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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도 있어요?” 광기어린 ‘하녀’의 외침
<모퉁이에서 책읽기> 영화 “하녀”와 김원의 “여공 1970”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 칼럼.

 

 

“내 애는 죽건 말건 자기 애만 귀엽단 말이군요… 내가 바보예요. 왜 내 애만 죽여야 되는지 모르거든요.” –영화 <하녀>의 대사

 

왜 <하녀>(김기영 감독, 1960)를 인상 깊게 보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드라마가 주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숨죽여야 하는 욕망들이 뻔뻔스럽게 전면에 나설 때 나오는 말들의 충격. 점잖은 대화에서 결코 하지 않을 말들의 솔직함과 편협함. 그 편협함이 가리키는 진실의 풍경이 좋다.
 

▲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배우 이은심의 연기도 전설로 남았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는 인위적인 작품이다. 기괴한 느낌을 주는 중산층 가정의 폐쇄된 풍경이 그렇고, 등장인물의 과장된 대사와 행동이 그렇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찍찍거리며 횡행하는 쥐들과 독약으로 쓰이는 쥐약이 그렇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살인도 마다 않는 거침없는 행동이 그렇고, 계단에 머리를 찧어가며 상대의 다리를 붙잡고 끌려가는 처절한 갈증과 허기도 그렇다.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면 죽음도 불사하고 상대를 서슴없이 파괴하는 것도 묘하게 통쾌함을 준다.

 

우리의 일상이란 것은 한 발 비껴나면 추락하고 죽음의 언저리에 몰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욕망을 누르는 것이 훈육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하녀’, 가난한 노동계급 여성에 대한 묘사

 

하녀의 원념(怨念)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비천한 노동계급 여성이라고 설정되기 때문이다. 공장의 여성노동자들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청소와 뒤치다꺼리를 하던 ‘하녀’는, 결코 중산층 남성을 남편으로 둘 수 없고 부유한 가정을 가질 수 없으며 재생산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김기영 감독은 이러한 처지를 공들여 묘사한다. 하녀가 ‘여공’들의 일부로 세력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고, 하녀가 여공들의 존재를 들어 주인을 협박하는 장면들에서, 가지지 못한 여성들의 계급적 박탈감과 은밀한 연대를 보여준다.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충녀>(1972)에서는 ‘술집여자’들이 자신들의 동료가 중산층 가정에 편입되지 못하고 학대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집에 몰려가 도자기며 기물을 부수며 분노를 드러내는 장면이 나온다. <하녀>에서 여성노동자 곽선영이 연애편지를 썼다가 음악선생의 거절로 죽게 되는 장면이 먼저 나오고, 장례식에서 그 어머니가 “공부시킬 형편이 못돼서 취직시켜 놨더니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어 내쫓았단 말이요!” 절규하는 장면이 이어 나온다. 곽선영의 죽음은 음악선생이자 집주인인 동식이 하녀의 협박과 유혹에 넘어가는 빌미가 된다.

 

이제 집주인을 차지했다고 여긴 하녀는 있을 수 없는 말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뭐래두 첩이 됐으니 하녀보다 나은 게 있어야 되지 않아요.” 하면서 주인을 ‘여보’라고 부르고 그 부인에게 밥을 차려 올리라고 한다. 하녀는 임신을 했지만 온정을 가장한 부인의 권유에 넘어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아이를 유산하고, ‘왜 자신의 아이만 죽어야 했냐!’며 주인의 아들을 쥐약으로 독살한다.

 

기괴한 내용이지만 영화에서 이런 장면은 이상하지 않게 연결되어 전개되는데, 그건 남자를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루려는 하녀의 욕망이 강렬하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여배우 이은심은 자신의 욕망 이외의 것은 고려하지 않는 강렬한 ‘하녀’ 인물을 연기한다. 자신도 갖고 싶고, 대접받는 사람이고 싶다는 욕망의 일관된 분출은 ‘하녀’ 캐릭터를 다른 어떤 영화에서 보지 못한 강력한 의지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그 이글거리는 눈빛과, 담배연기를 뿜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대는 강한 인상을 잊지 못할 것이다.

