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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도 공범” 기지촌의 진실 밝혀야
두레방 유영님 원장에게 듣는 미군 ‘위안부’ 소송 

 

 

작년 6월 25일, 122명의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이 기지촌을 형성, 관리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한 지 1년이 지났다. 이달 24일 4차 변론을 앞두고 있다.

 

주한미군 기지의 반환과 기지 이전 등으로 점점 규모가 줄어가고 있는 기지촌. 의정부 고산동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 스탠리’ 근처에 위치한 두레방(My Sister’s Place)에서 유영님 원장을 만나, 이번 소송의 의미와 전망에 대해 들어봤다. 두레방은 1986년 설립돼 기지촌 성산업에 유입된 여성들을 지원해오고 있으며, 성착취 인신매매를 근절하고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펴오고 있다.

 

-미군부대 근처에 기지촌이 형성된 지 50-60년이 지났고 두레방이 활동을 시작한 지 내년이면 30년이 되는 것으로 안다. 지금의 시기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  두레방 유영님 원장    © 일다 
 

오래 전부터 소송을 하려는 마음은 먹고 있었다. 다만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은 버거운 과제라 같이 해줄 협력자들이 필요했다. ‘기지촌 문제가 공익 소송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움을 줄 변호사와 학자, 양심 있는 지식인 그룹들이 필요하다고 봤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변론을 맡아줬고 학자들도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모아내는 데 거의 십 년이 걸렸다. 뭐 십 년씩이나 걸렸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송을 처음 생각했던 2000년대 초반엔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 여성에 대한 낙인이 워낙 심했다.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성매매 여성을 위한 운동까지 포함하기 어려웠다. 당시 우리의 활동은 고립되고 소외된 활동이었다.

 

-소송에서 ‘기지촌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위안부’라고 하면 사람들은 일본군 ‘위안부’를 떠올린다. 그래서 ‘위안부’라는 용어를 정치적으로 쓰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는 것 같다.

 

기지촌 여성들 얘기를 들어보면 1970년대까지 기지촌 여성에 대해서 ‘위안부’라는 표현을 썼다.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는 표현은 굉장히 많다. 위안부, 매춘여성, 매음녀, 윤락녀, 직업여성….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우호적이고 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너네 얹혀가는 거 아니냐”, “감히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냐”며 거부감도 보인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든 미군 ‘위안부’든 맥락은 같다. 용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핵심은 ‘군대가 성매매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미군을 포함해서 모든 군대가 여성들의 ‘위안’을 요구한다는 것. 군대가 작동하는 기제로써 “군인들의 성욕이 해소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기 때문에, 미군이건 일본군이건 한국군이건 (한국전쟁 당시 정부는 직접 한국군 부대 내 위안소를 설치했다) 그런 시스템을 두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와 기지촌 ‘위안부’를 다르게 보는 시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본질을 벗어난 주제에 막혀 소모전을 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를 다르게 보는 시각의 저변에는 성매매에 관한 편견이 깔려있다.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한 여성과 강요된 성매매를 한 여성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정서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여성들이 그 일이 좋아서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 자원이 진짜 없고 몸을 사용해 생존할 수밖에 없는 벼랑 끝에 있는 여성들이 성매매를 택했다. 만약 자발적으로 유입됐으면 자발적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성산업의 착취 구조, 사회적 낙인,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자발적으로 못 나간다.

 

▲ 캠프 스탠리는 1950년대 미군이 주둔하면서 만들어진 기지촌이다. 2016년 캠프 스탠리 반환을 앞두고 많은 클럽들이 문을 닫은 상태다. © 일다 
 

이곳 캠프 스탠리도 1950년대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만들어진 기지촌인데, 초기에는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분들이나 가난한 여성들이 들어왔을 것이다. 또 성착취 목적의 인신매매를 통해 업주한테 팔려서 들어온 여성들도 많다. 1970년대에는 공장노동을 거쳐 온 여성들이 많다. 대부분 저학력, 빈곤 계층,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피해여성이 많이 유입됐다.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가 주권을 잃은 상태에서 대규모 동원된 것이고, 기지촌은 한국 정부가 존재했지만 그 구조상으로는 다르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도 ‘기지촌여성인권연대’에 소속돼 같이 활동하고 있다. 이 운동과 그 운동이 다른 게 아니라, 똑같이 ‘군사화된 성매매’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운동이라고 본다.

