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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위험사회’
[죽음연습]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남는 법에 대한 고민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운이 좋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들

 

오피스텔 공사장 크레인이 철로로 넘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달리는 전철을 덮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사망자가 없다고 하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운이 좋았다. 이제까지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운이 좋았다. 대연각 호텔 화재(1971년 12월), 온산병(1980년대 초), 낙동강 페놀오염(1992년 3월), 신행주대교 붕괴(1992년 7월), 청주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1993년 1월), 구포역 열차 전복(1993년 3월), 목포공항 항공기추락(1993년 7월), 서해훼리호 침몰(1993년 10월), 성수대교 붕괴(1994년 10월), 충주호 대형 유람선 화재(1994년 10월), 아현동 가스폭발(1994년 12월), 대구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1995년 4월), 삼풍백화점 붕괴(1995년 6월), 광양만 시프린스호 침몰(1995년 7월), 씨랜드 화재사고(1999년 6월),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1999년 10월), 대구지하철 방화(2003년 2월)

 

이 모든 사건을 뛰어넘어, 먹는 물 중금속오염(1998년), 고름우유 논쟁(1995년 10월), 화학간장 발암물질 파동(1996년 2월), 미국산 쇠고기 병원성 대장균 O-157 논란(1997년 9월), 중국산 ‘납꽃게’ 파동(1999년 8월), 한국 구제역 발생(2000년 이후), 조류독감(2003년 이후), ‘쓰레기 만두’ 사건(2004년 6월), 김치 기생충알 검출(2005년 10월), 수산물 말라카이트 그린 검출(2005년 8월), 산양유 사카자키균 검출(2006년 9월), 멜라민 과자(2008년 9월)의 위협 속에서도 꿋꿋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만원 지옥철에 몸을 싣고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허리를 펼 수 있는 사람은 그저 행운아일 뿐이다.“ -강은주 <비보호 좌회전>(동녁, 2015년) 1장 ‘위험은 늘 우리와 함께 한다’ 중에서

 

‘위험사회’인 이 땅에서 우리가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정녕 운이 좋아서인가? 아파트, 백화점이 무너지고 호텔이 불타고, 다리가 무너져 버스가 추락하는 등 지하철, 열차, 선박,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이 안전과는 거리가 멀고, 물, 생선, 고기 등과 같은 먹을거리의 안전이 위협을 받고 환경이 오염되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살아남는다면 정말 운이 좋은 것인지 모른다.

 

작년만 해도 봄에는 세월호가 침몰하고, 가을에는 판교 환풍구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번 달 초에는 낚시꾼들의 목숨을 앗아간 돌고래호 사고가 일어났다. 어이없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집에 머물러도, 멀리 휴가를 떠나도, 직장에 나가도, 한숨 돌리려 외출을 해도, 우리 목숨을 위협하는 것들이 도처에 포진하고 있다. 언제 내 차례가 올까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강박적으로 안전에 매달린다고 해도 이유가 없지 않다. 우리 사회가 그토록 위험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평균 수명까지 안전하게 목숨을 유지하기가, 병에 걸리지도 않고 장애도 얻지 않은 채 삶을 향유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내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한 모두 남의 일 같다. 위험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그저 운 없는 사람이 된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절반이 좀 넘는 사람들은 위험에 대해 그다지 깊이 생각지 않고 살아간다고 한다. 오히려 위험을 신경 쓰는 사람을 과민하다 말한다.

 

대한민국은 ‘위험사회보다 더 위험한 사회’

 

위험은 도처에 존재한다. 인류의 탄생 이래 지금까지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살아가면서 위험하다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죽음의 그림자를 떨치기 위해 벌이는 일들이 세상을 점차 더 위험으로 내몰고, 오히려 인류를 죽음 속으로 이끌고 간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과거에는 자연이 인간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인류는 광포한 자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자연의 위험에 맞서고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과학과 기술을 동원했다. 과학과 기술은 인류를 자연으로부터 구원해주는 듯했다. 그럼에도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지배한 것은 아니다. 비록 자연의 위험이 과거보다 줄어들었다고 할지라도, 자연의 파괴적인 힘 앞에서 인간은 지금도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게다가 오늘날은 자연적 위협에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인위적 위험까지 더하고 있다. 자연 정복을 위해 총동원한 과학과 기술은 우리 생명을 구하는 유익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새로운 위험 속으로 몰아넣은 유해한 것이기도 하다. 과학과 기술이 날로 복잡해지면서 위험도 훨씬 커지고 따라서 그러한 위험에 대한 예방도, 예측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1944-)은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1986년 <위험사회>를 출간하면서 현대 산업 사회가 우리에게 풍요만 안겨준 것이 아니라 위험도 더불어 던져주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  홍성태 <대한민국, 위험사회>(당대, 2007년) 
 

오늘날 한국 사회가 바로 그 ‘위험사회’다. 아니, 그 어떤 ‘위험사회’보다 더 위험한 사회라고 한다. 사회학자이자 시민운동가인 홍성태는 <대한민국, 위험사회>(당대, 2007년)에서 그렇게 분석한다. 대한민국은 사고가 쉽게 일어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대형 사고가 빈번한 ‘사고공화국’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 사회가 그 어떤 사회보다 위험해진 데는 근대화 과정이 그 어떤 사회보다 폭압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본다. 독재 권력이 군사력과 경찰력을 동원해서 단시간에 폭력적으로 근대화를 주도했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충고한다. 군사적 성장주의와 파괴적 개발주의가 만나 부패와 부실을 낳았고, 안전을 무시했으며, 대형 참사를 일으켜 자연과 사회를 동시에 파괴했다. 1970년대의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와 1972년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가 바로 그 사례다.

