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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쌍벽 황진이, 이매창 … 천 년 절조絶調의 여성 예인
2. 동경 허난설헌, 허소설헌 … 나는 그녀의 환생이다
3. 회우 운초, 죽향 … 시인과 화가, 가슴속에 품은 우정
4. 대칭 김명순, 김일엽 … 매장된 미완의 예술가
5. 석연 나혜석, 백남순 … 별들의 운행, 단 한 번의 스침
6. 대구 윤심덕, 최승희 … 세상보다 키가 컸던 두 여자
7. 홀림 이화중선, 김소희 … 소리에 홀린 사람
8. 반조 이월화, 복혜숙 … 여배우의 의리, 여배우의 우정
 
국내 여성예술가들을 들여다보다 
 

홍인숙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좋아하는 여성예술가에 대해 물어볼 때 십중팔구는 서양의 여성예술가의 이름을 말한다.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을 것이다. 국내 여성예술가들에 대한 대중적인 소개가 미흡했던 탓도 있고, 어쩐지 그녀들의 삶은 요람부터 무덤까지 절망적인 분위기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선입견 때문이기도 하다.

 
먼 외국나라에서 겪었던 좌절과 절망은 낭만적인 느낌을 주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제도권에 저항하다가 상처 입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쓰라린 괴로움을 가져다 준다. 백작가의 청혼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자작의 딸에 대한 느낌과 신랑 얼굴도 못 보고 울며 가마를 탔던 양반가의 규수에 대한 느낌이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말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여성예술가들이 같은 땅을 밟고 사는 후대여성들에게 조금 덜 사랑 받는 것은, 그들의 삶과 아픔이 지나치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는 ‘슬픔’을 ‘슬픔’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 밟히고 채여서 훌쩍이며 울거나 독하게 이를 악무는 여성 ‘개인’에 대해 말하고 있기보다는 서로를 알아보며 교감을 나누었던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두 명의 여성예술가들을 짝 지워 그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공통점과 교차점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시도가 그들의 개인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묶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건 저자가 각 여성예술가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해석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성예술가 사이의 유대’에 주목하다

 
<시작은 단순했다.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 땅에 살았던 여성예술가들, 그녀들의 고독한 삶을 불러내 훈김을 불어넣는 이야기, 그녀들이 끝내 만들고 싶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 예술가로서 살아간 그녀의 삶을 다시 쓰는 이야기. 그것은 이 땅에서 여성예술가들이 창조자로 자리하기는커녕 늘 흥미로운 얘깃거리로 소모되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창작을 하는 남성예술가의 영감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뮤즈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창작의 주체가 되고자 했던 여성예술가들은, 지금도 흔히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호출되곤 하지 않는가. 그래서 글을 쓰면서 처음 가진 기준은 단 하나였다. 예술가의 삶은 작품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녀’의 삶을 증언하는 작품과 자료를 뒤지는 중 뜻밖에 발견하게 된 것은 그녀의 삶에 어른거리는 ‘또 다른 그녀’의 그림자였다. 그녀들은 친구이기도 했고, 선후배이기도 했다. 비슷한 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갔던 동료이기도 했고, 한 세대를 격해 삶의 이정표가 되어 준 스승이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그녀들의 관계가 때로는 대단한 설렘을 주었고, 때로는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안타까움을 주었다. 그녀들이 서로에게 드리울 수 있는 그림자가 조금 더 짙은 것일 수 있었다면, 그림 속 여자의 눈빛은 좀 덜 외롭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서로의 삶에 조금 더 깊이 관여할 수 있었다면, 그녀들이 견뎌야 했던 슬픔의 중량도 조금은 덜어지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글을 쓰는 두 번째 기준이 자연스럽게 마련되었다. 여성예술가들이 서로의 삶에, 서로의 예술 세계에 대해 주고받은 관계와 영향을 중심에 놓을 것. - 작가의 말 중에서>
 
국내에 여성예술가 평전들이 제법 있지만 여성예술가들의 교류와 영향에 주목하여 소개한 저서는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말에서 읽히는 소망대로 저자는 ‘여성예술가 사이의 유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남성예술가들 간의 깊은 우정과 남성예술가와 여성예술가의 사랑은 노래되었지만 여성예술가들 사이의 교류는 이야기된 적이 거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유대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힘에 주목하고 있다.
 
