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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도 계속되는 미국의 “학살의 정치학”

[죽음연습] 집단학살과 전쟁이 야기하는 죽음을 보며②



<철학하는 일상>의 저자 이경신님의 연재 ‘죽음연습’. 필자는 의료화된 사회에서 '좋은 죽음'이 가능한지 탐색 중이며, 잘 늙고 잘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대량학살로 얼룩진 20세기

 

난징대학살의 참혹한 증거 사진들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중일전쟁 다시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간 양민과 중국군 포로 30만 명 이상을 무참하게 학살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난징대학살이 20세기에 벌어진 예외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20세기는 ‘학살의 세기’라고 불릴 만큼 끔찍한 학살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1930년대 구 소련에서 스탈린은 2천 만 명을,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집단수용소 유대인 600만 명과 집시, 장애인, 치매환자,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등 소위 ‘독일의 적’ 500만 명을, 그리고 1975에서 1979년 사이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가 170만 명을 학살했다. 그밖에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벌인 대량살상, 보스니아의 무슬림 살해, 이라크에서 쿠르드족, 과테말라에서 마야족, 수단에서 누비아 족, 르완다에서 후투족에 대한 인종청소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1차 세계대전 후 ‘대량학살’(genocide)이 빈번해졌다고 하는데, 현대식 살상무기가 대량살상을 더 손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엔은 인종, 종족, 민족, 종교를 말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모든 행동을 ‘대량학살’로 정의한다. 더 포괄적인 정의에는 자신과 다른 집단, 즉 정치 사회적 집단을 말살하려는 행위도 포함시킨다.

 

좀 더 살펴보면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을 상대로 살해·고문·강탈·성폭력 등과 같이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손상을 초래하는 행위, 식료품 및 의료 서비스의 박탈과 강제적 소개 같은 비인간적인 생활 조건 부과, 출생을 막기 위한 조치, 어린이들의 강제 이송, 물리적 폭력, 폭력의 위협과 강압 같은 현상이 중첩적이고 포괄적으로 이루어질 때” 대량학살이라 볼 수 있다고, 유엔은 <제노사이드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에 명시하고 있다.

 

대량학살은 법적으로도 명백히 범죄 행위다. 전쟁 포로만이 아니라 어린이, 여성, 노인을 포함해 무장하지 않은 다수의 민간인을 희생양으로 삼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학살과 사악한 학살의 분리?

 

그런데 나쁜 학살, 부정의한 학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쁘지 않은 학살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등장한 것이다. 올바른 정신 상태라면 학살이, 대량살상이 어떻게 나쁘지 않을 수가 있는지 당장 의문이 생긴다.

 

미국의 사회비판적 지식인인 노엄 촘스키(1928-)와 에드워드 S. 허먼(1925-)은 1973년에 출간을 거부당한 공저 <반혁명의 폭력>에서 부정의한 범죄 행위인 학살에 부적절한 수식어, 즉 ‘자비로운’이나 ‘건설적인’과 같은 긍정적 수식어를 붙인 학살에 대해 언급한다.

 

‘건설적인 학살’은 미국이 자행했거나 미국 국익에 즉각적으로 도움이 되는 학살이고, ‘자비로운 학살’은 미국 동맹국이나 종속국이 수행한 학살이다. 반면 ‘사악한 학살’은 미국의 적대국이 저지른 학살이다. 당시 촘스키와 허먼은 미국의 엘리트 관료와 기득권 지식인들, 그리고 미디어가 미국과 관련되는 학살을 축소, 부인하거나 도덕적으로 포장하는 반면, 적국의 학살은 과장하고 왜곡시키기까지 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미국이 조종하거나 승인한 학살이냐, 아니면 적국이 저지른 학살이냐에 따라 학살을 나눈 셈이다. 철저히 미국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전자는 나쁘지 않은 학살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학살일 수 있고, 후자는 인류의 적이자 악의 화신이 벌인 사악한 학살이 된다.

 

촘스키와 허먼은 <반혁명의 폭력>에서 베트남(1954-1973), 필리핀(1898-1973), 태국(1946-1973), 인도네시아(1965-1969), 캄보디아(1965-1979), 동파키스탄(1971), 부룬디(1972)의 대량살상을 미국이 주도하고 집행하고 물질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원한 학살의 사례로 제시했다.

 

최근 극장에서 상영된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기억의 표면으로 끌어올린 1960년대의 중반 인도네시아의 대학살극도 이 사례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기득권 세력은 아직도 “미국의 인도네시아 공격과 인도네시아 자국 내에서 자행한 학살 행위를 교묘히 감추고 있지만”, 미국의 정직한 지식인들은 1970년대 초에 이미 미국이 인도네시아 학살에 개입되어 있다는 걸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의 주류 지식인들과 미디어는 300만 명 이상이 살상당한 베트남전의 진실도 극구 부인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21세기에도 미국 중심의 “학살의 정치학”


▲  에드워드 S. 허먼, 데이비드 페터슨, 박종일 역 <학살의 정치학>(인간사랑, 2011)


