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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 왔다, 여기가 바로 ‘거기’다
<이 언니의 귀촌> 전남 장흥에서 농사짓는 산하(상)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일다] 

 

 

         ▲  집 앞 텃밭.  두 달여 전, 전라남도 장흥에 왔다.   © 산하 
 

이곳은 전라남도 장흥이다. 고되고 오랜 직장생활로 인해 몸과 맘에 심한 무리를 느껴 쉬고 있던 동생과 함께 두 달여 전에 여기로 왔다. 개 한 마리, 닭 열 마리가 한집에 산다. 대략 400평쯤의 밭을 일구고, 이웃마을에서 농사짓는 지인들의 논농사도 조금씩 거들며 살고 있다.

 

따로 또 함께, 유목하며 살다가 정착한 이곳

 

7년 전이다. 하던 일을 접고 맨 처음 향한 귀농/귀촌지는 전라북도 무주였다. 서울에서 알고 지내던 지인이 그곳의 한 마을에 먼저 들어가 살고 있었고, 옆 마을의 집을 소개해주었다. 무주에서 반년가량 마당의 텃밭과 집 근처 기십 평의 땅을 일구면서 고사리, 오디 등을 채취하며 살았다.

 

그해 봄 만우절에 엄마는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3년째 투병 중이던 엄마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건만 상실감은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8월이면 반딧불이들이 별처럼 날아드는 무주의 산골은 아름다웠으나 가슴에 난 구멍 속으로 드나드는 그늘진 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이후로 여러 곳을 떠돌았다. 장흥으로 정읍으로 제주도로 부산으로, 중국과 라오스와 네팔과 인도의 시골이며 도시로. 정착과 유목 사이를 오가며 혼자 살기도 하고 누군가(들)와 함께 살기도 했다.

 

▲   이곳, 장흥에서 나와 함께 사는 개.   © 산하 
 

지난겨울이 저물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병과 연로함이 두루 부른 죽음이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제주에서 부산으로 와 2년 넘게 아버지 곁을 지키는 동안, 이 ‘돌봄노동’이 지나는 시절이 오면 그땐 어딘가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이곳, 장흥으로 왔다. 사오 년 전, 혼자서 칠팔 개월을 살았던 곳이다. 지인들과 이웃들의 배려로 가능했던 평화롭고 훈훈했던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나를 이곳으로 이끈 듯도 싶다. 엄마의 죽음 이후 내 영혼 안팎에서 수년간을 서성이며 일렁이던 바람의 그림자는 잦아들었다. 난 이제 이곳을 쉬이 떠나지 못할/않을 것이다.

 

낯선 공간과 정서 속으로 ‘스미는’ 시간

 

여기로 온 지 한 달이 채 못 되었을 때, 두 곳의 밭을 빌리게 되었다. 이전에 살던 마을에는 빈집이 없어 건너건너 마을에 깃들긴 했으나 자전거로 10분 남짓 거리밖에 되지 않아서 그 마을에 있는 밭과 이 마을에 있는 밭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요즘은 낮이 길어지고 뜨거워지는 때라 아침 7시경이면 밭으로 향한다. 이웃마을 밭에는 도시락을 싸들고 가기도 한다. 오전에 일을 하다 정오가 가까워 오면 도시락을 까먹고 밭 안쪽에 난 대숲 그늘 아래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기도 한다.

 

한낮 더위를 이기며 잠시 일손을 놓는 시간인데, 숲의 그늘이 한결 깊어지는 여름이 오면 뱀 때문에라도 못 누릴 ‘호사’다. 밭에서 풀이며 작물이며 흙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은 고요함을 안겨다 준다. 몰입과 망각의 시간. 가능한 한 홀로, 자연 속에서 더 무심해지고 싶다.

