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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와 물질, 민박…생계를 잇는 과정
<이 언니의 귀촌> 제주에서의 독거생활(하)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편집자 주] 

 

5년. ‘벌써’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시간이 이곳 제주에서 흘렀다. 5년은 스무 계절, 33살에 내려와 37살이 되었으니 나의 삼십대 중반을 오롯이 제주와 함께했다. 반농반어(半農半漁)하며 살고픈 마음이 아니었다면 제주가 아닌 전라남도나 경상북도 어느 곳에 깃들어 스무 계절의 시간을 살아냈을지도 모를 일. 삶이란 건 우연과 의도가 겹쳐져야 완성되는 퍼즐 같다.

 

▲  제주에서의 스물 한 번째 계절을 맞이하고 있다.    © 라봉 
  

짧은 연애 같았던 제주 시골생활 1년이 지나고

 

처음 제주에 왔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아름다움’이었다. 육지에도 산골로 가면 예쁜 시골마을이 있지만, 대체로 어딘가 모르게 황량하고 쇄락한, 거칠고 버려진 듯한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제주의 시골은 알록달록, 올망졸망, 집도 밭도 그 자체로 그림으로 다가왔다.

 

레고블록 같은 작은 집에 낮은 지붕, 까만 돌담이 오종종종 집들과 밭들을 경계 짓고, 밭에는 한겨울에도 파릇파릇한 것이 가득하고, 빈 밭은 까만 흙이 짙게 눌러주는데 그 경계에 마주 닿은 겨울 하늘은 더욱 푸르러보였다. 높은 건물도 높은 산도 없는 뻥 뚫린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구름의 파노라마는 해질 무렵이면 장관을 연출했고, 보고 있노라면 ‘아, 좋다’라는 느낌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봄이 되니 유채꽃은 노랗게, 무꽃은 하얗게 피어나고, 여름엔 지중해 빛깔의 옥빛 바다가, 가을이면 햇볕을 받고 더욱 반짝이는 억새물결…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 뺄 것 없이 선명한 색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  제주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계절 뺄 것 없이 선명한 색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 라봉 
 

그러나 이런 감상에 젖은 마음도 잠시, 제주로 온지 일 년쯤 지났을 때인가 이곳에 없는 것들이 고파오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바다’는 가까이 있지만 일상적으로 거닐만한 ‘작은 숲’이 없다는 것, 일교차가 적어 빈약한 단풍에 억새뿐인 가을, 한라산 언저리가 아닌 다음에야 소복이 쌓이지 못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녹아버리는 눈 등… 나를 둘러싼 것들에게 점점 삐딱한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어갔다. 종종 육지를 드나들 때면 사방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는 산들이 듬직하고 멋져 보였고 저 산 아래 깃들어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다. 그 당시 나에게 제주는 잠깐 스쳐지나가는 짧은 연애 같은 곳이었다. 이런 마음은 혼자 살게 된 이주 3,4년 차에 더욱 깊어졌다. 이곳 제주는 충분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지만 ‘농사’를 삶의 가운데 놓고 살고픈 내게는, 게다가 홀로 살아가기에는, 다소 막막한 땅이었던 것이다.

 

자아실현형 농사에서 생계형 농사로

 

봄, 여름, 가을은 씨 뿌리고 풀매고, 갈무리를 하다보면 정신없이 지나가다가 매년 겨울만 되면 난롯불 곁에서 고민의 골이 깊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디서 살아야 할까. 애초에 제주로 내려오기 전에 마쳤어야 할 고민과 번민들이 밀린 숙제처럼 밀려왔다. 최선이 아니어도 좋으니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답답함만 늘어갔다. 고민만 하다가 겨울이 지나고 또 겨울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제주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이곳에서 살자면 내 의지와 고집을 조금은 접어야 할 것 같았다. 친한 이웃언니의 조언을 따라 돈은 되지 않고 손은 많이 가는 다품종 소량생산 토종 잡곡 위주의 ‘자아실현형 농사’를 줄였다. 대신 화산토가 많이 섞인 우리 동네의 주작목인 겨울당근을, 후작으로는 미니단호박을 ‘생계형 농사’로 지었다.
 

