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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대학원생, 돌상 치우고 비행기에 타다
서정원의 미국대학 탐방(1) 아이 키우는 학생들의 현실
서울대 부모학생조합 <맘인스누> 대표 서정원씨(33세)가 양육과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들을 위한 정책을 살펴보기 위해 미국 대학들을 탐방하고 온 이야기를 5회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둘째 아들의 돌은 1월 7일이었다. 나는 그 다음날 보스턴 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내가 처한 심난한 상황에 대한 거리가 늘어나는 듯하다. 아이들과는 하루도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요즘 들어 첫째 녀석은 품에서 끼고 자지 않은 날이 없다. 꿈틀거리며 나를 깨우던 에너지로 꽉 찬 녀석의 몸뚱이가 벌써부터 그립다. 아직 젖을 끊지 못해 젖이 불 때마다 둘째 아들을 향한 그리움에 애가 탔다. 어떻게 보름을 버틸지 걱정이 앞선다.
참, 이렇게 물러 터져 모질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보름이나 되는 해외 출장길에 나선 것인지.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 서울대 여교수회가 주최한 <공부하는 여자 in 서울대> 포럼에서 부모학생 대표로 발언하는 서정원 씨. © 맘인스누
나는 1980년대 생이다. 사춘기 때는 IMF외환 위기가 온 나라를 휩쓸었고, 청년기에는 미국 발 금융 위기의 여파로 세계가 휘청거렸다. IMF 외환 위기로 우리 가족은 빈곤층으로 떨어졌다.
집안도 혼란스러운데, 전학을 간 학교에서 시험 답안지에 체크를 잘 못했다는 이유로 전체 학급 앞에서 교사에게 두들겨 맞았다. 교장실 앞에서 급우들과 함께 말뚝 박기를 하다가 맞아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랑은 달랐다. 도덕을 가르치던 여자 담임교사는 50센티 잣대가 몇 차례나 부러지도록 나를 때렸다. 소위 ‘모범생’ 축에 끼던 나는 학교를 자퇴했다. 나의 자존감을 훼손시킨 사람에게 ‘도덕’을 배우고 싶지 않았다.
방안에 들어앉아 한동안 책만 읽다가,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 나와 석간신문 배달 일을 시작했다. 방직공장에도 몇 달 다녔고,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도 다녔다. 그렇게 번 돈으로 책을 사서 보고, 입시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어머니는 중화요리집에서 설거지하는 일을 했는데, 그렇게 번 돈으로 남동생을 가르치셨다. 나는 내가 벌어서 썼다.
다행히, 종교의 도움으로 나는 ‘문제아’가 되지는 않았다. 20대에는 기독교 선교사가 되고 싶어 저개발국가에 가서 선교사 훈련도 받았다. 한국에서보다 사는 게 나았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의 대학에 등록해 공부와 선교사 훈련을 병행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난 선교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을. 그래서 그것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식이 없는 행동은 선하지 못하니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 와보니 담배와 술, 그리고 패배감에 젖어 사시던 아버지의 병간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죽어가는 모습을 꼬박 일 년을 지켜봤다. 날마다 죽어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천형에 가까웠다. 그 시간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장례식 후 내게 남은 것은 빚으로 남은 병원비와 극심한 우울증, 그리고 피로였다. 일 년 즈음 실컷 울고, 먹고 자기만 반복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십 대는 저물어 가는데 그 흔한 대학 졸업장 하나 없고, 남은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 어차피 가진 것도 없고, 가장 하고 싶은 걸 해보자고 생각했다.
공부를 하고 싶었다. 중학교를 그만 둔 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놨다. 이런 저런 대학을 기웃거렸지만 원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스펙이라고 내세울만한 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시 공장에 들어가 조립라인에 서든지, 슈퍼마켓에서 나물을 포장하는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사람을 돕는 일’을 하고 싶었다.
