구성된 토벌대와 경찰, 그리고 우익 등을 공격한 남로당 산하 집단인 무장대로 밝혀졌다. 여기서 토벌대로 인한 희생자는 84.2%, 무장대로 인한 희생자는 10.1%라고 한다.

 

‘우리’가 아닌 ‘그들’ 만들기

 

4·3사건에서 다수의 민간인 희생을 낸 가해자 집단인 토벌대가 우리가 아닌 ‘그들’, 즉 ‘적’을 어떻게 만들어나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사건 초기, 즉 무장대가 경찰서를 습격한 후에 ‘그들’은 ‘폭도’로서 경찰서를 습격하거나 경찰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려고 시도한 자이다. 여기에 폭도에게 협력한 자를 덧붙였다.

 

그러다가 ‘그들’의 경계가 달라진다. ‘그들’이 남로당 계열 사상을 가진 자로 바뀐 것이다. 권귀숙은 “미군정, 이승만 세력의 당시 좌익 탄압의 연장선”에서 이해한다. 미군정도 좌익 탄압이 기본 방침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 위기에 봉착한 이승만 정권도 1946년에 각지에서 벌어진 시위와 파업, 1947년 제주도 시위와 파업을 모두 좌익 주동으로 보고 좌익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던 중이었다. 이제 구체적인 ‘행동’보다 ‘사상’으로 적이냐 아니냐를 구별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남로당 계열 사상을 가진 사람을 비인간화해 “인명살상, 파괴, 방화를 일삼는 악력분자”로 규정하고, 무장대를 “백정”이라 부르며 학살의 도덕적 정당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사실 갈옷을 입고 제주 사투리를 구사하는 제주사람들을 놓고 누가 ‘악렬분자’이고 누가 ‘양민’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젊으면 ‘악렬분자’로 의심하고, 남자면 매질부터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들’의 경계가 ‘젊은 놈’으로 확장된다.

 

1948년 10월 제주도 ‘초토화 작전’이 개시되면서 4·3사건이 후기 국면으로 접어든다. 초기 가해자가 경찰 중심이었다면 후기 가해자는 토벌대 중심이다. 이제 해안선 근처, 산악 지대의 통행금지를 어기는 자를 ‘폭도’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범위가 다시 달라진다.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적’으로 내모는 것은 한국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폭격기가 피난민까지 기계적으로 무차별 공격하고 학살한 것도, 단지 피난민들이 미군이 공격하기로 한 장소에 머물러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모두 적으로 간주된 것이다.

 

어린이도 노인도 첩자일 수 있다는 공포심은 확실한 적만이 아니라 적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도 ‘적’으로 간주하고 학살 대상으로 삼았다. 토벌대는 ‘우리가 아닌 자’의 명단을 작성했다. 좌익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더라도 자수한 사람, 입산자 가족, 도피자 가족, 총살자 가족을 모두 의심했다. 소년 공산당, 산협조자 등으로 의심받은 사람들은 이들이 어떤 행동을 했건 상관없이 ‘적’이 되었다.

 

‘그들’의 범위는 계속 확장되었다. 폭도마을 사람, 폭도가 습격한 마을 사람, 죄익분자와 한 번이라도 악수한 사람, 벼루가 있는 사람 등 우리 편으로 확신할 수 없는 모든 사람이 ‘그들’로 내몰렸다. 학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만으로 또한 ‘적’이 되어야 했다. 감금, 고문, 학살이 반복되고 일상화되면서 새로운 적은 날로 늘어만 갔다.

 

가해자 집단인 토벌대는 좌익에 대한 공포심과 증오, 복수심에 가득 찼다. 가해자 대부분이 외지인이었기에 제주도민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조차 없었다. 가해자들에게 자신의 학살은 임무수행일 뿐이었기 때문에 성과만 중요할 뿐 도덕의식 따위는 없었다. 피난한 주민을 학살했음에도 죄의식은 없었고 오히려 성과로 여겼다. 심지어 “자수공작” “함정토벌”까지 동원해 새로운 적 만들기는 계속되었다.

