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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혐오’를 걱정하는 당신에게

산소 같은 페미니즘, 반대편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필자 김홍미리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얼마 전 어떤 자리에서 대학 내 여성주의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들어보니 총여학생회 불용(不用)론은 예나 지금이나 학내에서 꽤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는 그 내용이 좀 달라져서 “총여학생회가 말하는 ‘여성’이 누구냐”, “투표를 왜 여학우들만 하느냐”라는 질문이 쏟아진다고 했다.

 

남/여라는 이분법적 젠더 분리를 당연시하고 ‘여성 문제’를 학내 복지 문제 정도로 치부했던 과거에 비한다면 ‘여성’의 범주를 묻는 이런 질문은 한참 진일보한 것이다. 누가 ‘여성’으로 인지되는가, 누가 여성으로 인지‘되어야만’ 하는가, 왜 특정한 몸은(몸만) ‘여성’인가 라는 건 페미니즘의 오래된 물음이다. 이런 질문이 흔해졌다는 건, 페미니즘 담론을 꾸준히 흐르게 한 사람들의 노고로도 읽힌다.

 

하지만 그 질문이 페미니즘을 반격하는 용도로 쓰이는 지금의 상황은 페미니즘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소비’되고 ‘활용’되는지 숙고해볼 것을 요한다. 누군가에게 페미니즘은 만만한 세발자전거인양 여겨진다. 재밌지만 유치하고, 흥미롭지만 어릴 적 한때일 뿐인 어떤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진단하기 쉽고, 나의 역사가 그것보다 무르익었다고 느낀다. 나보다 어린 페미니즘의 ‘곁에’ 서기가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 건가보다.

 

페미니즘에 대해 쉽게 말하고 거부하는 사람들

 

‘여성이란 누구인가?’라는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물음을 던지면서도 페미니즘과는 (절대로) 같은 방향에 서지 않으려는 이들을 흔히 접할 수 있다. 페미니즘과 더불어 이다음의 여정을 탐색해나가기보다 페미니즘의 반대편에서 스스로 페미니즘을 단죄할 수 있다고 믿는 섣부른 판단자들이 곳곳에 많다.

 

마치 페미니즘에는 역사가 없었던 것처럼, 역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전부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알더라도 그 역사를 본인이 기각해버릴 수 있는 것처럼 페미니즘에 대해 쉽게 말하고, 편하게 행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반대편’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은 어느 한 곳에 정박된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스며들어 ‘누구나의 평등’을 지향하는 실천이자 인식론이기 때문이다. 남/녀를 가르는 식의 언어가 사라지지 않는 한, 페미니즘은 불가촉하고 싶어도 불가촉할 수 없는 ‘산소 같은’ 것이다. 때문에 페미니즘의 곁에 서지 않겠다는 건, 이미 접촉되어 있는 것에 대한 능동적인 거부이자 적극적인 회피이다.

 

여성은 왜 인간이기에 앞서 ‘여자’로 호명될까. 특정한 ‘몸’은 왜 성폭력에 취약할까. ‘여’학교/‘여’교사/‘여’제자/‘여류’시인/‘여’기자들은 왜 ‘학교/교사/제자/시인’으로 적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이 오래된 질문을 애써 외면하면서 또 총여학생회에게(만), 페미니스트들에게(만) ‘여성’이 누구인지, ‘여성’이라는 범주가 왜 고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답하라고 요구한다.

 

이런 질문 공세가 하는 일은 ‘페미니즘’을 정박시키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만든 후, 질문자 본인이 ‘그 보다 앞선 것’이 되는 일이다. 오래된 질문을 회피한 채 ‘최신식(처럼 보이는)’ 질문을 퍼부어 대는 방식으로 홀로 우뚝 솟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미래란 지금보다 ‘앞선 것’일 수 없다.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삭제하고 오는 미래란, 과거의 반복일 뿐인 거다.

 

과거의 반복, 정희진의 표현대로 이것은 ‘낡은 새로움’일 수 있겠다. 약자는 언제나 답변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질문할 수 있는 언어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늘 질문당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답해도 정답으로 인정받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그것이 정답인지 아닌지 결정할 권한이 약자에게는 없다.

 

성폭력 피해는 생애 과정에서 맥락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고, 때문에 피해 경험이 똑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수십 년째 해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성폭력이 무엇인지, 피해 경험이 왜 다른지’를 매번 새로운 것처럼 묻는다. 매번 물으니 매번 답할 수밖에 없고, 매번 그 답은 같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그 답은 매번 오답으로 처리된다.