뚜렷하게 만남이 교차된 챕터도 있지만, 교류의 흔적이 희미하여서 저자의 적극적인 해석이 주를 이룬 챕터도 있다. 저자의 시선은 무조건적인 편애에도, 장점마저 부정해 버리는 가혹한 신랄함에도 있지 않다. 굳이 이 시선을 정의하자면 ‘섬세함’일 것이다. 완벽하지 못하고 한계도 많았으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연민과 비판 사이에서 감탄할 만큼 줄타기를 잘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선배 여성예술가들과 화해를 하게 되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혜석’이라는 한 인간의 풍경이 모순 없는, 단 하나의 진실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혁명적인 성향이 받아들여지는 한계선을 잘 알고, 그 선을 넘어가지 않는 현실적인 영리함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여성에게 지나치게 부과된 가사노동의 부당함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집안일과 육아를 빈틈없이 하고 남은 여가에 그림을 그린다’고 공공연히 말할 수 있었다. 그녀는 주부로서 완벽한 것이 자신의 예술활동에 대한 사회적인 지지를 얻게 해 주는 ‘칭찬받을 만한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다.
 
또 다른 면에서 나혜석은 단순하고 철없는 부르주아적인 의식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지주의 딸로 태어나 외교관의 아내로 살던 그녀는 민중이 가난한 원인을 오직 그들이 ‘더럽고 게으르고 어리석기 때문’이라고만 보았다. 식민지 조선 하층민의 삶에 대한 이해가 단순하고 평면적이었던 만큼, 그녀는 서구의 근대화된 문화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녀는 특히 프랑스인들의 자유분방한 애정관계에 대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구식의 자유연애에 대해 그녀가 가졌던 지나치게 순진한 환상이 최린과의 연애를 추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49>
 
모순적인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나혜석’에 대한 해석을 보자. 신여성의 대명사로 손꼽혔던 그녀가 자신의 일탈을 가부장제 내에서 안전하게 인정받기 위해 ‘현모양처’로서의 자신을 부각시켰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쪽에서 여성의 해방을 외치면서도 다른 편으로 전통적인 여성상에 맞추어 가사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모순이 그녀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이 ‘인간’의 내면임을 지적하고 있다.
 
20대의 나는 ‘존경하는 언니’가 사회적으로 큰 성취를 이루기를 바랐다. 그녀들이 결혼을 통해서 타협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사랑을 보냈던 것만큼 실망을 표했다. 조금 더 철이 들고 나서야 이러한 이분법이 얼마나 위험하고 기만적인가를 깨달았지만 지금도 종종 길을 잃는다. 나혜석에 대한 마음 역시 그러하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널리 인정받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남편과 이상적인 신식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찰나에 불륜을 선택한 것이 어리석어 보였다. 그깟 남자가 뭐라고. 그깟 연애가 뭐라고. 자신이 전부를 걸어서 박살이 나는 걸 보니 ‘나혜석’과 ‘테스’가 다를 바가 없어서 허망했다. 나의 마음은 당대 신여성들이 나혜석에게 가졌던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혜석에게 쏟아졌던 비난이 오롯이 남성의 것이며, 오롯이 가부장적인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곤조곤한 글귀들을 따라가다 결국 한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녀도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누구나 내면에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지니고 있고, 굽힐 수 없는 욕망과 기만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그녀라고 왜 다를까. 그런 게 없어야 한다고 우겨대는 나의 시선이 더욱 폭력적인 것일 터이다. 그렇게 마음 한 구석에서 못마땅해 하던 선배 여성예술가들과 화해를 하게 된다.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흠도, 티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서,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을 만큼 당당하게 세상을 발 아래 두기를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회적 제도가 짓누르려 마음 먹으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그 시대의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네들의 슬픔, 치열했던 삶
 
여성예술가들을 묶어내는 키워드는 만남의 여러 빛깔이다. 막상막하의 쌍벽을 이루기도 하며, 서로 다른 대칭과 대구가 되기도 한다. 그리워하나 다시 마주치지 못하는 석연이 되기도 하고, 주거니 받거니 정을 교환하는 회우와 반조가 되기도 한다. 그 한 자락을 슬쩍 엿보면 다음과 같다.
 