잃을 것이 없었다. 내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나에게 기회를 줄 사람은 없었다. 독학사 시험을 봐서 대학졸업장을 얻었다. 그리고 사회복지학과에 편입했다. 피나게 공부했고 억세게 운이 좋았다. 서른의 나이에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편입을 해서 학과 MT에 갔는데, 스물 예닐곱 살의 한 대학원생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부 열심히 해라” 덕담을 해줬다. 나는 그의 말처럼 공부를 열심히 해서 1년 반 만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아이를 키우는 시간, 외롭고 또 외로운
그 사이 태극권 동아리에서 만난 늙수그레한 박사 수료생과 결혼도 했다. 내 고단한 삶이 결혼과 함께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남들처럼은 살 수 있게 될 거라 기대했다. 17평짜리 낡은 빌라지만 제집이 있었고, 우리도 배울 만큼 배웠으니 어떻게 앞가림은 하며 살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가족을 이룰 준비가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대부분의 에너지와 시간을 나의 발전을 위해 써왔다. 거기에 최적화된 생활 방식으로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사용했다. 밥은 학교 식당에서 세끼를 사먹었고, 집은 잠만 자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내 몸에 익은 삶의 방식은 소위 ‘좋은 아내’의 자질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남편과 가족을 위해 희생봉사하며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감당하는 ‘그런 좋은 아내’.
다행히 결혼 전에 가사 노동에 대한 대화와 협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서, 남편은 ‘그런 좋은 아내’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남편 역시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공부를 존중했다. 하지만 첫 아이를 낳자 상황은 달라졌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집에서 아이를 키워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밤늦게 들어왔다.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공부를 할 수 없을까? 불공평하다.
하지만 이 귀한 아이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들었다. 불만과 죄책감의 반복 속에서 난 내 머리를 잘랐다. 남편을 들볶았다. 그리고 시들어갔다. 나는 가족에게 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며 힘들어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또 다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외롭게 시멘트 벽에 갇혀있게 되었구나. 말도 통하지 않는 아들의 똥 기저귀를 갈며 모유를 생산하기 위해 음식을 먹고 젖을 주는 일이 내 인생의 전부가 된 느낌이었다. 아무 발전도 없이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내로 집에서 밥 세끼 차리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는 일상. 이것이 내가 평생 살아야 하는 미래라면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올 이유가 있었을까?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을까?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친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동네에서 아이 키우는 아줌마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잘 지내다가도 생활 수준의 차이나 자녀 연령이 다른 것들이 서로를 서먹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비슷한 동네에서 고만고만하게 살면서 집 자랑, 차 자랑, 집안 자랑, 남편 자랑, 자식 자랑…. 자랑할 게 없는 사람은 속이 상해 떠나버렸다.
모임을 만들고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배우는 동안, 아들은 어린이집에 갈 수 있을 만큼 자라주었다. 녀석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학교로 돌아간 날, 나는 떨리고 두려웠다. 모두 제 일상에 바쁠 뿐 나에게 특별히 관심 가져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수군거리고 ‘나쁜 엄마’라고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함께 밥을 먹을 사람도 없었고, 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이 얘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남편 흉을 보는 일과 아이 크는 것이 화제의 전부가 되어버린 나는, 학우들이 나누는 연구방법론이라든가 무슨 프로젝트에 관한 대화에는 끼지도 못했다. 말이 통하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외 당하고 눈치 보며 공부하는 엄마학생들
▲ 수유시설이 부족해 화장실에서 수유하는 모습 ©맘인스누
그래서 A4용지에 모임을 알리는 내용을 출력해 하루에 10장씩 붙이고 다녔다. 모임의 이름은 맘인스누(Mom In SNU, 서울대 안의 엄마)라고 마음대로 작명했다. 학교에 갈 때마다 출력비 5백원을 투자했다.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고, 동문 홈페이지에 모임을 알리고, 내가 다니는 동선을 따라 모임을 알리는 전단을 붙이고. 조금씩 사람이 모여들었다. 10명, 20명, 30명, 50명, 100명, 150명, 200명….