 

-국가가 기지촌을 형성하고 관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원고 측의 근거 자료는 무엇인가.

 

미군 ‘위안부’ 122명의 증언, 그리고 1971년부터 1974년까지 SOFA(재한미군 관할권에 관한 한미행정협정) 한미합동위원회 회의록 영문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또 학자들이 당시 보건사회부 등의 간접적인 자료(성병 감염률 통계 등)를 확보해 놓았다. 아마 한국 정부도 자료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찾기는 어렵고 재판부의 요청에 의해 찾아야 되는데, 2차 변론 때 우리 측 변호사가 관계 자료를 요청했지만 정부에서는 주지 않고 있다. 공방이 계속될 것 같다.

 

영문 자료를 보니 한미합동위원회 소속의 민군(民軍)임시분과위원회에서 기지촌 성매매 문제에 대해 계속 회의를 했다. 외무부, 국방부, 문화관광부, 내무부와 지역의 담당 공무원들이 미군 측하고 지속적으로 협의했다. 당시 정부가 기지촌 정화운동을 벌이면서 기지촌 여성에 대한 성병 관리를 좀더 체계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각 기지촌마다 성병 진료를 위한 보건소도 추가로 지었다. 한국 정부의 노력과 미국 정부의 요청이 맞물려서 기지촌이 견고하게 형성된 것이다.

 

-2003년에 MBC에서 방영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섹스동맹 –기지촌 정화운동’ 편을 보면 당시 민군관계소위원회 위원장 등이 나와서 국가가 기지촌에 어떻게 개입했는지 증언한다. 이 사람들을 증인 신청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당시 엄청나게 많은 공무원들이 개입했다. 국가 공무원이 “내가 참여했소”, 아니면 의사가 “내가 진료했소”라고 증언해주면 최상일 것이다. 그 증언을 어떻게 끌어내느냐가 과제다. 2003년이면 노무현 정부 때인데, 그때 증언을 한 사람들이 지금 이런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증언을 해줄 지는 모르겠다.

 

-기지촌 여성들은 국가의 개입 중에서도 특히 강제 성병 검사와 성병 치료에 대해 분노가 크다고 하던데…

 

앞으로 재판에서 밝혀지겠지만, 여성들 몸은 자기 몸이 아니었다. 영문 자료에 의하면 한미 양측에서 성병 감염률을 낮추기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거기에 여성들의 인권에 대한 의식은 전혀 없었다.

 

지금도 기지촌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성병 진료를 받는다. 몇 십 년 동안 지속돼온 거다. 그런데 재판에서 국가의 책임을 입증하려면 육하원칙에 의해 증거를 대야 되는데, 오래된 일이라서 기지촌 여성들이 날짜를 특정하기 어렵다. 아마 보건소 기록에는 다 남아있을 텐데, 정부가 내놓지 않고 있다.

 

-미군에 의한 범죄 피해도 많지 않았나.

  

▲  기지촌의 야경.   © 두레방 
 

살인 사건도 상당히 있었던 게 사실이다. (진실이) 묻힌 살인도 많다. 故 윤금이 씨 살해 사건(1992년)처럼 전 국민이 공노할 사건이 아닌, 그 밑의 수위의 폭력 사건들이 엄청나게 많았지만, 수사권과 기소권이 미군 측에 있어서 미군범죄수사대에서 사건을 수사하게 되어있다 보니 묻힌 게 많다.

 

성폭력, 가정폭력(미군과 결혼했거나 동거한 경우), 자녀 방임 등의 피해도 엄청나게 많다. 둘 사이에 애를 낳았는데도 내 자식 아니라고 하거나, 양육비를 전혀 안 주고. 미국에 본처가 있는데도 현지처처럼 동거하다 출국할 때 버리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폭행은 비일비재했다. 신체적 폭력만 아니라 정서적 폭력, 생활비를 안 주는 것 등. 그런 것까지 포함하면 어마어마하다. 지금은 필리핀 여성들이 예전에 한국여성들이 했던 역할을 하는 거다.

 

-소송에 참여한 기지촌 여성들 중에 두 분이 돌아가셨다. 다른 분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계신지?

