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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광발전 와이너리” 라벨에 꽂히다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와인라벨이 말하는 것

 

 

와인 지역과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전통적인 구분으로 구세계 와인과 신세계 와인이 있다. 구세계는 유럽과 지중해 일대와 중동 지역을 말한다.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와인을 만들어왔고, 오랜 역사와 전통이 이어져 품질 관리를 위해 지역마다 포도 생산과 와인 제조에 관한 규정도 까다롭다.

 

이에 반해 신세계는 식민지 지배를 통해 와인이 전해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남아프리카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구세계의 토착품종과 오랜 기술을 갖고 새 땅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당연히 발전 방식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니 같은 품종으로 만들어도 스타일이 다른 와인이다. 신세계라는 이름답게 실험 정신이 강하고, 규정도 굵직굵직하게만 있어서 이런저런 시도를 과감히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성공과 실패 사례는 다시 구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구세계와 신세계라는 와인의 구분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그래도 무의미한 구분은 아니고, 와인의 종류와 역사를 설명할 때에는 여전히 유효하다.
 

새들에게 다 빼앗길 것 같아 한달 전 마당 포도를 다 땄다. 알이 잘아도 맛이 좋다. 과일 씨는 수박이든 포도든 참외든 다 씹어먹는데, 이 포도는 씨가 유난히 쓰다. © 여라 
 

와인라벨을 보면 유럽에서 생산된 와인이나 ‘유럽풍’ 와인은 기본 정보만 있다. 와이너리 이름, 생산 지역, 와이너리, 생산의 등급, 빈티지(이 와인을 만든 포도를 수확한 해), 와이너리 연락처와 알코올 함량 정도이다. 등급은 포도품종, 재배 조건, 제조 과정, 숙성 등 정해진 규정에 관한 정보를 포함한다. 세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거만하고 불친절하다. 와이너리나 등급의 내용을 모르면 그 라벨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은 숫자들뿐이다. 생산 년도, 알코올 농도, 그리고 가격.

 

그에 반해 미국이나 남미, 호주 와인은 때로 궁색하고 비굴해 보이기까지 하다. 특히 뒷면 라벨을 보면 와이너리의 역사, 철학, 그것도 어려우면 그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서사, 그것도 어려우면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쥐어짠 듯한 소설 한 대목이 적혀있곤 하다. ‘유럽풍’ 와인인 것처럼 그들이 쓰는 용어를 갖다 쓰기도 한다. 문제는, 유럽 와인은 그런 용어 하나도 규정에 맞춰 쓰는데 그런 규정이 없는 지역에서는 같은 단어라도 별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

 

새로운 물건을 받아 들면 사용설명서를 읽는 사람이 있고 그냥 버리는 사람이 있다. 나는 모든 매뉴얼을 꽤 열심히 읽는다. 인생 모토 중 하나는 ‘매뉴얼을 숙지하되 내 맘대로 산다’이다. 학교 다닐 때엔 교칙을, 사업체를 운영할 때엔 관련 법규를, 피고용인일 때는 고용인만큼 노동법을 알아야 한다. 말이 거창해졌는데, 쉽게 말하자면 야자 땡땡이를 칠 때 이게 어떤 손해와 벌칙을 감수하느냐의 문제다. 물건을 쓰다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경우엔 매뉴얼에 해결 방법이나 연락처가 적혀있다. 사태와 내 행동의 지도 같은 역할이랄까.

 

사실 매뉴얼은 그 제조회사에 대해 상당히 많은 것을 일러준다. 이케아 조립가구 조립매뉴얼에는 문자가 없이 그림뿐이다. 그런가 하면 어디의 매뉴얼은 소비자 입장에선 알 필요 없는 자기 자랑을 잔뜩 늘어놓는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써서 그렇다. 애플 제품은 컴퓨터고 스마트폰이고 매뉴얼이 없어 느낌적인 느낌으로 물건에 익숙해지도록 디자인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애플사이트에 있는 매뉴얼을 찾아내어 구석구석 쟁여 넣어둔 새로운 기능을 익힌다.

 

난 와인라벨도 열심히 구석구석 읽는다. 몇 해 전 캘리포니아 나파 지역의 와이너리 여행 중에 생긴 일이다. 여행 떠나기 한참 전부터 가고 싶은 와이너리들을 여행루트에 따라 줄 세워놓은 다음, 시간과 예산, 나의 관심도와 와이너리 종류에 따라 추리고 추려 좀 넉넉하게 리스트를 만들었다. 예약을 해야 하는 곳은 예약을 해서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그냥 오라고 하는 곳은 빈 시간에 끼워 넣었다. 막상 다니다 보면 의외로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되는 와이너리도 있고, 이동 시간이 예상과 다르다든지 하여 자투리 시간이 더러 생겼다.
 

