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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결혼도 안 하고 사느냐”에 대하여
<이 언니의 귀촌> 전남 장흥에서 농사짓는 산하(하) 

 

※ 비혼(非婚) 여성들의 귀농, 귀촌 이야기를 담은 기획 “이 언니의 귀촌” 기사가 연재됩니다. 이 시리즈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통해 제작됩니다. [일다 바로가기]

 

 

자급자족하며 비혼 여성으로 사는 삶

 

그러니까, 이 삶이 내게로 왔다. 농사짓는 비혼 여성으로서의 삶 말이다. 이곳, 장흥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는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살고 있기도 하고, 하지 ‘못해서’ 이렇게 살고 있기도 하다.  

 

            ▲  이 삶이 내게로 왔다.   ©  산하  

 

비혼 여성이 점증하는 시대다. 그들은 나처럼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다가 마침내 ‘못해서’ 비혼의 삶을 이어간다. 결혼이란 걸 도저히 못할 것 같아서 안 하거나, 안 하려고 하다 보니 못하는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영향일 수도, 성 정체성에 좌우되는 존재 방식의 문제일 수도, 갖가지 정치적 종교적 이유에서 비롯된 가치관과 세계관 때문이거나, 경제적인 문제 때문일 수도 있으며, 이러한 까닭들이 골고루 덧씌워져 있거나 겹쳐 있을 수도 있다.

 

내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비혼 상태가 되기도 했지만 내가 비혼을 ‘선택하기도’ 했다.

 

비혼(非婚), 그것도 자급자족적인 삶을 살고 싶어서 찾아 든 농촌에서 비혼 상태로 살아가고자 하는 내게, 이러한 삶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주류 질서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는 ‘사회적 불복종’의 한 방식이라면 방식이다. 어떤 잣대에서 보면 무능력하거나 회피적인 삶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렇게’ 살면서 계속 묻게 되는 건, ‘왜 이렇게 사느냐’가 아니라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가’이다.

 

꾸려지는 일상의 체계와, 구조상 도시와 달리 서로에 대한 관심도가 더 높을 수밖에 없는 곳이 이곳, 농촌이다. “왜 이렇게 (결혼도 안 하고) 사느냐”라는 어른들의 걱정 어린 질문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저 가만히 웃거나 “이렇게 사는 게 좋아요” 라고 한마디 하고 만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 물음을 되뇌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살면 안 되는가.’

 

적지 않은 비혼 여성들이 ‘비혼’을 자신의 존재 증명의 한 방식으로 삼게 된 출발점이 자라면서 보아온 ‘가족’에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시작은 여기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결혼 제도도 가족 제도도 공정하다거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불균형’을 당연시하는 가정/가족의 존재 방식, 나아가 이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대체로 자의 반 타의 반을 뒤섞어 적절한 선에서 세상의 질서를 받아들이며 그것이 나름대로 선택한 ‘최선의 삶’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어찌 됐든 각자 ‘최선을 다해’ 주어진 생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현재와 같은 ‘농촌 비혼 여성’으로서의 삶이 지금의 내가 상상하고 살아낼 수 있는 최선의 삶이다. 이런 내 처지는 앞으로도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장가 못 간 아들 vs. 시집 안 간 딸  

 

▲ 토박이 미혼 여성은 농촌서 찾아보기 힘들다. 내 방. ©산하 
 

‘인종, 성, 계급에 따라 인간을 차별하기’라는 의식적인 움직임과 관련하여, 과거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그러한 인간의 역사는 세계곳곳의 여성들에게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 라는 다짐을 남성들보다 더 많이 하도록 ‘강요’해왔다. 여전히 여성들이 비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남성들에 비해 많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서로에게 의지하여 서로를 돕고 살아도 모자랄 시대며 판국에, 그것이 꼭 결혼의 방식일 필요는 없으니 주어진 성별을 떠나 함께 살아보자는 입장도 있다. 그래도 어찌됐든 여자들끼리 잘 살아보자는 움직임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나 홀로, (필요와 경우에 따라) 따로 또 같이’를 추구하는 행태 등, 나날이 다양해지는 생존 혹은 공생(共生)의 방식을 보면 점점 더 복잡해져 가는 인간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도 같다.

 

‘비혼’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농촌 사회에서, 생존에 불리해 보이는 ‘미혼’ 상태의 여성과 남성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는 도시에 비해 더 확연히 나는 것 같다. 그곳이 연고지인 경우에는 더 그렇다.

 

‘농촌 총각’들은 이른바 결혼 적령기를 넘겨 한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효자, 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는 그들을 향하는 시선은 대체로 ‘연민’이다. 어른들은 늙은이들만 남은 농촌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려다 보니 장가도 못 갔다며 안쓰러워한다.

 

반면에 토박이 ‘미혼’ 여성은 농촌에서 거의 백 퍼센트 찾아보기 힘들다. 그 상태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부모는 물론 주변의 마을 어른들에게까지 걱정을 끼친다는 시선 때문이다. 농촌의 ‘미혼’ 여성은 ‘미혼’ 남성과 달리 ‘애물단지’에, 불효하는 처지가 되어버린다. 어떻게든 시집을 가거나 아니면 도시로 떠나서 사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정서가 지배적인 것 같다. 그것은 외지에서 별다른 연고도 없이 ‘비/미혼’ 상태로 귀촌/귀농하는 여성들에게로 향하는 시선과는 또 다른 것이다.