▲  화산토가 많이 섞인 우리 동네의 주작목인 겨울당근. 한 번도 약을 치지 않았는데 잘 자라주었다.  © 라봉 
 

그 언니의 배려로 학교급식에 나갈 열무와 얼갈이 하우스 농사도 함께 80평 남짓 지었다. 동네 이웃가족과 300평 고구마 농사도 반작으로 지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비닐멀칭을 하고, 그동안의 무투입 농사에서 벗어나 유기농 인증을 받은 퇴비와 비료를 사서 밭에 넣었다.

 

당근은 약을 한 번도 치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큰 병 없이 잘 자라 주었다. 단호박은 달걀노른자와 기름과 물을 섞어 만든 난황유를 쳐주었지만 끝물엔 흰가루병을 잡지 못해도 무리 없이 수확을 마쳤다. 고구마는 그만하면 풍년이었다.

 

뒷좌석을 떼어낸 자체 밴 개조 마티즈로 당근과 단호박, 고구마를 실어 날랐다. 꾸역꾸역 넣으니 스무 개 넘는 박스가 실렸다. 작지만 묵직해진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차에서 내리고 집 안으로 들이는 일이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이 차올랐다.

 

들썩이는 부동산…점점 더 소농이 설 자리 없어

 

작년은 농사 말고도 큰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동네 삼촌의 소개로 작은 집을 한 채 산 것이다. 55평짜리 작은 땅 위에 작은 집과 작은 창고와 작은 마당과 작은 우영(텃밭)이 딸린 작은 돌집.

 

빌려 살 수 있는 오래된 시골집이 넘쳐나던 첫해, 두번째 해와 달리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이곳 제주의 시골에도 주거불안의 조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오래 살 수 있을 거라던 집도 다른 육지 사람이 집세도 더 내고 싹 고쳐서 살겠다고 했다는 말이 들려오고, 이웃친구의 집은 재계약이 불발되었다.

 

뉴스에선 중국자본이 제주 부동산을 들썩이게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제주 동쪽 마을은 중국자본보다 5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아진 육지의 이주민 여파라고 볼 수밖에 없다. 넘쳐나는 수요와 제한된 공급은 가격 상승으로, 경제학원론 시간에 배운 것들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다. 없이도 풍족했던 좋은 시절이 가고 있었다. 소소한 시골로 남기에 이곳 제주라는 땅은 부적합지다. 농사짓는 밭이 아닌 장사하기 좋은 땅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  제주 부동산이 들썩이면서 점점 더 소농의 설자리가 줄어들었다.   © 라봉 
 

제주 시골집에 대한 충족되지 못한 사람들의 욕망은 밭으로 눈길을 돌렸다. 작은 돌렝이(밭)들이 전(田)에서 대지(垈地)로, 즉 농사짓는 땅에서 집 짓는 땅으로 변해갔다. 서울에 살 때도 늘 개발의 한복판에 있어서인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것들보단 새롭게 올라가는 것들 투성이인 것이 불만이었는데, 이곳 제주마저 그렇게 되어 버렸다.

 

덩달아 밭세도, 밭값도 껑충 뛰었다. 대농이 아니고서는 점점 더 소농의 설자리가 줄어들었다. 소소소농, 미세농으로나 분류될 나. 물려받을 땅이 있는 고향도 아니고, 트랙터는커녕 관리기조차도 없이 혼자서 짓는 작은 농사로만 먹고 살기는 요원한 일이었다. 나이도 점점 먹어가고 어쩌면 이대로 혼자 살아가야 할 수도 있겠는데, 보다 단단한 자립과 노후준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우연찮게 내 몫이 된 그 작은집을 고쳐 민박을 해보기로 했다. 반농반어(半農半漁) 농사로만은 부족한 부분을 물질로 채우려던 애초의 계획은 수정되고, 우선 ‘반농반숙’ 농사와 민박 반반으로 채워보기로 했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그리고 민박집 ‘팔월의 라’

 

아흔이 넘어 혼자 사시던 할머니가 가스렌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주무시다 집에 불이 난 후 자식 곁으로 떠나가시고 비어있던 그 집. 화재로 뚫린 부엌 천장 사이로 파란 하늘 한 조각이 빼꼼이 보였다. 주위에선 싹 밀고 새로 지으라고 했지만 내 눈엔 버릴 것 보단 남길 게 더 많아 보였다. 기본 틀거리 안에서 허술했던 단열을 보강하는 쪽으로 집수리가 시작됐다.

