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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성폭력,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1. 지혜씨 이야기
※ 일다의 신간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발간 기념으로, 데이트 폭력 문제를 심층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데이트 성폭력은 왜 일어날까?
대학 졸업반인 지혜씨(가명, 24세, 여성)에게는 썸남이 있다. 같은 대학 공대에 다니는 선배. 소개팅 주선자였던 같은 과 언니는 자기가 보증할 테니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ROTC(학군사관 후보생)인 그 선배는 옷도 잘 입고 차도 있고 능력 있어 보였다. 데이트 비용도 지혜씨 모르게 늘 먼저 지불하고, 매번 집 앞까지 지혜씨를 바래다주었다. 지난주에는 집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밤늦게 문자가 와서 만나러 나가기도 했다.
지혜씨는 조금 부담스러우면서도 공주 대접을 받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았다. 박력 있고 ‘남자다운’ 매력이 마음에 들었다. 가끔 운전할 때 다른 차가 끼어들면 심한 욕을 하긴 했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싶었다. 네 번째 데이트가 있던 날, 고백을 받으면 수락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약속 장소에 나간 지혜씨.
가볍게 맥주 한 잔 하고 심야영화를 보고 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집에 데려다 주는 길에 선배는 한적한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기습 키스를 했다.
키스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선배가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당황한 지혜씨는 선배의 손을 뿌리쳤다. 나름 거부 의사를 밝혔다고 생각했지만 선배는 멈추지 않았다. 선배를 설득해야겠다고 생각한 지혜씨는 선배를 밀치면서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배는 “그러면 왜 지금 이 시간까지 나랑 같이 있었냐”고 화를 냈다.
지혜씨가 머뭇거리자 선배는 다시 애무를 시작하더니 급기야 바지를 벗기고 삽입까지 시도했다. 지혜씨는 선배를 계속 밀쳐내면서 버텼지만 선배의 힘과 위에서 누르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성관계까지 하고 난 뒤 선배는 지혜씨를 집까지 데려다 줬다. 집에 오면서 지혜씨는 계속 울었고 선배는 “내가 너무 거칠었지? 미안해”라는 말만 반복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 선배는 지혜씨를 꽉 안았다.
집에 돌아온 지혜씨는 그 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왜 늦은 시간까지 같이 있었을까, 왜 더 확실하게 거부하지 못했을까’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당시에 그 선배를 때리고 급소를 발로 찬다거나, 차 문을 열고 도망가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낯선 동네인데다 깜깜한 밤에 씽씽 달리는 차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었는데 그렇게 하면 잘 되고 있는 관계를 망칠 것 같았다.
선배는 문자로 “이제 우리 사귀는 거지?”라며 아무렇지 않게 언제 만날 수 있는지 물어왔다. 지혜씨는 ‘내가 너무 까칠한 걸까? 다시 만나자고 한 걸 보면 날 진짜 좋아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도 찝찝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지혜씨는 학교 안에 있는 성평등상담실에 전화를 걸었다.
상담선생님은 지혜씨가 겪은 일이 ‘데이트 성폭력’이라고 말했다. “저도 선배를 좋아했는데요? 선배가 절 때리거나 흉기로 위협한 게 아닌데 성폭력이 맞나요?” 상담 선생님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행위라도 상대가 원치 않는 성행위를 강요한 건 성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혜씨에게 그 오빠가 ‘남자다워서 좋다’고 한 바로 그 점에 대해서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지혜씨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집 앞에서 기다리거나 기습키스를 하는 행위가 ‘남자다워’ 보이지만 그런 일방적인 행동이 폭력일 수 있다고. 지혜씨는 상담 선생님에게 물었다.
“저 같은 사람이 많나요?”
▲ 많은 남성들이 여성이 확실하게 의사 표현하거나 저항하면 성폭력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남성들은 데이트에서 ‘이기도록’ 학습된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 2009년 서울지역 11개 대학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데이트 경험이 있는 370명의 여학생 중 38.1%가 데이트 성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10명 중 4명꼴이다. 15.6%의 여학생이 ‘내가 원하지 않는데 가슴과 성기 등을 만진 적이 있다’고 답했고 12.1%는 ‘원하지 않는데 성관계를 강요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강제로 성기 삽입을 시도한 경우도 7.9%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데이트 성폭력은 왜 일어날까?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로빈 월쇼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울림 번역, 미디어일다, 2015)는 1980년대 미국 대학가에서 일어난 데이트 성폭력에 대해 심층적으로 파헤친 책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Ms>가 미국 전역의 32개 대학 6천여 명의 남녀 대학생을 대상으로 벌인 연구조사 결과가 토대가 되었다.
