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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으면서도, 애인과 헤어지지 못한 이유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3. 폭력의 속성

 

※ 일다의 신간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발간 기념으로, 데이트 폭력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때리는 애인, 왜 떠나지 못할까?

 

“당시에는 맞지 않는 것보다 제가 그를 잃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만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제가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진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저는 그가 바뀔 수 있다고 믿었고, 그는 ‘때린다는 것만 제외하면 꽤나 괜찮은 연인’이었습니다.”

 

얼마 전 ‘진보논객’으로 알려진 한모씨로부터 데이트 폭력을 겪었다는 사실을 공론화한 피해여성의 말이다. 그녀는 자신은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드센 여성으로 분류되는데도” 데이트 폭력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이런 여자도 데이트 폭력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  데이트 관계에서 생기는 다양한 갈등 상황을 보여준 한국여성민우회 회원들의 단막극 ‘명품연애센-타’ ⓒ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제공  


한국여성의전화의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에 입소한 피해여성 중 22.8%는 ‘결혼 전부터 폭력이 있었다’고 보고했다(2006~2007년 면접상담 통계). 많은 여성들이 연인의 폭력성을 알면서도 결혼을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또한 데이트 폭력 피해자의 40퍼센트가 폭력을 겪으면서도 관계를 지속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Rosen, K.H. & Bezold, A. 1996*)

 

데이트 폭력이 지속되는데도 여성이 상대 남성과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성에게 의존적이거나 순종적인 여성뿐만 아니라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여성들조차 왜 쉽사리 폭력의 고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속성

 

“친구한테 ‘술 먹으면 난폭해지는 남자친구’ 얘길 들으면 ‘아유, 내 친구지만 정말 바보 같다, 어떻게 그런 애를 만나나’ 싶었어요. 그런데 정작 내가 그 상황에 있으면 나는 그렇지 못한 거예요. 이 사람이랑 친밀한 관계고 긍정적인 마음이 클 때는 이 사람이 하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내가 합리화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용한다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 나를 조종한다는 걸 믿고 싶지가 않으니까. 그 사람 탓이 아니라 이런 기분을 느끼는 내 탓을 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한 거예요.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하면 너무 괴롭거든요.”

 

애인에게 지속적으로 금품 갈취를 당한 경험이 있는 다정(가명, 여성, 26살)씨는 사귈 당시 사랑하는 사람을 가해자로,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다.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나를 때리거나 내 돈을 뺏는다면, 누구든 그걸 폭력이나 갈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 일상적인 관계에서 폭력이 발생하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사랑은 사랑, 폭력은 폭력으로 딱 구분되지 않고 사랑과 폭력이 뒤섞여 버리는 것.

 

데이트 폭력 가해자의 특성을 보면 폭력을 행사하고 난 뒤 ‘진심으로’ 사과를 하거나, 울면서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하거나, 몇 배로 더 잘해주거나, 집 앞에 와서 계속 기다리는 등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폭력의 피해자들은 단호하게 행동하기 어렵다.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가해자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통하면 가해자는 계속 ‘폭력-폭력 후 용서 구하기’로 패턴을 반복하며 관계를 통제해간다.

 

‘관계를 버리기보단 회복하려고 노력하게 되죠’

  

▲  중앙대학교 성평등위원회가 만든 에코백 ⓒ중앙대학교 성평등위원회 씨:리얼(SEE:REAL) 제공 
 

데이트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가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해자는 폭력적인 행동만 빼고는 사회적 평판도 좋고 외모, 학벌, 인간관계 등 여러 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 ‘멀쩡한 사람’, ‘괜찮은 사람’인 경우가 많다. 피해자에게 잘해 줄 때도 많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은 ‘내가 그 상황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문제 해결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며 ‘좋은 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하게 된다.

 

트라우마 치유센터 ‘사람.마음’의 최현정 대표는 “애착이 이미 형성돼 있는 상태에서는 폭력이 일어나도 그 관계를 쉽게 포기하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지키려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설명한다. 특히나 정서적으로나 성적으로 친밀감이 두터운 연인 관계라면, 폭력이 있다고 해서 바로 그 관계를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애착을 회복하기 위해 관계에 헌신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

 

“‘이건 진짜 아니다,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어차피 이 사람이랑 사귈 거잖아요. 그래서 (폭력적인 행동에도) 그냥 넘어가게 되고 스스로 자꾸 이유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점에서 잘못했거나 뭔가 (그 사람의) 마음에 안 들었겠다’, ‘이 사람은 이런 배경에서 자랐으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내가 어떻게 맞춰야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하면서 계속 참는 거죠. 진짜 큰 일이 나지 않는 이상, 헤어질 게 아니면 계속 참게 되는 것 같아요.” -남자친구로부터 지속적으로 폭언과 성희롱을 당했던 세진씨(가명, 25살, 여성)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의 폭력을 ‘자기 잘못’으로 돌리는 건, 피해자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친밀한 관계에서 휘두르는 폭력의 속성 때문이다. 애초부터 여성이 원인 제공을 해서 맞은 게 아니기 때문에, 가해자의 폭력을 멈출 수 있는 건 피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그 사실을 깨닫는 건 한참 후의 일이다.