 

촌집생활 5년, 다른 무엇보다도 단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들이었다. 집이 춥다는 건 건강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좀먹었고 겨울을 저주하게 만들었다. 난방을 해도 집이 추울 수 있다는 것, 그곳 서울에선 잘 몰랐던 사실이었다. 단열되지 않은 벽과 허술한 알루미늄 샷시 틈으로 불어오는 황소바람은 겨울의 제주를 더욱 춥게 만들었다.
 

▲  우연찮게 내 몫이 된 작은집을 고쳐 민박을 해보기로 했다. 이름은 ‘팔월의 라’.   © 라봉 
 

크게 크게 벽면을 세워가는 신축과 달리, 자잘한 면들을 살리며 하는 시골집 리모델링이라 공사는 예상보다 더디게 끝이 났다. 여름에 시작한 공사가 마무리 된 시점이 한겨울. 봄이 오길 기다려 이듬해 4월, 작은집 독채민박을 시작했다.

 

양철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시적으로 표현한 김연수의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 민박집 이름치곤 추상적이고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최종적으론 처음 떠올렸던 ‘팔월의 라’로 정했다. 도배 대신 직접 페인트칠을 해 마무리하고 이부자리와 작은 냉장고, 탁자 등 기본적인 살림살이를 채워갔다.

 

처음 블로그를 오픈하고선 주로 지인이나 건너 지인들로 채워지더니 이제는 낯선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작고 소박한 시골집 민박 ‘팔월의 라’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7,8,9,10월은 만실. 올 여름은 농사보다도 민박집 청소와 유지 보수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농사일에 지장이 될까봐 2박 이상 예약만 받다가 지금은 하룻밤 묵어가는 손님도 받지만, 역시 연박이 지긋이 밭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농사만 지을 땐 매일같이 애쓰게 일해도 몇 달에 한 번 작게는 몇 십만 원 클 땐 백만 원 남짓한 돈이 수입의 전부이더니, 민박을 겸하니 따박따박 통장에 돈이 들어와 살림에 안정감을 실어주었다. 밭에서 일을 할 때도 전보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묵어가는 손님들에게 농사지은 것들까지 팔 수 있으면 일석이조. 내년이면 동네 바다에서 물질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농사도 짓고 물질도 하고 민박도 하고. 반농반숙반어. 멀지 않았다.

 

스물한 번째 계절도 이곳 제주에서

 

친구들과 함께 산 2년, 혼자 산 3년, 총 다섯 해, 스무 계절의 시간이 이곳 제주에서 흘렀다. 작년엔 오랜만에 애인이 생겼다. 육지에서 배 농사를 짓는 그 친구와 내년부턴 제주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다시 누군가와 함께 사는 삶이다. 여럿이 함께였다 혼자이다가 이번엔 둘이 함께. 혼자 농사지어 심심하거나 힘들었던 부분을 많이 채워주리라 벌써부터 기대가 부풀어 오르는 한편, 늘 함께라는 건 서로 모두 애를 많이 써야하는 일이었던 지난 경험이 되새겨지는 요즘이다.
 

▲   제주에서의 삶은 충분하다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 라봉 
 

지난 추석 무렵에는 집주인의 갑작스런 이사 통보로 한 동안 꽤나 마음이 심란했다. 다행히 동네 안에서 살 집을 어렵사리 얻으며 어지러웠던 마음은 추슬러졌다. 가을볕에 익어가는 곡식 갈무리와, 찬바람 들기 전 고구마를 캐다보니 이제 11월, 여름과 가을을 넘나드는 계절이 아닌 본격적인 가을과 겨울의 경계가 코앞에 다가왔다. 12월엔 묵은 살림살이들을 챙겨 이곳 제주에서 두 번째 이사를 떠난다.

 

그동안 혼자여도 혼자가 아닌 삶을 살았고, 이젠 함께여도 늘 함께가 아닌 삶을 살 것 같다. 그 삶이 꼭 제주일 필요는 없지만, 아직은 제주였으면 좋겠다. 거친 섬 바람이 나를 내치지 않는다면 까만 흙을 만지고 푸른 바다 속을 헤엄치며 이곳 제주에서 스물한 번째의 계절을 맞이하고 싶다. 이제 제주에서의 삶은 충분하다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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