이 조사에서 데이트 성폭력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여학생은, 성관계를 원치 않는다는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상당히 명확하게’ 밝혔다고 답했다. 문제는 남성들이 “NO”를 “NO”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이 더 확실하게 의사 표현을 하거나 강하게 저항을 하면 성폭력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 로빈 월쇼는 “성폭력 사건에 연루된 남성들을 분석해보면, 여성의 소극적인 의사 표현보다는 그들이 상대 여성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맞추어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 한국여성의전화가 중앙대학교에서 진행한 <데이트UP데이트> 캠페인 © 한국여성의전화 제공
연구조사 당시 대학생이었던 에릭 존크는 자신의 학부 논문에서, ‘데이트 중 남성이 상대 여성이 저항하는 상황에서도 성폭력을 행하는 이유’를 남성의 시선으로 정확하게 짚어냈다.
“남성은 (데이트의) 모든 행위를 최종 목적인 성관계를 기준으로 평가하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해본다. (…) 그의 관심은 게임에서 이기는 데 있기 때문에, 그는 그녀와 소통하려 하기보다 단지 동의를 얻어내고자 그녀를 압박하려 든다. 그녀가 자신의 요구를 허락할 때마다 그는 작은 승리를 얻어낸 기분에 빠진다. 반면에 상대방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일 때면 그는 그녀가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를 알려주려고 한다. 사실 그건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일 뿐인데 말이다.
또한 그는 상대방의 태도가 일관되지 않으면 ‘변덕스럽다’거나 ‘줬다 뺏는다’고 말한다. 남자는 애초부터 여성의 욕구에는 관심이 없기에, 만약 상대 여자가 변덕스러운 성격을 지녔다고 믿게 되면 그녀가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해도 남자는 이를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 여자가 참고 참다가 마침내 '안 돼'라고 할 때, 남자는 그 말을 간단히 무시하거나 사실은 좋아하면서도 튕기는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즉, “남성들은 데이트에서 ‘이기도록’ 학습된다”는 것.
친밀하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 데이트 성폭력은 둘 사이의 사적인 일로 치부되기 쉽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 일다
그러나 위의 지혜씨 사례처럼,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에 ‘데이트 성폭력’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스스로 데이트 성폭력임을 인지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진단한다.
자신의 행동이 부적절하지는 않았는지 계속 후회하고 자신을 책망하는 경우가 많다. 또 자신이 겪은 일이 성폭력이 아니라 ‘성관계’였다고 규정하고 싶어서, 오히려 가해 상대와 연애를 시작하거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서강대학교 성평등상담실 김현정 상담교수는 “극단적인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한 여성들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날 너무 사랑하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연애관계는 친밀함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도 ‘친밀하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돼 폭력으로 인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앞서 한국여성의전화가 실시한 조사에서, 데이트 성폭력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여학생의 72.1%는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9.5%의 여학생만이 친구나, 선배, 가족에게 사실을 말했고, 전문기관에서 상담을 받거나 경찰에 신고한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데이트 관계에서는 성적인 행위가 자연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에, 성폭력 행위를 ‘난폭하고 거친 성관계’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많은 데이트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이 일어난 뒤에도 가해자와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고 반복해서 피해를 입기도 한다.
당연히 고소율도 낮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유리화영 소장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고소를 하더라도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는 ‘동의된 성관계’라고 주장하면서 피해자를 무고죄나 명예훼손으로 역고소 하는 일도 있다”고 밝혔다.
우리 사회에서 데이트 폭력이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특히나 데이트 ‘성폭력’은 그 속성상 둘 사이의 은밀한 일, 사적인 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믿었던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 의한 피해인 만큼 피해자에게 더 큰 혼란과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친밀함 뒤에 가려져 있던 그 행위를 이제는 ‘성폭력’이라고 말하자. ▣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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