 

“가해자들은 ‘너 때문에 우리 관계가 이렇게 됐다’면서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피해자가 자책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는 여성들은 포기하기 보다는 그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하죠. 가해 남성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고 가해 남성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해요. 그 여성이 자존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자존감이 달려있기 때문에 혼자 감당하며 노력하는 것이죠.” (최현정/ 사람.마음 대표)

 

보복이 두려워 헤어지지 못하기도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상대방과 헤어지려고 마음을 먹고서 실행에 옮기는 일도 쉽지 않다. 상대가 “헤어질 수 없다”면서 직장으로 찾아오거나, 부모님에게 성관계 사실을 알리겠다고 하거나, 나체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하거나, 심지어 가족에게 해코지하겠다고 하는 등 집요하게 협박해오는 경우가 그러하다.

 

승미(가명, 23살, 여성)씨의 전 남자친구도 그랬다. 남자친구는 사귀는 동안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하고 음담패설을 하도록 요구했다. “내 취향을 존중해라”, “여자인 너도 즐겨야 한다”면서 포르노에 나오는 체위나 피학-가학적인 성행위를 끊임없이 주문했다. 견디다 못한 승미씨가 헤어지자고 말했지만, 남자친구는 “널 너무 사랑해서 헤어질 수 없다”며 함께 나체로 찍은 사진을 공개하겠다고 협박했다. 승미씨는 사진이 공개된 후에 일어날 일들이 너무 두려워서, 헤어지자고 말한 이후로도 1년을 더 만나야 했다.

 

“사람들은 이 공포를 몰라요. 친구들이 나중에 ‘진작 말하지, 뭐가 그렇게 무서웠느냐’ 그러는데... 그 사람이 제 개인 정보나 사생활, 약점이 뭔지도 훤히 다 파악하고 있는 거잖아요. 걔는 제가 뭐에 약한지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제가 그 사람 성향을 아니까 ‘(사진을) 뿌리겠다’는 게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거죠.”

 

상대방의 폭력적인 행동을 직접 눈으로 봐 온 피해자들은 ‘보복’을 두려워한다. 단순히 말로 하는 위협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와 두려움에 피해자는 가해자와 헤어지지 못하고, 악순환은 반복된다.  

▲  “고립되기 쉽다”는 것이 데이트 폭력이 가진 가장 큰 위험성이다.   © Ljupco  


사생활 노출에 타격…‘고립되기 쉽다’

 

전문가들은 “고립되기 쉽다”는 것이 데이트 폭력이 가진 가장 큰 위험성이며, 피해자가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말한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한테 당한 폭력은 주변에 얘기하기 쉽지만, 데이트 폭력은 주변에 얘기를 못하다 보니 고립되기 쉽다는 것.

 

피해자가 주변에 말 못하는 이유는 데이트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사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우리는 데이트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흔히 연인간의 사랑싸움, 변덕으로 치부하거나, 여성에게 “그러니까 왜 그런 놈을 만났느냐”, “그런 놈을 만나는 여자도 문제다”, “결혼한 것도 아닌데 헤어지면 되지”라고 쉽게 말한다.

 

피해자 또한 이 문제를 사적인 문제로 보기 때문에 주변인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보다 둘 간의 관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데이트 관계는 그 특성상 서로간의 비밀이나 은밀한 부분까지 공유하기 마련이다. 폭력과 사생활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데이트 관계에서 가해자의 폭력을 드러낸다는 것은 피해자 자신의 ‘사생활’까지 함께 드러낸다는 것을 뜻한다.

 

더군다나 승미씨처럼 가해자의 폭력이 성행위와 결부되어 있을 때는 사생활이 드러났을 때 더 타격을 입는 쪽이 여성이다.

 

“사진이 돌거나 소문이 나면 얼굴 못 들고 다닐 것 같은 거예요. 사생활이잖아요. 누구한테 말하기도 민망한 사생활이라서 말도 못했어요. 전남친랑 같은 학교, 같은 과여서 인간관계가 다 얽혀 있었어요. 전남친은 과대표 출신이고 사람들이 다 신뢰한단 말이에요. 소문나면 나만 과에서 혼자 떨어져 나와야 될 것 같아서 두렵더라고요. 제가 쌓아온 인간관계가 통째로 없어지는 거잖아요.” (승미씨)

 

사람들은 데이트 폭력을 당한 피해여성이 애초에 그 남자와의 관계를 선택했기 때문에 관계를 끝내는 것도 오롯이 여성의 선택으로 여긴다. 피해자가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관계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나 관계 안에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지속적인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건 이미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을 벗어나게 된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는 관계를 선택한 것이지 폭력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런 놈이랑 사귄 여자도 문제다”라며 피해자도 같이 비난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데이트 폭력은 더욱 은폐되기 쉽다. 데이트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첫 걸음은 ‘피해자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나랑 기자 

 

*Rosen, K.H.& Bezold, A. 1996, Dating violence prevention: A didactic support group for youn woman. Journal of Counseling and Development Psychologt, 74, 521-525 (이정은, “폭력적 데이트 관계 지속에 관한 투자모델의 타당성 연구”, 2007,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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