  

▲  이웃마을 밭. 요즘은 아침 7시경에 밭으로 향한다. 도시락을 싸들고 갈 때도 있다.  © 산하 
  

혼자일 때는 이렇듯 주로 밭에 있다. 이밖에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웃마을의 지인들과 논농사를 짓고 빵을 굽고 피클이며 장아찌를 만들고 이따금씩 정치적인 행동(읍내에서 탈핵 서명운동을 벌이거나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에 참석하거나 이러한 입장이 녹아들어 있는 지역신문에 글을 쓰거나 대안시장을 여는 데 함께하거나)을 하며 ‘더불어’ 산다. 마을행사가 있으면 회관에 가서 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말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어딘가에 적응하여 관계를 쌓아가는 일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낯선 공간과 시간과 정서 속으로 ‘스미는’ 시간 말이다. 낯설고 배타적인 눈길은 어딜 가도 있게 마련이고, 이 앞에서 뒷걸음질 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거의가 어른들인 마을에서 누굴 마주치게 되더라도, 그분들이 어떤 눈길을 던지더라도 인사부터 했다. 도시에서는 상대가 누가 됐든 해야 할 필요를 덜 느꼈던 인사를 여기서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진심을 담아서 하게 된다.

 

먼저 다가가리라는 다짐으로 생활을 시작해서였는지, 예전에 살던 마을 근처라서 그랬는지, 짧게이지만 여기저기서 시골살이를 해봤던 경험 덕분인지 이곳에 와서 느낀 어려움은 별반 없었다.

 

어쨌든 여기는 일종의 ‘마을 공동체’라 관계를 잘 일궈가는 일은 중요하고, 그래서 무시로 마주치는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도리’를 다하려고 노력 중이다. 가능한 한 가까워져서 어른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면서 시골살이의 재미, 더불어 살아가는 재미를 더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

 

           ▲ 우리집에는 개 한 마리, 닭 열 마리가 산다.    © 산하  

 

시골살이의 매력을 알아버렸으므로

 

생계 걱정은 미리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다. 내겐 부양을 책임져야 할 부모나 자식이 없다. 동생이 있지만 경제적인 부분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

 

한 달에 한두 번 열리는 ‘마실장’에서 벌어들이는 기만 원과 작은 잡지 두어 군데에 쓰고 있는 원고를 통해 들어오는 약간의 돈과 현물, 이따금씩 맡게 되는 교정교열 작업비가 수입이라면 수입이지만 그래봐야 월 평균 20~30만 원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간다.

 

이곳 장흥에는 한 달에 한두 번, 귀촌/귀농인들이 주축이 되어 꾸리는 ‘마실장’이 열린다. 지역의 오일장 날짜와 주말이 겹치는 때에 오전 10시경부터 정오경까지 열리는 반짝 장이다. 지난 4월, 두 돌을 맞았다.

 

마실장에 오는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지은 농산물이나 그 농산물을 가공한 것들을 들고 나온다. 계절 채소, 잡곡, 고추장/된장, 빵, 잼, 차, 술, 김치, 장아찌, 피클, 두부, 계란 같은 먹을거리와 미싱을 돌리고 손바느질을 해서 지은 옷이며 소품 등이 소박하게 장터 곳곳에 놓인다.

 

이사 와서 두어 번 빵을 굽고 생초콜릿을 만들어 마실장에 나갔다. 그것들을 팔거나 교환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것들을 사거나 얻었다.
 

▲  직접 구운 빵. 이곳에 와서 두어 번 빵을 굽고 생초콜릿을 만들어 마실장에 나갔다.   © 산하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물질적인 풍요보다 자연과 인정의 넉넉함을 누리며 살겠다고 작정하고 왔으므로 실제로 생계 문제를 크게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 수년간 여러 곳을 떠돌며 느낀 바지만 고정적인 벌이가 없어도 농촌에서는 마음을 열고 손발을 조금만 재게 움직이면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여기에다 어디 박물관으로 사라진 게 아닌가 싶던 훈훈한 정과 다달이 바뀌는 계절의 민낯과 고요함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평화의 기운을 고스란히 품는 법을 익혀가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인간은 누구나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좇아 살아가게 마련일 것이다. 자신을 그리스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현실에 끼워 맞추며 무자비한 세상 질서와의 ‘타협’을 신념이라고 합리화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알고 있다면, 그리고 원한다면 그렇게 살아라. ― 이 정언명령을 따르기 위해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이미 시골살이의 매력을 ‘알아버렸으므로’, 알고 있고 원하는 바대로 살아가는 게 옳다고 생각해왔으므로. 덜 소란스럽고 덜 고독하게, 덜 착취하고 덜 소비하면서 만물과 교감하며 삶을 펼치기 위해 여기로 왔다.

 

여기가 내가 바라던 거기라 여기며 살아가는 중이다. 여기서 꿈을 일궈 가며 살다 보면 바라던 거기가 여기에 펼쳐질 것이라 믿으며.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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