 

의정부, 동두천, 평택, 파주 등 주로 경기도 기지촌 여성들이 80~90퍼센트다. 50대 후반도 있지만 대부분 60대나 70대의 연령층이고, 절대빈곤 계층이다. 가족 관계는 이미 단절된 지 오래됐고,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국가의 절대적인 지원책이 필요하다. 기초생활수급자여서 40만원 내외를 받는데 월세 10~20만원 내면 실제 생활비로 쓸 돈은 20만원 내외다.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다.

 

-지금도 기지촌 운영에 정부가 개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지금은 기지촌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 대부분 외국인 이주여성들이다. 1994년부터 외국인 이주여성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20년이 흘렀다. 이들은 엔터테이너 비자 ‘E-6’로 들어오는데, 한국 정부가 비자를 내줘야 들어올 수 있으니 국가가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이 사람들은 가수인데 실제로 가수 역할을 하는지, 성매매를 하는지, 국가가 전혀 관리 감독하지 않는다.

 

2000년대에는 성매매를 하는 이주여성이 8천 명이나 있었고, 두레방을 포함해 여성단체들이 문제제기를 많이 했다. 지금은 비자 시스템이 바뀌면서 러시아권 여성들은 비자가 중단됐고, 그 수가 2천~3천으로 줄었다.

 

기지촌 전체 규모가 상당히 줄었다. 주한미군 측에서도 2000년대 초반에 미군들이 성매매, 인신매매에 개입돼있다는 게 언론에 보도되면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됐다. 거기에 2004년 한국에서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면서, 미군 측도 무관용 정책(Zero Tolerance Policy. 어떤 사유도 참작하지 않고 원칙대로 처벌하는 정책)을 부각시켰다.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겹쳐서(두레방이 있는 캠프 스탠리도 평택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기지촌 성산업이 많이 축소됐다. 이런 상황에서는 드러내놓고 성매매를 하면 처벌받으니까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다.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의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 건 세계 최초라고 들었다. 이번 소송이 국제사회에서 갖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  캠프 스탠리의 한 클럽.   © 일다 
 

필리핀, 일본의 오키나와 등 동아시아에서 미군이 주둔했던 지역의 여성들이 입은 피해는 심각하다. 원치 않았는데 미국령이 된 국가들, 푸에르토리코, 괌, 하와이 등도 피해가 있다. 미군 당국이 잘 인식을 못하거나, 알면서도 눈감는 영역이다. 이런 소송을 통해서 미군이 전 세계에 주둔을 하면서 어떤 비리와 잘못을 저질렀는지 미국 본토가 반드시 인식해야 한다.

 

또한 피해 입은 여성들에게 적절한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한다. 미군과 주둔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문제도 관심을 갖고 해결해야 한다. 미군이 주둔했던 곳과 미국령인 국가의 여성 활동가들이 모여 ‘Women for Genuine Security’(진정한 안보를 위한 여성들)라는 국제네트워크를 만들어 교류하고 있다. 이 여성들과 연대해 나갈 것이다.

 

-이번 소송을 통해서 한국사회에 어떤 화두를 던지고 싶은가.

 

기지촌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 청산의 문제다. 우리가 잘못했던 행위를 바로잡고 더 이상 반복하지 않기를 원해서 하는 게 과거사 청산이다. 다른 많은 영역에서는 과거사 청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지촌 성매매 쪽은 공론화되기 어려운 주제였고, 피해자들이 스스로 증언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보니 상당히 늦어졌다.

 

과연 누가 누구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하나. 개인의 안전 없이 어떻게 국가의 안보가 가능할 수 있나. 이 나라의 안보가 가장 취약한 여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건, 굉장히 비도덕적인 역사이다. 이 사실을 드러내고 반성하자는 게 소송의 목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진실을 밝히고, 그 진실을 통해서 반성할 게 무엇인지 공유하고 인식해야 한다. 국가나 관공서, 개인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으면 거기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사과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기지촌을 거쳐 간 여성들이 3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 30만 명의 가족까지 치면 관계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내가 기지촌 여성 자식을 두었소”, “우리 엄마가 기지촌 여성이었소”,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이건 개인의 부끄러운 치부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반성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침묵도 공범이라고 하지 않나. 이번 소송이 이 문제를 드러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기지촌 여성들에게는 치유의 과정이 되길 바란다.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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