  

           ▲  김기영 감독의 1960년작 <하녀> 중에서. 

 

그런 점에서 2010년 리메이크된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서 하녀 은이가 보여준 착한 여성의 이미지는 되레 시대에 후퇴한 느낌을 주었다. 원작 <하녀>는 계층상승의 욕망을 위해, 자신도 중산층 남성을 택해 아이를 소유할 수 있다는 원념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죽이고 없앨 수 있는 인물인데 비해, 임상수 감독의 <하녀> 은이는 끊임없이 친절하고 따뜻한 말과 대접을 갈구하며 자신의 아이뿐 아니라 타인의 아이에 대해 한결같은 애정을 품고 희생하려는 인물이다.

 

아이를 죽이는 1960년 <하녀>의 욕망이 영화에서 이해되는 데 비해, 아이를 살리려는 2010년 <하녀>의 선함은 이해되지 않았다. 욕망은 타협하지 않고 그 원함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데 인물의 생생함이 살아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은 영화다. 픽션이다. 픽션의 극적 설정은 중산층의 세계관과 당시 사회적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집에 젊은 하녀를 둔 것도 범의 입에 날고기인가보다”는 마지막께 안주인의 대사처럼 하녀는 ‘날고기’처럼 취급되어 묘사될 수 있는 대상이다. 이 영화는 결국 하녀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녀>(1960)의 마지막 장면이 ‘이 모든 것이 남자 주인의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마무리되는 것은, 영화의 상황 설정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절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성적 판타지-주인을 갈망하며 유혹하는 하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빈곤한 여성들의 재생산권 박탈, 경제적 권리의 박탈, 고단한 노동의 현실은 영화를 통해 언뜻 그 모습을 드러내며 보복의 서사 속에 떠오르지만, 그것은 남성의 가부장적 시선 속에서 허용되는 것만큼만 상상되며 있는 그대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범의 입에 날고기’라는 말을 듣고도 맹한 표정으로 순종하는 현실의 하녀 모습이 마지막 장면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에 비하면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 감독, 1975)에서 주인집 아들에게 강간당해 쫓겨나오는 영자의 모습이 더 솔직한 것인지 모른다.

 

여성 독자로서, 관객으로서, 나는 고전이라는 작품들을 읽거나 볼 때 작품의 한계와 여성에 대한 모욕적인 묘사 방식을 함께 의식하게 된다. 배우기 위해 보면서도 한편 실망하고, 즐거워하면서 한편 굴욕감을 느낀다. 작품에 묘사되는 여성들은 스스로 소리 내지 않고, 대신 전달되는 목소리에는 그들이 겪어 내는 현실이 간과되기 때문이다.

 

근대화 시기 ‘요보호 여성’으로 간주된 ‘식모’

 

1960년대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혼자 몸으로 농촌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들 대부분은 29세 미만의 미혼 남녀들이었다. 그 여자들의 절반은 15~19세의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은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대다수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정도였다. 1972년에 ‘하녀’(식모)는 24만6천 명으로 추산되었고 서울에서 ‘하녀’를 두고 있는 집은 31.4%였다.

 

공장에 다닌 여성노동자들은 공식적인 존재들이었지만 식모(하녀)는 논외의 대상이었다. 공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식모’가 되는 것보다 나은 선택으로 여겨졌다. ‘하녀’는 집안의 ‘사적’인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 비가시적 존재였지만 가정과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요보호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파출소에서는 ‘식모’들에 대한 신상카드를 만들어 신원 조회와 범죄 예방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 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이매진, 2005) 
 