<김소희가 이화중선의 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열세 살, 이제 막 아이의 티를 벗기 시작한 무렵이다. 구경하는 사람들 틈에 간신히 끼여 앉아 있던 키 작은 소녀를 뒤흔든 것은 난생 처음 접한 아름다움, 소리였다. 그것은 ‘구름에 달 떠가듯’ 수월하게 뽑아 올린 소리였으며, 아득한 고음으로 내질러도 두리둥실 유유하기만 한 소리였다. 그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달콤함과 애간장을 녹이는 서러움이 한데 녹아 있었다. 김소희의 어린 영혼은 이화중선의 그 유유자적한 슬픔의 소리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소학교를 마치고 큰 도시 광주로 가 상급 학교에 입학하려던 한 소녀의 인생은 그 순간 예술가의 삶으로 급선회했다. 그것은 한 뛰어난 예술가가 또 다른 위대한 예술가를 만나는 장관의 순간, ‘홀림’의 순간이었다.
 
<중략>
 
다시 두 명창의 ‘추월만정’을 차례로 듣는다. 이화중선의 담담하고 유유자적한 ‘추월만정’은 사실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요즘 감수성으로 듣기에는 좀 덜 슬픈 게 사실이다. 근대 판소리는 조선 시대보다 더 세련되게 처절한 쪽으로 그 미감이 변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화중선의 소리에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다. 그녀의 맑고 높고 둥근 비음은 자연스레 귀에 감겨들면서 부드럽고 은근한 인상을 남긴다.
 
김소희의 ‘추월만정’은 그보다 훨씬 서늘하고 비창하다. 이화중선의 소리가 안개 낀 듯 애수에 젖어 있는 분위기라면, 김소희의 소리는 가슴을 저며 내는 듯 날카로운 슬픔의 기운이 선연하게 살아 있다고 할까. 지적인 절제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소리는 준수하고 윤기가 흐른다.
 
어쩌면 그녀들의 소리는 그녀들의 삶을 닮기도 했다. -p.236>
 
삶의 교차는 작품의 교차로 설명된다. 여성예술가들의 삶을 그녀들의 예술과 결부시켜 논하고자 하는 저자의 결의가 작품 전체를 구성하는 핵심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기적 사실의 나열에서 그치지 않고 작품을 통해서 그들의 삶과 인연을 해석해 내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가 읽히는 글이기도 하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얽히고, 설킨 인연들 사이를 되짚어가다 보면 어느덧 그네들의 슬픔, 치열했던 삶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제3의 여성들이 존재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읽히는 감정들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다. 깊은 외로움을 읽어내는 저자의 섬세한 시각 때문이기도 하고, 그 외로움이 지난 시대를 살았던 여성예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깨달음 때문이기도 하다.
 
매체의 발달이 비단 문화의 빠른 파급력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다. 자서전을 통해서, 작품을 통해서, 신문기사를 통해서, 인터넷의 자기 고백을 통해서 여성들은 서로의 내면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친족관계를 벗어난 사적 교류의 통로가 막혀있던 지리한 시절을 넘어서서 이제야 우리는 동시대 혹은 이전 시대의 여성들의 내면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우리 모두가 같은 외로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발설하는데 이토록 많은 시간이 걸려야만 했던 셈이다. 아마 현대의 여성예술가들은 지난 시절의 선배들과는 달리 덜 외롭고, 덜 고독할 것이다. 그녀들은 선배들과는 달리 세상의 그 누군가는 자신의 작품을 오롯이 이해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선배들의 삶에서 보이는 물그림자는 그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슬픔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여성예술가들 사이의 영향 관계를 찾으려는 이 시도가 주목되는 점은 ‘그녀들이 시대를 홀로 살아갔던 것이 아니다’는 의의 때문이다. 많이 외로운 삶을 살아갔으나 누군가는 그녀의 삶을 응원하고, 지켜봐 주었을 거라는 전제 때문이다. 예술가는 홀로 성립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들의 작품을 봐주어야만 한다.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저자는 일관된 논지로 예술가들 사이에서 교차되었을 인연에 주목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뒤에 있었을 관객 혹은 독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여인의 초상화에 열광 뒤에는 이름 모를 수 많은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비록 남성적인 비평 언어로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들의 ‘인기’ 혹은 ‘유명세’는 이름 모를 시선들을 담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하여 책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제3의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황진이의 시조를 사랑해서 끝없이 읊조렸던 수 많은 기녀들과, 나혜석의 그림을 사랑하며 동경했던 신여성과, 이화중선의 노래를 인정했던 이름 모를 아낙네들까지. 이미 죽고 사라진 예술가들을 기리며 후대에 글을 쓰는 저자가 있고,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발자취를 더듬으며 아파하는 독자들이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슬픔은 끝없이 놀아지며, 인연은 변주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시공간을 뛰어 넘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네들의 삶을 되짚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 기나긴 흐름이, 당장 어떤 저항이나 도약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다] 이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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