놀라운 사실은 2008년 12월에 발행한 <학살방지>란 보고서에서조차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학살은 주목할 만한 사례로 취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학살의 정치적 이분법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에드워드 허먼과 데이비드 페터슨의 공저 <학살의 정치학>(인간사랑, 2011)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나치 치하의 독일, 크메르 루주 치하의 캄보디아, 사담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 1992년에서 1995년 사이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1998년과 1999년의 코소보, 1994년의 르완다, 그리고 2003년과 2010년 사이 수단의 다르푸르에서만 ‘사악한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르완다 학살의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고 잔인한 독재자가 구원자가 추앙받는 등 거짓 선전을 통한 진실 가리기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이 자행한 학살과 관련해 희생자 숫자 부풀리기가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1998년 이후 코소보에서 살해당한 사람은 총 2천 명 정도인데, 그 중 세르비아인에 의해 살해된 사람은 500명이었고, 또 1999년 1월 코소보에서 일어난 ‘라차크 학살’에서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살해당한 코소보 사람보다 코소보 해방군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허먼과 페터슨은 특히 ‘라차크’의 학살을 ‘가공의 학살’로 분류하는데, 거짓 선전을 동원해 세르비아인의 잔혹행위를 꾸며냈기 때문이다.

 

사악하지 않는 대량학살로 우선, 이라크에서 벌어진 ‘건설적인 학살’부터 살펴보자.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후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경제제재에 돌입했고,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이라는 근거 없는 핑계를 대면서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다. 이라크 경제제재와 이라크 침공에서 미국이 자행한 대량학살과 기간시설 파괴로 이라크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음에도, 미국 측은 오히려 이라크인을 위해 미국인들이 재산과 생명을 희생한 것이라고 우긴다.

 

하지만 이라크는 전략 폭격으로 인해 수도, 위생, 전기 공급 시스템이 파괴된 상태에서 경제제재까지 받아 13년 동안 파괴된 시설들을 복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전염병이 돌고 수많은 어린 아이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다.

 

경제제재로 80만 명, 침공과 점령으로 인해 100만 명의 이라크인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르완다 학살을 제외하고 학살이 벌어진 그 어떤 지역에서도 이라크에서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라크에서 미국이 야기한 대량살상은 ‘사악한 학살’이 아니라 ‘건설적인 학살’이다. 석유매장량이 풍부한 이라크에서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이 미국의 실질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미국의 동맹국이나 하수인들에 의해 벌어진 소위 ‘자비로운 학살’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미국이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외교적으로 보호하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며 중동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는 ‘사악한 학살’이 아니라 ‘자비로운 학살’에 속한다. 반면, 이스라엘의 폭력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의 행위는 ‘테러’일 뿐이다.

 

또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 억압은 ‘사악한 학살’로 평가한 반면, 터키정권이 1980년대 중반부터 쿠르드 족을 억압하여 30만 명의 목숨을 뺏고 300만 명의 쿠르드인을 난민으로 내몰았음에도 미국은 변함없이 터키 정권에게 지지를 보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군부 정권이 1975년부터 1999년까지 동티모르를 침공해 20만 명을 희생시키는 동안, 미 행정부와 미디어는 합세해서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자비로운 학살’로 승인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동맹국인 영국, 오스트레일리아는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동티모르에서 자국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무기를 제공하고 학살을 은폐하는 등 군사적, 외교적으로 수하르토 정권을 지원했다. 그런데 24년 동안의 동티모르에서 희생된 사람이 폴포트 정권 하에서 살해된 캄보디아인보다 많았다.

 

학살과 전쟁을 통해 세계에 군림한 미국

 

허먼과 페터슨이 <학살의 정치학>에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학살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몰락하면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지배자로 등극한다. 1948년 당시에 미국은 이미 세계 절반의 부를 차지했다. 미국은 이후에도 정치, 군사, 경제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학살과 전쟁을 이용해 왔다. 미국은 자주와 독립, 더 나은 삶을 위해 들고 일어난 세계 각지의 민족주의 봉기를 억압하고, 이 민족주의적 움직임을 억누르려는 현지의 군부 엘리트와 손을 잡았다.

 

미국의 투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면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독재정권, 라틴 아메리카의 파시스트 정권을 지원해 그곳 국민 대다수를 공포에 몰아넣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현지 독재자가 실권하면 미국이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적들로부터 무고한 민간인을 보호할 책임, 인도주의적 사명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정당화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조종·지원하는 테러리즘, 침공, 반인도주의적 범죄, 학살은 축소하거나 무시, 포장하지만 미국의 적들이 벌인 학살에 대해서는 미디어를 통해 ‘사악한 학살’로 선전해왔다. 때로는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부풀리길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미국은 국제법상 예외가 되어 대량살상이라는 범죄행위에 대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다.

 

지금도 미국의 패권정치는 ‘학살의 정치학’에 기대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현대식 살상무기에 희생되는 민간인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미디어의 농간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세계 어디선가 대량학살이 벌어질지라도 우리는 진실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그리고 미국의 적들이 벌이는 잔혹행위에 대해서는 미디어의 거짓과 과장이 우리의 눈을 가릴 수도 있을 것이다.

 

허먼과 페터슨에 따르면, 심지어 NGO와 유엔관료들까지 미국의 학살 정치학의 논리를 뒤쫓고 있다고 하니, 우리는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할 수도 있다. 분노를 넘어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한다.

 

지난 20세기, 한반도도 학살의 비극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가 벌인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살상, 그리고 전두환 정권에 의한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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