 

급기야 “도민은 모두 빨갱이”로 간주되었다.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과 미군이 자행한 민간인학살

 

▲  신기철 <국민은 적이 아니다>(헤르츠나인. 2010)


민간인 대량학살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전쟁도 4·3사건과 다르지 않았다. 4·3사건에서 공산당 무장대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한 자에서 좌익사상을 가진 자로, 이어서 좌익과 관련 있는 자, 좌익인지 의심스러운 자, 학살당한 자로 ‘적’의 범위를 넓혀가며 규정했듯이, 한국전쟁에서도 ‘의심’에 기초한 주관적 심증에 근거해 학살 대상자를 정했다.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전선의 이동과 함께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민간인 학살이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전투가 없었던 곳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후퇴하던 군인들은 전투가 없는 동안 적을 도울 것 또는 적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청장년들을 학살했으며, 낙동강 전선 형성기에는 적의 방패가 될 것이라는 이유로 피난민들이 학살당했다. 수복하던 국군과 경찰은 적을 도왔을 것이라며 다시 주민들을 살해했다.” -신기철 <국민은 적이 아니다>(헤르츠나인, 2010)

 

한국전쟁 동안 벌어진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점령군에 가담할 수 있고 점령군을 도울 수도 있다는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1948년 12월 1일 법률 10호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에 따라 1949년 6월 5일 조직한 반공단체가 바로 ‘국민보도연맹’이다. 한때나마 좌익사상에 물들었던 사람도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모든 과거를 용서하고 신분을 보장한다는, 이승만 정권의 좌익 회유책이었다.

 

그런데 <전쟁과 여성>(여름언덕, 2004)을 쓴 김현아에 의하면,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이 모두 좌익이 아닌 평소 경찰이나 우익단체에 밉보인 사람들, 할당량 때문에 마구잡이로 가입을 강요당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좌·우익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 전체 보도연맹의 80%에 달했다고 한다.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고 세상이 시끄러워도 아무 탈 없다’는 권유를 받아 가입하기도 하고, 심지어 비료를 타기 위해, 정부에 잘못 보이지 않기 위해 가입한 사람도 많았다.

 

재단법인 금정굴 인권평화재단 부설 인권평화연구소 소장인 신기철은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서 3년간의 한국전쟁에서 ‘반공’이라는 정치적 목적 아래 민간인의 대량학살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국군이 후퇴하면서 전투가 중단된 틈을 타서 진지를 구축하는 사이, 헌병대나 방첩대의 지휘 아래 전투가 없던 호남지역에서는 경찰이 민간인들, 즉 형무소 재소자, 국민보도연맹원, 반정부 인사와 그 가족들을 체계적으로 집단학살했다.

 

거기다 미군 폭격기에 의한 피난민 폭격, 인민군 패잔병 소탕을 위한 토벌 작전에서 민간인 학살이 더해졌다. ‘인민군도 무섭고 경찰도 무섭고 군인도 무섭고 그러니까 총을 든 사람만 보면 산으로 도망친’ 사람을 ‘빨치산’으로 몰아 살해했던 것이다.

 

또, 인민군 점령지를 회복하면서는 ‘부역혐의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1·4후퇴 시기인 1950년 12월, 국군이 2차 수복을 하던 1951년 2월에도 공산당 부역 혐의로 민간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부역혐의 학살은 주로 경찰조직과 경찰의 지휘를 받는 민간 치안조직이 저질렀다고 한다. 부역 혐의로 처단된 사람은 최대 55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결국 한국전쟁의 민간인 대량학살도 ‘반공’의 기치 아래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자행된 것이다. 이 반대 세력은 전쟁에서의 ‘적’과 동일시되고, ‘적’의 범위는 무고한 민간인으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비상조치령, 국방경비법에 의거해 합법을 가장한 ‘적’의 처벌을 계속하였고, 그 가족들을 연좌제로 옭아매었다.