[유괴, 절도, 살인, 폭행 등의 ‘범죄’로 해석된 식모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하층 사회 여성들이 지닌 욕망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지배적 담론은 식모만이 아니라, 버스 여차장 누나, 사환 누나, 술집에 다니는 여성들을 포함하는 하층 사회의 가난한 여성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런 담론이 지배적이게 된 이유는 하층 여성들이 중산층, 지배 계급에게 ‘이질적인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중산층 가족들은 이런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가시적으로 그녀들을 ‘범죄시’하는 단어와 담론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식모로 상징되는 하층 계급 여성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한편으로는 가족 내부의 식모에 대한 학대와 비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인간적인 대우를 호소하는 ‘인간주의’ 담론을 형성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층 사회 여성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 안에는 식모로 대표되는 하층 사회 여성의 욕망, 중산층 가정 파괴에 대한 공포가 착종되어 있었다. 중산층 가족과 구성원들은 “자기 식구들끼리 오붓하게 살아오던 예전 습관이 여러 가지 장해를 받고 질서가 파괴되어 참을 수 없어 내보냈다”고 식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하지만 이런 지배 담론에 대해 식모들이 그저 묵종하지는 않았다. 중산층 가정과 주부들의 식모에 대한 불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식모들이 초보적으로나마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음을 드러내 준다. (…) 식모 범죄의 실질적 원인은 불미스런 관계 혹은 성적인 학대나 성폭행, 주인집에서 맡아둔 임금의 체불 등 비인간적인 대우와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다. 식모들에 대한 폭행은 주로 ‘사형’(私刑)의 형태로 이뤄졌다.]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김원, 이매진, 2005) 1장 ‘식모는 위험했다’에서.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횡행하던 시절, ‘하녀’는 가족의 소유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녀들은 주인에게 빨래방망이로 맞아 죽기도 했고, 누명을 쓰고 연탄집게로 지져지기도 했으며, 굶겨진 채 쇠줄과 몽둥이로 맞기도 했다. 옷이 벗겨지고 가둬져 구타당하고 실신하고 죽기도 했다.

 

가족계획사업으로 핵가족이 강조되며 육아와 살림을 전적으로 주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과학적인 모성 담론이 등장했을 때 식모 폐지론도 함께 나왔다. 그녀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끝까지 이물(異物)인 존재였다. 가정주부의 책임이 강조되고 남성가장 모델이 확립되자 ‘사적’ 노동을 담당했던 ‘하녀’의 존재는 추방되거나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하녀’가 사라지자 하녀에 대한 소문과 작품만 남았는데, 거기엔 중산층의 공포와 죄책감과 책임 전가가 함께 담겨 있었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면서 흑인에 대한 성적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피해자인 양 위치 지은 것처럼, 지배하는 자는 지배당하는 자가 성격적으로 탐욕스럽고 무분별하다고 규정하며 은밀한 욕망과 죄책감 속에서 비난한다. 영화 속 하녀는 외친다.

 

“이 집은 내 것이야. 선생님은 물론, 모든 이 집의 재산과 생명이 다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알란 말야”, “난 당신과 지낼 수 있는 짧은 행복을 위해서 내 목숨을 바쳤어요. 죽어서 뭐가 있어요. 행복이란, 목숨이 있을 때 있는 거예요. 여기서 놓치면 하늘에 가서도 못 찾아!”

 

광기 어린 ‘하녀’의 외침 속에, 자신의 손으로 생산해내었음에도 그 몫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그림자를 비추어본다. 백치 같은, 무지한 존재로, 그러나 탐욕스런 악귀 같은 존재로 묘사된 그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말없이 노동하고 부도덕한 여자애들로 취급되며 일터와 국가 속에서 통제 당하고 사적으로 전유 당하던 소녀들을 생각한다. 극적인 구성이란 것, 드라마라는 것의 통념에 기댄 상상력과, 그로 인해 소외되고 잊히는 경험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악하지도, 탐욕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의, 변함없는 노동의 일상과 그 몫에 대한 권리들을 기억한다. ※영화 <하녀>는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koreafilm.or.kr) ‘한국 고전영화 보기’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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