 

여성생태공동체의 시도, 꺼지지 않은 불씨

 

귀농/귀촌을 이미 했거나 귀촌/귀농하려는 비혼 남성들을 본 적이 별반 없어서, 딱히 그들이 지향하(려)는 삶이 어떤 맥락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귀농하려는 비혼 여성들은 제법 만나왔다. 그래서 ‘여성생태공동체’라고 해야 하나, 여자들끼리 무주와 제주도에서 한 사람과, 두 사람과, 세 사람과 농사지으며 한 집에서 더불어 살아보기도 했다. 

 

           ▲   이른 아침, 밭에서 마주친 고양이.  ©  산하  

 

‘살이’의 방식에 관한 구체적인 그림은 각자 조금씩 달랐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서로를 도우며 생존과 생계 문제를 해결해가고 싶어했던 것 같다. 함께 밭을 일궈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결과물을 거두며, 차례를 정해 식사 준비를 하고 농사 공부를 비롯해 갖가지 워크숍을 조직해가며, 더불어 거닐고 노닐고 서로의 마음과 처지를 헤아리며.

 

그들 중엔 스스로를 ‘비혼 여성’이라고 정체화한 이도 있었고,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2년 가까이에 이르도록 함께했던 그들은 지금 흩어지고 없다. 이유야 어찌 됐건 나 또한 떨어져 나왔다. 한때는 비슷하게 ‘다른 삶’을 꿈꾸던 그들은 결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간간이 전해 듣는다. 어딘가에서 또 그들 나름대로 ‘최선의 삶’을 찾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 그랬다. ‘상상’은 현실이 되는 듯싶었으나 녹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두어 번 시도를 해본 일이므로 그게 ‘실패’였다고 섣불리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 부분(한 집에 살든 한 마을에 살든 모여 살면서 여자들끼리의 더 적극적인 삶을 도모하는 것)과 관련해서 만큼은 작고 희미하게나마 ‘불씨’ 같은 것이 내 속에 아직 남아 있음을 문득문득 느끼곤 한다.

 

내 속에서 여전히 꼼지락거리고 있는 이 상상의 불씨를 먼 미래에라도 지필 것인가 말 것인가, 지펴서 펼친다면 ‘어떻게’ 펼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왜 이 ‘꿈’을 쉬이 놓지 못하는가…. 접었다 폈다, 상상 속 꿈의 주름이 빼곡하다. 현재 살아갈 만하므로 더 적극적으로 그 상상을 사유하려 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또 다른 이름인 미래와 과거를 지금은 덮어두고 싶은 것인지도.

 

마을회관에서 ‘여자들끼리의 삶’을 겹쳐보며

 

농촌에서 살다 보니 혼자 사는 여자어른들을 자주 대하게 된다. 일찌감치 대처(大處)로 자식들을 보내고 남편도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고, 한때는 북적거렸던 집을 이제 홀로 남아 지키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들의 평균 수명이 남성들에 비해 정말로 길다는 것을 ‘노년 여초 현상’이 두드러지는 농촌에 살면서 실감했다. 이제는 기력이 쇠하여 농사를 놓으신 분들도 있고, 여전히 밭이나마 조금씩 일구고 있는 분들도 있다. 

 

           ▲   밭일 하다가 쉬면서…  ©  산하  

 

이분들의 또 다른 집은 마을회관이다. 마을회관이 이분들께는 공동부엌이자 거실이자 안방이다. 여기에 모여 밥을 지어 먹고 담소를 나누고 텔레비전을 보고 화투를 치며 일상을 이어간다. 규모가 작게나마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는 분들은 서로의 밭일을 함께 하기도 하고, 움직이는 구멍가게인 ‘식품 차’가 마을에 오면 함께 구경을 하러 나가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도 한다.

 

이분들에게서 내 미래를 읽기도 한다. 아, 나도 저렇게 저분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늙어가겠구나…. 현재를 살기에도 바듯한 기분일 때가 잦지만 무시로 마주치는 이분들을 대할 때면 그 모습에 미래의 내 모습, ‘여자들끼리의 삶’을 희미하게나마 겹쳐보게도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실은 잘 모르겠다. 꼭 의도나 의지대로만 살아지는 게 인생이 아님을 알게 되어버렸으므로, 딱히 ‘앞으로’를 그리며 살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모습을 대면했을 때 겹쳐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직접 구체적으로 그려본다는 건 또 다른 맥락일 테니까.

 

비혼인 상태로 농사짓고 그때그때 생계 문제를 해결해가며 이곳에서 이렇게 ‘꿈꾸며’ 살다 보면 뭉게뭉게 피어 오르며 그려지는 구름 같은 그림이나마 생겨나지 않을까, 라고 짐작해볼 따름이다. 내게 미래의 삶이라는 것은 현재와 겹쳐지는 모습이라, 달리 구체적인 대책 없이 이렇듯 여전히 추상적인 모양새로 다가온다. ‘꿈꾸기’는 계속될 테지만 현재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지금은 여기서 이대로 좋다는 것, 다시 도시로는 안 갈 것 같다는 것쯤이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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