 

‘오빠가 허락한 성폭력’(오빠들의 성적유희, 성희롱, 데이트 폭력)이 성폭력으로 승인되기 여전히 어려운 건, 피해자들이 덜 말하거나 더 작은 소리로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빠들의 성적유희 정도는 언니들이 감내해줄 것이라 믿(고싶)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상황에서 성적유희를 ‘받아주는’ 건 보살핌의 영역이라 여겨진다. (‘어떻게 이런 친밀감의 표현이 성폭력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보라.)

 

매번 말해도 매번 기각당하는 자리, 보편적 경험(인간)이 아니라고 구분되는 자리, 그래서 편협하고 ‘중립적’이지 않다고 진단되는 ‘그 자리’에 ‘여성’이 산다. ‘너희들이 말하는 여성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자리에 사는 이가 ‘여성’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질문하는 이들에게서마저 ‘너희’라는 타자로 호명되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네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게 불편하다?

 

최근 성인남성잡지 MAXIM 코리아 9월호 표지가 논란이 됐다. 맥심 편집장은 “흉악범죄를 영화적으로 연출한건 맞지만 성범죄적 요소는 화보 어디에도 없다”고 해명하며 “범죄의 한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봐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요청에도 불구하고 트렁크 밖으로 결박된 채 두 다리만 내놓은 여자-몸에 감정이입 되는 이들에게 그건 그저 ‘보기만’ 할 수 있는 것이 되기 어렵다.

 

맥심측은 성범죄적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지만, 특정 성별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설정 사진에서 성범죄 요소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되물어야 한다. 트렁크에 갇힌 사람이 ‘여성’으로 특정되고, 트렁크 문을 잡고 서서 담배를 문 사람이 ‘남자’인 이 사진이 성적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대체 무엇인가 말이다.

 

표지 상단에 적힌 “여자들이 ‘나쁜 남자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진짜 나쁜 남자는 바로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라는 문구는 나쁜 남자와 그를 쫒는 (무개념) 여자들의 최후를 보여주는 표지 사진과 합체됐다. ‘그러다간 이렇게 되는 수가 있어’라는 여자들을 향한 오래된 비아냥과 충고. 그 메시지는 그냥 편하게 봐지지도 않지만, 또 참고 보기만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너무 오랫동안 들어온 말이라서 익숙하고 심지어 안정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옳거나 지향되어야할 가치는 아니다. 성적인 의도나 여성 비하 의도가 없다는 한마디 말로 없던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건, 이 논란 중에 접하게 된 ‘프로불편러’라는 단어다. 맥심 표지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을 ‘프로불편러’라 칭하며 비아냥대는 글이 온라인에 꾸준했다. 문제를 일으킨 건 맥심이 아니라 맥심 표지모델을 거부한 정두리가 됐고, 그의 불편감에 동의하는 이들은 ‘프로불편러’로 호명됐다. 불편감의 기원을 궁금해 하고 말을 걸어 이유를 듣기보다 ‘불편하다고 말하는 게 불편하다’고 선수 친다. 그 불편함은 네가 예민한 탓임을 강조한다. 세계는 원래 그러했는데 이제야 문제 삼는 것은 이상한 심보라고 진단하고야 만다.

 

손발이 묶인 채 트렁크 밖에 다리를 내놓은 여자가 될 수 ‘없는’ 이들은 아마도 이 사진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맥심 9월호의 표지와 ‘귀여운 강아지 새끼’ 사진 한 장을 같은 선상에 두고 취급할 수도 있는 것이라 이해도 해 본다. 그럴 수 있는 그들의 둔감함과 편협함이 안타깝지만 ‘무지의 베일’에 휘둘리는 이들을 막을 묘수가 없다.

 

▲  맥심 표지의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은 ‘프로불편러’라 호명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쿨하지 못해 미안해

 

나또한 맥심 표지와 귀여운 강아지 새끼 사진을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싶다. 나도 온갖 유머와 드립 앞에 쿨해지고 싶다.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굴고 싶지 않고 주변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사소한 차별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뻔뻔해지고 있어서 더는 쿨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주변인들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화장실 몰카(찍기+보기) 정도는 스스로 부끄러워 그만둘 것이라 여기며 대꾸하지 않았던 방심이 회원 수 100만 명이 넘는 몰카천국 소라넷을 키어왔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너무 흔한 나머지 상품 가치가 떨어져 수영장 몰카 하나에 160원에 거래되는 상황은 여자-몸이 팔려 다니는 ‘사소한’ 일상의 단면이다.

