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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귀신이 돌아온다
<모퉁이에서 책읽기>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여성, 목소리들>의 저자 안미선의 연재 칼럼입니다.

 

 

귀신이 되어 하소연하는 자매
 

© 김별아 저, 권문희 그림 <장화홍련전>(창비, 2003) 표지 
 

어릴 때 읽은 <장화 홍련전>은 낯설고 무서웠다. 계모가 전처의 딸들이 마음에 안 들어 물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거나, 쥐의 껍질을 벗겨 이불 속에 밀어 넣고 처녀가 낙태했다고 모함하는 장면들은 괴기스러웠다. 고전 동화라고 버젓이 읽으면서도 명색이 엄마라는 사람이 전처 소생이라는 이유로 서슴없이 딸들을 죽이려 들고,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결정적인 모함의 증거로 삼아 딸들이 그 아버지에게 버림받게 한다는 설정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부장의 관심과 자원을 독차지하기 위해 일어나는 여자들 간의 경쟁, 그중 악랄한 계모의 계략은 이제 막 동화책을 읽기 시작한 여자아이에게 다소 충격적인 얘기였다. 고전 동화를 읽으며 세상을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 문화의 각본을 배우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의 이야기를 현대에 읽으면서, 통념을 내면화하고 전승되는 이야기 틀을 익히는 것이었다.

 

귀신이 되어 하소연하는, 물에 빠져 죽은 자매라니. 귀신은 꼭 소복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귀신이었다. 이승에 한이 맺힌 여자들은 귀신이 되는데, 그 한이라는 것은 가부장 제도의 억압에서 비롯된 속병이기 일쑤였다. 아이를 낳았다고 모함 당했거나, 아이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거나,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겼거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미움을 받았거나,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맘껏 드러내다 처벌을 받거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 만만해 죽임을 당했다거나 그런 식이었다.

 

예쁘고 착해서 억울하게 귀신이 되는 주인공이나, 못생기고 욕심 많아서 대놓고 벌을 받는 나쁜 여자나 모두 가부장제가 구획 지은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이를테면 원귀가 될 것 같으면 콩쥐 같은 여자만 원귀가 될 게 아니라 팥쥐 같은 여자도 원귀가 될 것이었다. 못생겼다고 악역을 떠맡은 여자들도 모두 한이 많을 테니까.

 

예쁘거나 예쁘지 않아도, 착하거나 착하지 않아도, 남의 기준에 줄 세워져 비교당하는 여자들은 속이 문드러질 거고 그걸 모두 토로하려면 죄다 원귀가 되어 출몰해 밤새 사설을 읊어야 할 터였다. 공권력의 대행인 사또 앞이 아니라 여자 귀신들끼리 원탁 토론을 벌이며 ‘나 사실 니가 미운 게 아니었다. 우린 왜 이 모양이 되었나’ 토론해야 할 판이다.

 

‘구태의연한’ 드라마를 보며 우는 여자들

 

딸은 죽어도 된다. 가부장제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여자는 모두 똑같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들이 아니라고 태어나 젖도 못 먹고 며칠 동안 방치되어 있던 어린 여자애들이 커서 어른이 된다. 살기 위해서 집안의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여자애이기 일쑤였다.

 

드라마를 보고 우는 여자들은 공모의 감정을 느낀다. 한 주부가 내게 ‘살기 위해서 드라마를 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건 바뀌지 않은 관습 속에서 여자들이 겪는 일상을, ‘구태의연하다고’ 딱지 붙은 드라마가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여직 핏줄밖에 대놓고 따지는 게 없으니까 ‘저 애 핏줄이 누구 거냐’고, ‘며느리 될 애가 처녀는 맞았냐’고 분분한 드라마가 나온다.

 

여자들이 집안에서 당하는 일이 여전히 조선시대 꼴이니까 사극이 기세 등등하고 봉건적인 가족 행태가 텔레비전에 비친다. 그런 재현이 다시 현실의 편견을 강화하는 건 폐단이겠지만 ‘살기 위해’ 드라마를 보는 여성들은 나름대로 절실한 이유가 있다. 제도 속에 적응해 살지만 인간이기에 쌓이는 차별에 대한 분노와 욕구가 있다. 그것을 드라마를 소비하면서 푼다. ‘흥, 내가 완전히 무릎 꿇은 건 아니거든’ 반발하면서 드라마를 본다.

 

옛날 소설을 재탕 삼탕한 것 같은 드라마에 여전히 열광하고, 어릴 때 본 고전동화처럼 여전히 완벽하고 예쁜 ‘장화, 홍련’의 이야기를, 악한 계모의 이야기를 즐겨 본다. 가부장제의 틀에 반발하지만 가부장제가 틀 짓는 여성들의 구분과 배제에도 익숙해져, 분노하면서 꿈꾸고, 반발하면서도 다시 적응한다.

 

우리의 근대가 봉건 시대와 맞물려 있는 것을 안다. 공포스런 여귀는 우리 가운데 추방된 누군가임을 안다. 지금 있는 자리가 찢기고 이겨 붙여 만든 소파, 마땅히 몫을 받아야 할 이들을 추방하고 억지로 짜 맞춘 자리라는 걸 안다.