 

군사적 성장주의와 파괴적 개발주의는 이후 과도한 경쟁과 이윤 추구, 생명 경시와 자연파괴를 일삼는 ‘천민자본주의’와 성장제일주의로 면면히 이어졌다. 1990년대의 대형 사고들, 즉 다리, 아파트, 백화점 붕괴, 기차, 선박, 항공기 사고, 전철 화재 사고 등은 돈을 위해서라면 생명 따위는 하찮게 여기는 사회에서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1990년대를 넘어 21세기에 들어섰지만, 우리 사회는 개발과 성장에 매달리고 돈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점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인위적 위험이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

 

이명박 정부도 위험을 증폭시키는 데 일조했고, 박근혜 정부도 다르지 않다. 2009년에는 여객선 선령을 20년에서 30년으로 늘리고, 2013년에는 위험물 선박 운송 기준을 완화하고, 2014년에는 선박 검사 및 수리 기술자를 정규직이 아닌 파견근로자로 고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해운뿐만 아니라 항공, 환경, 생활 안전과 관련한 규제들도 차례로 완화, 철폐했다. 모두 기업 부담을 경감하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만들었던 규제들을 완화하고 철폐하는 작업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진실로 우리는 위험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위험을 무시하고 위험에 마냥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 ‘죽음에 초연하다’고 감탄할 수만은 없다. 제 목숨을 함부로 하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사회적 약자의 목숨이 더 위태롭다

 

“사고의 원인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경악했다. 비리, 부패, 대충대충, 빨리빨리, 날림, 뇌물, 규정무시, 불감증,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남았다. 오히려 이제야 참사가 일어난 것이 신기할 노릇이었다.” -강은주, <비보호 좌회전> 4장 ‘자본주의가 증폭하는 위험’ 중에서

 

홍성태는 1995년 삼풍백화점의 사고가 반복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그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극도로 위험한 사회인지, 홍성태의 표현을 빌리자면 얼마나 ‘위험을 체계적으로 생산하는 사회’인지 알 수 있었다. 어떤 개인이 무책임해서 벌어진 사고로, 재수가 없고 운이 없어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아니, 부적절하다. 무엇보다도 대형사고의 희생양이 사회적 약자라는 점에서 그렇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 50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 61%인 306명이 정식 직원, 파견직 직원, 아르바이트생까지 포함해 노동자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세월호의 침몰 사고에서 사망자와 실종자의 수는 304명, 그 중 수학여행 길에 오른 단원고 2학년 학생만 250명이 희생되었다.

 

사회가 복잡하고 과학, 기술이 복잡해서 세상이 더 위험해졌다면, 사회적 강자나 약자 가리지 않고 위험에 똑같이 더 노출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위험의 배분은 불평등하다. 강은주가 <비보호 좌회전>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도 그것이었다. 왜 우리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더 위험한 사회인지 물어봐야 한다. 왜 사회적 약자가 더 병들고, 더 위험한 노동에 종사해야 하고, 더 위험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왜 갑작스럽고 어이없는 죽음에 더 노출되어야 하는지, 왜 이토록 위험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해법은 소통과 참여, 연대하는 ‘민주주의’일 것

 

날이 갈수록 사회는 더 위험해지는데 누군가는 그 위험에 훨씬 더 취약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이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나아가 덜 위험한 사회를 만들려면, 난무하는 인위적 위험에 제동을 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제까지 운에 기대고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나?

 

과속 성장과 파괴적 개발, 과도한 이윤 추구와 경쟁, 부패와 비리, 정보의 독점과 소통의 부재와 같은 사고 위험의 본질이 분명하고, 사고 위험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상황에서, 여차하면 예기치 못한 비극적인 사고사로 억울한 죽음을 맞고, 그 죽음에 대한 책임도 제대로 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과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잊히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말도 안 되게 위험해지는 것에 제동을 거는 수밖에 없다. 강은주의 말대로, 해법은 ‘민주주의’에 있다. 소통하고 참여하고 연대하는 민주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는 위험사회를 더 위험해지도록 만들 뿐이다. 언제 위험의 골짜기로 추락해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우리 사회에서 나만 안전하기는 어렵다.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정보도 찾아보고 공부도 하면서 각자가 의식 수준을 높여야 함은 당연하지만, 혼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그러고 보니 이 땅 그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누구나 때가 되면 죽음을 맞겠지만 적어도 사회적 약자로서 크고 작은 사고의 희생양으로 인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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