우리는 카카오톡 전체 대화방을 만들어서 끊임없이 대화했다. 얼굴 한번 못 본 사람도 많았지만, 아이 키우는 이야기, 휴학한 이야기, 육아와 학업을 함께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또 나누었다. 새벽에 수유를 하다가 힘들다는 투정을 하면, 수유를 하던 누군가가 읽고 공감해주었다. 필요 없어진 육아용품을 나누고, 정기 모임을 통해 서로 만날 기회를 가지고, 함께 나들이를 다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끈끈한 유대감과 이해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이 똑똑하고, 뭐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아이를 낳은 후 공부를 한참 중단해야 하고, 어린이집 대기 순위에서 밀려 발을 동동 구르고, 유축할 곳이 없어 화장실에서 젖을 짜 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 낳고 공부를 한다고 학교와 사회에서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다못해, 아이를 데리고는 강의실은 물론이요, 연구실에 들어갈 수가 없고, 심지어는 학교 도서관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한다는 것을 말이다.
대학이라는, 가장 합리적이어야 할 곳에서 일어나는 비합리적인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서 나는 이런 이슈에 대해 대학신문과 중앙일간지에 글을 썼다. 또, 둘째를 임신해 남산만한 배를 내밀고 학교 본부에 항의 방문을 했다. 부모학생의 생활 실태를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관련 부처와 담당자들에게 메일로 발송했다. 여성, 일-가정 양립, 저출산과 관련된 포럼이나 공청회가 있으면 참석해 손을 들고 발언했다. 관련된 각종 프로젝트의 기획서를 썼고, 가족친화 캠퍼스 만들기 사업 제안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학생복지 관련 부서에서 일하는 50대 남성직원들은 나를 진상 민원인 취급을 했다. 식당에 데리고 가서 “식사나 한 끼 드시고 가시라”며 내 제안서를 물렸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아무 문제없는 현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일거리를 늘리는’ 거북하고 부담스런 ‘정치적인 새파란 대학원생’에 불과했다.
나는 물어보았다. 내 제안서를 상부에 보고는 하는지, 혹은 일-가정 양립에 관한 전문가나 적어도 복지 전문가가 이 업무를 처리하는지. 9급 공무원으로 30년쯤 전에 서울대학교에 들어와 연봉을 1억 즈음 받는 고급 행정직이 된 50대 중반의 남성들은 말했다. “규정과 지침이 없어서 안 된다”고.
사회가 젊은 여성에게 요구하는 대로 미래 세대를 낳았더니 “규정과 지침이 없어” 모성 보호 정책에서는 제외되고, 학업은 단절되고,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육아-학업을 양립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개천에서 용 된 나나, 전형적인 엘리트 여성들이나, 엄마가 되고 나니 학업 중단과 여러 면에서 배제를 당하는 경험을 공통적으로 하게 된다.
규정과 지침이 없으면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여성학문 후속 세대가 겪는 어려움을 전혀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 50대 남성 행정직원들에게 ‘규정과 지침을 만들어달라’는 나의 요청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그들은 내가 찾아가거나 방문을 하면 상당히 거북해하다가 내 말을 듣고는 그게 끝이었다.
▲ 서울대 인권센터 주최 <대학원생 제도환경개선 토론회>에 아기를 데리고 참석한 조합원. © 맘인스누
‘외국 대학들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러다 지난해 11월 정부연구기관의 정책연구용역 과제에 선정이 되었다. 대학의 부모학생의 상황과 여성 연구인력의 형편을 조사하고 정책 제안을 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나라에선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보편적 복지가 워낙 잘 된 유럽은 보육과 성평등 정책이 잘 되어있어 우리의 현실과는 큰 괴리가 있었다. 한편, 미국은 국가에 의한 복지보다는 각 대학 자체적인 시스템이 2000년을 기점으로 확립되기 시작했다. 대학마다 일-가정 양립 부서가 있고 이곳을 통해 교수, 직원, 학생에게 필요한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는 미국 사례에 집중해 해외 사례를 조사해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맘인스누 대표이자 이 프로젝트의 연구원 자격으로, 미국의 대학들에 방문하게 된 것이다. 특히 미국의 학문후속세대를 키우는 연구중심 대학들은 어떤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버드, MIT, 시카고, 스탠포드, UC 버클리를 보름간 방문하게 되었다. ▣ 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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