 

공포영화의 여귀는 근대사가 망각하려 했던 기억

 

▲ 백문임 지음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책세상, 2001)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백문임 지음, 책세상, 2001)은 근대 대중물의 여주인공이 놓인 좌표를 연구하고 가부장과 민족의 재산으로 여겨진 여성의 ‘정절’과 그 재현을 살펴본다.

 

대중물의 여주인공은 가부장제의 향수를 충족시켰지만, 그 통제에서 벗어나 불안을 환기시키는 존재이기도 했다. 대중물의 여주인공은 과거의 봉건적 이념을 보여주면서 체제 내로 포섭되거나, 현재와 근대의 가치 속에서 배제되어 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는 존재로 드러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생산되었던 일련의 여귀 공포 영화들은 분명 근대화 프로젝트의 ‘공식적인’ 여성상인 현모양처의 음화이다. 이는 <춘향전>의 거울로 기능하며 가부장제와 근대의 허상을 비판했던 독특한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 최은희의 춘향이 국가와 민족과 가부장의 세계에 행복하게 편입해 들어가 근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존재라면, 여귀 공포 영화의 원귀들은 그러한 편입을 거부하거나 정절과 가문이라는 가부장 질서에 희생당한 후 공포스런 형상으로 귀환하는 존재들이다.

 

춘향이든 원귀든 그들이 빌딩이 늘어선 근대 도시의 여성들이 아니라 전근대 여성들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들은 봉건적인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려 있거나 노스탤지어의 대상처럼 보이지만, 근대와 국가, 민족 담론이 봉건시대의 가부장 이데올로기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을 오히려 적실하게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형상은 근대 국가로의 힘찬 행보를 위해 전유되거나 반대로 배제되고 억압되었던 이미지이다. 이 점에서 춘향이든 여귀이든, 동일한 그들은 근대의 적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문임,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 140p

 

“오랜 세월 대중의 집단적 무의식과 교감하는 대중물은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온 역사의 망각들, 흔적과 상처들을 결코 잊지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억압된 것들이 무의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언제든 계기만 주어지면 의식의 차원으로 급부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계기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늘 꿈이나 환상과 같이 무의식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에서 그 흔적과 상처들을 일그러진 형태로나마 형상화하듯 말이다. 대중물이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1960년대 들어 대중물의 여주인공들이 공포 영화의 여귀로서 매우 두렵고 흉측한 몰골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서 중요하다. 그들은 이 땅의 근대사가 배제하고 망각하려 안간힘을 썼던, 바로 그 기억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같은 책, 134p

 

억울하게 죽은 여자는 어떻게 돌아올까. 비수 같은 원념이 사무쳐 할퀴고 찢고 부르르 떨 것인가, 목 놓아 울 것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 깨물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혼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안간힘을 써 버티면서 자신의 슬픔이 세상에 흔적 없이 지워지는 자리를 속상해 지켜보고 있을 것인가.

 

독자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여자들은 그동안 여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다. 자신의 일이 되지 않게 조심하면서 구분 지으면서 냉정하게 외면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지 않는다. 염치없어 미안해한다. 자신의 망각과 안위를 부끄러워한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곁을 떠난 이들을 차마 마주할 수 없는 것이다.

 

독자도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여자들이 귀신 이야기를 맞닥뜨렸을 때 느낀 것은 부채감과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죽은 사람들이 원귀가 되어서라도 돌아온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떠나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곁에서 그들이 사라져도 시선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면. 그녀들의 울음이 지금 자신이 참고 있는 통곡을 대신해주기도 한다.

 

그녀들을 이야기 속에 되살려 주고, 이름을 불러주며, 대신 통곡해주고, 새파랗게 질린 침묵을 잘라, 거침없이 이어지는 통쾌한 복수담을 꾸며 들려주고 싶었을 게다, 억울하게 죽은 그녀들에게. 그렇게 해서라도 위로해주고, 잘 가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기에 얼어붙은 자신의 삶에도 온기 쬐여주는 군불을 지피게 되었을 것이다.

 

떠날 수 없는 현실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로 떠나는 법을 알았다. 떠나간 사람의 원통함을 이야기로 풀어주고 되살려주었다. 그래서 순응의 이야기가 고발이 되기도 했다. 매끈한 척 늘어놓는 이야기가 울퉁불퉁하게 균열되어 있기도 했다. 비단 천 같은 이야기 안에 피 묻은 바늘이 꽂혀 있었다. 가부장제가 건네는 사탕 같은 드라마 속에서도 혀에 쓰게 배어오는 맛을 독자들은 감지할 수 있었다.

 

쓴 인생의 내장을 부푼 꿈들로 차곡차곡 채워야 살아갈 수 있다며 열심히 오래된 소설을 읽고 대중드라마를 보았지만, 그래서 또 다른 환영의 세상이 만들어졌다. 추앙을 받거나 비난을 받으며 귀신이 된 모든 여자들의 숨결이 살아 우리 곁에 얼쩡거리는 환영의 세상, 여전히 고되게 살아가는 여자들이 그 환영을 자신들의 베개로 삼고 버틴다.

 

이야기에 깔깔거리며 뻔히 속아 넘어가면서도 속 깊은 곳은 여전히 쓰리다. 재미있어서든 슬퍼서든 대중물을 보고 제각기 훌쩍인 눈물들은, 가부장적인 소설과 드라마가 말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진한 외로움에 물든 것이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로. 제각기 여귀가 된다면 돌아와 더 하고 싶은 말들로.  안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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