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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자급과 조금의 노동으로

<이 언니의 귀촌> 전북 완주에 살아요(상)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   텃밭 경작하기    © 김다솜

 

완주? 저 멀리 강원도 산자락에 자리한 지역 이름인양 생소한 명칭이었다.

 

이곳은 전라북도 완주. 깨끗한 만경강과 높거나 낮지 않은 산자락이 관경을 압도하고 군데군데 평야까지 펼쳐져 있으니, 완주에 입성한 첫날에 “이곳에 살고 싶다!”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날 수밖에 없었다. 또 매우 한국적이라서,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전주가 인접해 있으니 이 역시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왔다.

 

완주에서 퍼머컬처를?

 

처음 완주를 알게 된 건, 완주에서 무려 퍼머컬처 학교가 개교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퍼머컬처(permaculture: 영구적이라는 의미의 permanent와 농사 agriculture를 합친 말)란 지속가능한 농법을 의미한다. 집, 텃밭, 생활공간 등을 자연과 밀접한 생태공간으로 조성하는 방법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사실 이 디자인 코스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대안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호주에 퍼머컬처를 이용해 계획된 마을인 ‘크리스탈워터스’를 방문하면서부터다. 당시엔 퍼머컬처의 의미나 가능성보다는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평화로움과 자유로움에 압도당했다. 그 후부터는 이상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마치 그런 곳이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퍼머컬처 디자인 코스가 다양한 형태로 열리고 있지만, 그 당시 퍼머컬처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교육 과정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시골에서 1년가량 퍼머컬처 코스를 밟을 수 있다는 것에 그저 설레는 마음이었다.

 

이십 대의 언어로 소통할 사람이 필요해


▲   텃밭에서의 첫 수확    © 김다솜


설렘을 가득 안고서 그 다음 해에 다니고 있던 학교를 휴학한 뒤 퍼머컬처 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웬걸, 서울서 온 타 지역 학생은 당시 스물두 살이던 나와 오십대 아주머니 한 분뿐이었다. 전주에 살고 있는 삼십대 언니 오빠 세 명, 이렇게 달랑 다섯 명만이 이 학교의 학생이란다. 조금 예상은 했지만 좀 더 애쓰는 마음으로, 또래가 없는 이 현실을 담대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자연스레 서울에서 함께 온 오십 대 아주머니와 함께 고산의 작은 팬션에서 삶터를 꾸렸다.

 

집 앞은 맑은 만경강이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십 대 초반의 생기발랄함 때문이었는지, 나는 이웃과 할머니들에게 유독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학교는 집에서 5km 정도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자전거, 걷기, 히치하이킹 등을 했다.

 

학교에 사람 수가 적고 대부분 직장인들이었기 때문에 매번 수업이 촘촘하게 열리지는 않았다. 자연스레 이웃들과 보낼 시간이 확보되었다. 오후엔 농산물 직거래 판매를 하는 앞집 아주머니와 달래나물에 맥주를 끼니로 때우며 수다를 즐기는 일상을 보내곤 했다. 그 외 시간에는 기타도 치고, 일기도 쓰고, 산책도 하는 소소하고 소박한 일상을 즐겼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겐 이러한 시간이 마냥 낭만스러운 시골생활의 모습으로 그려질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만족스러웠지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오곤 했다. 저 먼 태평양을 건너 부모 곁에서 떨어져도, 고등학교 내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친구들과 치고 박고 싸움을 해도, 자취생활을 하며 매일같이 엄마가 싸준 멸치볶음에 맨밥을 먹어도 결코 느껴본 적 없었던 외로움이라는 그것이 찾아온 것이다.

 

이 시골에 없는 딱 한 가지는 바로 ‘또래친구’, 이곳엔 나의 언어로 소통할 즉 이십 대의 언어로 소통할 공간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내겐 그들이 필요했다.

 

또래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산촌유학센터 ‘일’

 

▲   비싼 바질 수확   © 김다솜


자연스레 젊은이들이 있는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내가 있어야 할 터가 마땅치 않아 이사를 알아보고 다니던 찰나, 우연히 고산 지역에 있는 산촌유학센터를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함께 일하며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거기엔 다양한 연령층의 선생님들이 있었고, 자연스레 이십 대 청년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 아이들과 함께 산속을 누비며 3만원치의 밤을 거뜬히 줍거나 꿀맛 같은 홍시를 따러 다니곤 했다. 작은 텃밭에 아주 가끔 물을 주면서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을 완주에서 보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사무일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보냈다. 아이들과 함께 24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또래 친구들과 그 고충을 함께하니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노동이었다.