▲ 와인 라벨. Solar Powered!(좌)  "자연발생한 아황산염 말고는 더 넣은 건 없다구. 난 유기농이야."(우)  © 여라 
 

이 와이너리도 그냥 하루를 마감하고 숙소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아까와서 근처에 열려있는 와이너리를 검색해서 가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 살 때 이 집 와인을 몇 번 마셔보긴 했지만, 와이너리까지 찾아갈 계기는 별로 없었던 터였다.

 

전에는 화이트와인을 주로 마셨는데, 이 날 테이스팅 해보니 레드와인도 꽤 괜찮았다. 뒷 라벨을 읽는데 다른 말들도 있었지만 “태양광발전 와이너리”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물어보니 우리가 있던 테이스팅 룸뿐 아니라, 사무실 냉난방, 와인생산 라인까지 모두, 전부 다, 태양광발전으로 만들어진 전력으로 충당한단다. 그린에너지 와이너리!

 

캘리포니아에선 비가 오는 겨울 두어 달을 제외하고는 햇볕이 쏟아진다. (근래 몇 해 동안은 비가 너무 안 와 큰일이다.) 태양광발전으로 만들어서 와이너리에서 쓰고도 남는 에너지는 다시 전력회사에 판매한단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아주 제한된 자연환경을 생각한다면, 태양광발전 와이너리라는 문구 하나는 소비자에게 상품의 가치를 크게 높인다.

 

와인라벨에 ‘아황산(SO2)을 첨가하지 않았다’는 문구도 꽤 매력 있어 보인다. 자연와인이 인기다. 그런데 아황산이 0%인 와인은 없다. 아황산은 발효 과정에서 와인에 자연적으로 생기는 물질이다. 그리고 효모의 활동을 제한하거나 완성된 와인을 보존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 밖에도 산화 방지, 박테리아의 활동 억제 등 오늘날 와인뿐 아니라 가공식품을 만드는 여러 과정에서 아황산은 아주 흔하게 쓰이는 식품첨가물이다.
 

▲ 내가 좋아하는 와이너리의 라벨. "내 주머니 속을 뒤져봐라, 먼지 하나 없다." ©여라 
 

1987년 이후 미국에서는 아황산이 1백만분의 10(10ppm, 발효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양)보다 더 많은 양이 잔류하면 그러하다고 와인라벨에 고지해야 한다. 미국에서 일반 와인은 350ppm까지가 허용치다. 유기농 인증 와인은 100ppm을 넘으면 안 되는데 실제로는 40-80ppm 정도라고 한다. 흔하게 쓰이고 극소량이라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아황산을 첨가하지 않았다는 매력적인 문구 때문에 소비자는 손을 뻗어 그 와인을 선택한다.

 

그런데 그 와인이 다른 와인보다 보관할 때나 다른 면에서 취약하다는 점 역시 알고 있어야 한다. ‘와인피플’에게 와인은 소중하니까. 과일도 채소 같은 거다. 마트에 있는 반질반질 흠 없는 똑같은 크기의 과일과 비교해서 주말농장에서 키운 벌레 먹은 푸성귀나 친구네 농장 울퉁불퉁한 과일 같다고 할까.

 

내가 좋아라 하는 어떤 와이너리는 ‘투명사회 만들기 운동본부’에서 만들어낸 것 같은 라벨을 붙인다. 무슨 무슨 품종의 포도를 어떤 비율로 썼고, 효모는 어떤 효모를 썼으며, 정제 과정에서 무엇을 썼고, 그 결과물로 이 병에 들은 와인에는 아황산염이 얼만큼 들어있다, 까지 자세히 적혀있다. 신뢰가 간다.

 

소비자가 과연 와인이 생산되는 방식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 지는 좀 의문이다. 워낙 거대한 와인시장과 산업화된 공급이 소비를 좌지우지하니 말이다. 그래도 자그마한 규모라도 의식적인 소비(라고 쓰고 ‘마신다’ 라고 읽는다)를 꾸준하게 하면 좋은 와인들이 살아남으리라는 소망이 있다. 이왕이면 가격도 착하게.  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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