 

대량학살이라는 공적 기억을 통제해온 국가

 

냉전체제 속에서 미국은 소련에 맞서 세계의 자유수호자로 자처하며 힘의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정권의 정통성 위기를 겪고 있던 이승만 정권은 반대 세력을 억압하고 소탕해야 했다.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반공’ 이념 아래 공산당, 좌익 세력의 탄압에 손을 맞잡았다. 이 과정에서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의 대량살상이라는 반인륜적인 일을 자행한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 당시 북한 정권의 민간인 살상과 4·3사건의 또 다른 가해자였던 무장대의 제주도민 살해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승만 정권 이후 ‘반공’을 국시로 내건 대한민국 정권들이 ‘반공’ 이념 하에 자행한 대표적인 대량학살에 대해 수십 년간 은폐, 왜곡하고 그릇된 사실을 과장함으로써 대중이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해왔던 점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4·3사건과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국가는 희생자 가족들의 대량학살에 대한 사적 기억을 넘어 공적 기억까지 통제했다. 권귀숙도, 김현아도 대량학살에 대한 기억이 국가에 의해 억압되고 통제되는 것에 주목한다. 4·3사건과 한국전쟁에서 저질러진 대량학살의 기억이 바로 그 사례다.

 

국가는 제주 4·3사건의 기억을 40여년 간 침묵하도록 강요했고 그 기억을 변형시키고 왜곡하고 과장했다. 40여년 간 대량학살의 희생자 가족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으면서도 밖으로는 절대 말하지 못했다. 공적 기억으로 4·3사건은 ‘공산당 폭동’이었기 때문에 ‘빨갱이’로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억울한 죽음을 목격한 자로서 그 공포스러운 기억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에서 국군, 경찰, 민간치안조직, 미군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공적 기억에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적 기억을 발설할 수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었다. 오히려 공적 기억을 수용하도록 요구받았다.

 

대량학살 자체도 두려운 일이지만 대량학살의 기억을 차단 당한다는 것도 끔찍하긴 마찬가지다. 역사의 망각, 역사의 무지는 미래의 학살범으로 하여금 대량학살을 반복할 만용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억눌린 과거의 치유와 역사적 진실의 복원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대량학살의 반복을 막기 위해 대량학살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는 사회학자 권귀숙의 지적은 옳다.

 

사회적 약자가 ‘그들’이 된다

 

사실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우리’라는 패거리를 형성하며 ‘그들’을 배제하는 경계 짓기는 어느 사회에서나 흔한 일이다. ‘그들’은 흔히 사회 속 약자이다. 이들은 ‘우리’라는 다수의 논리, 즉 ‘집단 이기주의’에 따라 소외당한다. 우리 사회 속에서는 ‘전라도 사람’과 같은 특정지역의 사람이나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와 같은 소수집단이야말로 바로 ‘그들’이다.

 

사회에서 이미 ‘그들’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약자들은 필요시 언제든 ‘적’으로 간주되어 대량학살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 있다. 나치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집시와 동성애자, 치매환자, 장애인 등을 학살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내전, 분쟁, 전쟁과 같은 갈등 상황이 첨예화되면 평소 사회적 약자였던 사람들을 ‘그들’로 경계 짓는 것을 넘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비하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들’이 ‘우리’를 위협하니까 방어해야 한다는 ‘방어 논리’를 거쳐,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니까 보복해야 한다는 ‘보복 논리’에 도달하기 쉽다. 이런 과정은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들’을 잔혹하게 살상해도 무방하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폭력과 살상 행위가 도덕적으로 격려 받고 공적으로 치하되는 결과를 낳는다. 바로 대량학살의 비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를 ‘적’으로 삼도록 부추기는 학살 집행자 배후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면, 또 억울한 희생양이 되지 않으려면, 4·3사건과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의 역사적 진실을 올바로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경신 <도서대출중>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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