 

그렇게 퍼머컬처 학교와 산촌유학센터 일을 병행하며 완주에서의 1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 나는 세 차례 이사를 했으며, 퍼머컬처 과정을 수료했고, 센터에서 지속된 캠프에 참여했고, 지역에 사는 수십 명의 이웃들을 알게 되었다. 1년 과정이 끝났을 때, 그 여정이 여간 힘들게 느껴졌는지 자연스럽게 대학에 복학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행복한 학교생활을 하고 졸업을 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다시, 완주로

 

사실 고등학교 때 호주에 다녀온 이후로는 시골살이 공동체에 대한 막연한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방향으로 진로를 정하는 것이 나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4학년 막 학기에도 물론 걱정이 되긴 했지만 취업에 대한 불안감이나 입사하고 싶은 회사는 없었다. 당연히 시골로 내려가거나, 내려가기 전에 내 전공과 관련된 시민단체에서 일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퍼머컬처 교장 선생님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해당 지역의 사정에 맞는 기술)과 관련된 협동조합을 일러주셨다. 시골살이의 필수적인 요건 중 하나인 손재주를 배울 수 있는 적합한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학부 시절에 뜻이 맞았던 유쾌한 친구가 완주에 자리를 잡은 터, 서로 완주에서 의지하고 우정을 나누며 꿈을 펼치기 위해 졸업과 동시에 다시 완주에 가는 건 별 문제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덜컥, 일을 시작하고 보니 이 직장에서 남성은 사십 대 이상이었고 여성은 나 하나뿐이었다. 대안학교를 졸업하고 타 대학과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의 학풍을 띈 대학을 졸업한 나로선 이 직장은 지금까지와는 굉장히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남성우월적이며 관료적인 공간, 경쟁하는 공간이라 느껴진 것이다. 게다가 전공과 무관한 회계일 역시 영 내게 맞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장생활이란 스트레스 비용으로 임금을 받고, 스트레스를 소비로 해소하는 괴상한 쳇바퀴처럼 느껴졌다. 이곳에 헐레벌떡 취직해버린 내 자신이 미웠지만, 그래도 1년은 버텨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좀 더 촌사람 같이, 좀 더 가난하게

 

1년이 지난 후 장기적인 계획을 조금 더 앞당겨 좀 더 촌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임금노동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소비하고 사는 삶을 살아보고자 마음먹었다.


▲   볏짚으로 멀칭하는 모습    © 김다솜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스무 평 남짓의 텃밭이다. 동네 친구와 함께 군청에서 1년에 4만원의 임대료를 내고 텃밭을 얻었다. 작은 텃밭에 스무 가지가 넘는 작물을 심었다. 토종씨앗으로는 담배상추, 대파, 시금치, 열무, 갓, 옥수수, 단수수, 오이, 단호박, 들깨를 심고, 일반모종으로는 가지, 고추, 파프리카, 치커리, 양배추, 토마토, 호박 등을 심었다. 가을에는 배추, 대파, 상추 등을 또 심고 아직까지도 열심히 거두고 있다.

 

텃밭은 나의 작은 옥탑방 속 작은 밥상에 매번 끼니와 연결될 수 있도록 고민했다. 돈벌이가 크게 없으니 음식은 되도록 텃밭에서 자급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자연히 건강한 제철음식을 먹게 되었다.

 

제철마다 매번 다양한 식재료들이 텃밭에 불쑥불쑥 나와 버리니, 요리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증폭되었다. 친구의 집에서 수시로 음식을 해먹고 일명 ‘쿡방’도 열심히 다운받아 보았고, 집 앞 도서관에 있는 요리책들을 빌려 읽었다. 쌈 채소가 나오면 쌈을 싸먹고 겉절이도 해먹었으며, 채소 파스타를 해먹기도 했다. 대부분의 것들은 양이 너무 많아서 장아찌로 저장하기 바빴다.

 

작은 텃밭이 내게 준 기쁨과 풍요

 

작은 텃밭이었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가지 않았다. 신문지와 볏짚으로 멀칭을 두둑이 해두었고, 볏짚이 모자라 멀칭을 하지 못한 곳엔 신문지 혹은 풀 멀칭을 해주었다. 잡초들을 건성건성 뽑아주긴 했지만 풀숲이 되지는 않게끔 관리해줬다. 화학제품은 물론 퇴비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되도록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그 해 기후에 맞게 작물이 자라길 바랐기 때문에 물도 거의 주지 않았다.

 

자연농에 가깝게 작물을 기르려 노력했기 때문에 별다른 무리 없이 즐겁게 경작할 수 있었다. 물론 성장이 더디고 결실이 콩알만한 농작물이 전부였지만 나와 내 친구가족의 밥상에 모자람은 없었다. 여름이 다가오고서부터는 이웃들에게 상추, 대파, 고추, 가지 등 풍년인 농작물들을 나눠주기 바빴다. 


▲   텃밭 재료로 만든 파스타와 샐러드    © 김다솜

 

적당한 땀과 수고로 일을 마무리하고 작물을 한바구니 따와서 요리를 해먹을 때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친구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더없이 기뻤다. 혼자 해치울 수 없는 작물을 이웃과 나눌 때에도, 그걸 또 감사히 받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었다.

 

이웃 동네엔 산이 많아 자원이 풍부하니, 텃밭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은 먹거리 채취 원정을 가기도 했다. 친구와 함께 매실을 따기도 하고, 대나무 숲에 가서 죽순을 캐 부모님께 보내기도 했다. 서울에서 친구가 놀러올 때면 버려진 뽕나무 군락에 찾아가 오디를 한 바가지 따서 잼과 술을 만들기도 했다. 조금의 땀과 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나의 자급생활에 활력과 풍요를 주었다.

 

여태껏 탁상공론에 그쳤던 자급농에 조금 가까워가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게다가 내 손노동으로 할 수 있는 꺼리들이 늘어난다는 것 역시 굉장히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김다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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