 

그럼에도 불편함을 드러내는 일이 불편한 사람들은 마치 젠더화된 권력이 현실 세계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 한다. 차별은 옛날 일이고 평등은 이미 와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한다.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집행하는 주무 부서인 고용노동부가 “(면접관이 성희롱성 질문을 하면) 농담으로 잘 받아칠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다”는 면접모범답안을 내놓은 것도, 지난 8월 12일 울산 물총축제 공식 홍보물의 메인 카피가 “누나나랑 한번박자 살살할게”였던 것도, 여성들이 이제는 그럴 정도의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잠재적 판단을 배경으로 한다.

 

맥심 표지 논란과 프로불편러라는 단어의 등장에도 평등이 이미 도래했다는 잘못된 신념이 작동한다. 평등이 ‘이미’ 도래했다고 믿어지는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이런 드립을 죄책감 없이 칠 수 있는 남성 집단이고, 점점 미안해야할 집단은 쿨할 수 없어서 쿨하지 못한 이들이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오랫동안 말해왔지만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제자리다. 그 많은 논의를 삭제하고서, 그들이 들은 이야기는 맥락을 삭제하고 남은 몇 단어뿐인 것 같다. ‘너희들도 성적 자기결정권 있다며?’라거나 ‘약자 아니라며?’라는 질문은 그래서 “불편하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그것이 여성들에게 있다고 여겨질 때, (어떤) 남성의 죄책감을 더는 일에 편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수용된다. 그래서 그 권리는 궁극적으로 가져야할 지향점이 아니라 마치 이미 누구에게나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는데 왜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피해자에 대한 비난은 죄책감을 덜어낸 남성들이 꺼내드는 히든카드다. 성폭력에 대한 모든 여성주의 논의들을 임의적으로 기각하고 필요한 단어만 편의적으로 탈취한 후, 다시 페미니즘에게 성폭력이 무엇인가를 묻는 이들에게 또 무엇을 답해야만 할까.

 

여혐은 별 문제 아니고, 메갈리안은 문제인 사회

 

이분법적 젠더 질서는 사그라들기는커녕 여전히 살아서 날뛰고 있다. 오래된 ‘농담’인 여성혐오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오래된 농담을 거부하는 메갈리안은 이 사회에서 ‘문제적’이다. 여혐(여성혐오)을 쏟아내는 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는 ‘좋아요’ 회원이 16만 명(159,286)에 육박하고, 여혐을 반대하며 만들어졌으나 세 번의 폐쇄조치를 당한 끝에 살아남은 <메갈리아4> 페이지의 ‘좋아요’ 회원은 1만 명(9,969명)이 채 안 된다. 1만이 채 안 되는 이들에게로 혐오의 시대에 대한 우려가 집중되고 있다.

 

▲ 8월 4일 방영된 MBC <PD수첩> "2030 남성보고서 - 그 남자, 왜 여자에게 등을 돌렸는가" 편.

 

8월 4일에 방영된 MBC <PD수첩> "2030 남성보고서 - 그 남자, 왜 여자에게 등을 돌렸는가" 편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여혐이 된 너희들을 이해한다’는 언설에서, 이해받는 대상은 군대, 연애, 결혼의 무게에 짓눌린 이 시대의 남성들이었다. 이들은 십수 년 간 혐오를 쏟아낸 주범이기보다는 이해받아야할 불쌍한 시대의 자화상들이다. 이때 이들을 이해해줘야 할 사람은 그 군대, 연애, 결혼의 무게에서 비껴나 편히 산다고 추측되는 사람들이다. 그걸 이해해주지 못하고 적대로 응하는 메갈리안 같은 이들은 세계를 분열시키고 혐오를 생산하는 불온한 세력으로 상정된다.

 

결국 또다시 남녀를 두 개로 가르고, 그중에서 여자를 ‘종특’시키는 데 주력해온 지난 시간들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조금 커진 목소리가 문제로 부각된다.

 

메갈리안의 미러링(거울처럼 상대방의 언행을 따라하여 타산지석으로 삼도록 비추어 보여주는 것)은 혐오일까. 나에게 메갈리안의 활동은 ‘남혐’도 ‘여혐혐’도 아니고, 혐오에 맞서는 분노이자 분노가 만드는 저항으로 읽힌다. 몰래카메라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리는 일, 게임회사의 성차별 캐릭터를 바꿔내는 일은 ‘혐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메갈리안이 만드는 변화를 ‘혐오 조장’의 혐의를 씌워 애써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길게 보고 싶지 않다. 이런 모습은 페미니스트들이 해온 일들을 사소화해 온 역사와 다르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메갈리안과 같은 방향에 서보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적대로 마주하기보다 같은 방향에 서서 이다음의 세계를 찾아가는 의롭고 이로운 방법을 함께 찾아가면 어떨까 한다.  김홍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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