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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드러내는 곳, 그리프 서포트
뚜껑을 덮어버린 고통을 마주볼 수 있도록…
‘기운 내자, 활기차게’
머리로 알고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마음 한 켠 어딘가가 살짝 묵직하다. 이런 묵직함은 언젠가 마음 속 저 깊이에 넣고 뚜껑을 덮어버렸던, 소중한 사람이나 소중한 무언가를 잃은 슬픔 혹은 분노, 자책감, 절망, 아픔, 망연자실함, 즉 ‘그리프’(grief)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쯤 자신의 ‘그리프’(grief: 깊은 슬픔, 비탄, 고뇌, 한스러움)를 자각하고 돌보는 건 어떨까? 작년 4월 일본 도쿄 세타가야에 문을 열고 가슴 속에 그리프를 품은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그리프 서포트 세타가야’를 찾았다.
우리 삶에 광범위한 ‘그리프’
▲ 그리프 서포트 하우스 입구로 안내하는 간판. © 페민
그리프 서포트 하우스는 한적한 주택가 한 켠의 고령자 주간지원센터 2층에 자리하고 있다. 마루 깔린 방과 다다미가 깔린 방이 있고, 넉넉한 소파와 의자, 색색의 천이 덮여있어 들어서는 순간 온 몸의 긴장이 풀린다.
그리프 서포트 하우스 내 ‘화산의 방’은 어린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도록 방음 시설이 갖춰진 방에 큰 인형과 샌드백 등을 갖추고 있다.
프로그램을 이끄는 곳은 ‘그리프 서포트 세타가야’. 2012년 미국 오레곤주에서 사별을 겪은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슬프고 괴로운 마음(그리프)을 마주볼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더기 센터’(The Dougy Center) 연수에 참가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도 이런 활동을 해보고자 2013년에 설립한 기관이다.
‘그리프 서포트 세타가야’에서 생각하는 ‘그리프’의 범위는 넓다.
“사별로 인한 상실뿐 아니라 이별, 폭력 피해(안심의 상실), 분쟁이나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지역과의 연대감 상실, 경제생활수단 상실), 실업이나 취업난(희망의 상실), 빈곤(사람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 상실), 괴롭힘, 나이나 성별, 민족, 종교, 장애, 성적 지향과 성인식 등에 따른 차별(자존감과 정체성 상실), 비혼과 불임 등에 대한 사회의 불관용(자기 긍정감 상실) 등 직간접적인 요인에 기인한 모든 것”을 그리프라고 파악한다.
‘그리프 서포트 세타가야’를 설립한 사람들은 모두 여성이다. 이들이 ‘그리프’가 무엇인지 언어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의가 도출되었다고 한다. 설립자 중에는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지원하는 사람도 다수 있어, 지금까지 활동과 인생에서 배운 ‘그리프’의 정의가 모두 포함된 것이다.
취재 과정에서 필자 역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안심, 안전한 사회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데 대한 슬픔이 마음 속 깊이 자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프면 철저하게 슬퍼해라
‘그리프 서포트 세타가야’의 마츠모토 마키코 씨는 “여성의 인생은 말 그대로 그리프 투성이”라고 말한다.
일례로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이혼을 하고, 아이를 갖지 않는 삶을 선택한 여성이 있다. 여성주의적으로 보았을 때 자기 선택을 통한 ‘해방’이지만, 익숙했던 모든 것을 손에서 놓는다는 것은 인생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또, 세상이 가진 강력한 가족 신화와 커플 신화로 인해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 흔들린다.
이러한 슬픔, 혹은 빼앗긴 자존감을 자각하고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는 것이 바로 ‘그리프 서포트’이다.
“‘당신은 있는 그대로 괜찮다’는 여성주의적 사고 방식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리프 서포트’의 생각, 즉 슬프면 철저하게 슬퍼해라, 약한 사람이 아닌 강한 사람만이 울 수 있다는 가치관의 전환이 내게는 살아갈 힘이 되었다.” 마츠모토 씨의 얘기이다.
슬픔을 마주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는 힘
‘그리프 서포트 세타가야’에서 최근 연 연속 강좌의 제목은 <슬픔과 동행하며 함께 산다>이다. “그리프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대상이에요” 라고 말하는 마츠모토 씨. 그리고 그리프와 마주할 힘, 그리프의 의미를 발견할 힘은 각자의 내면에 있다고.
이때 필요한 것은 ‘자각’이라는 작업이다. ‘자각’의 핵심은 1) 상실한 존재와 상실 자체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2) 자신의 그리프에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3) 그리프의 작용을 둘러싼 문화와 분위기가 어떤지 이다.
자각하기 위해서는 차분히 자신의 내면과 마주할 필요가 있다. 연휴 등 비교적 여유가 있는 시기에 스스로 해볼 수 있는 작업을 소개하니, 독자들도 시험해보시길.
[자신을 응시하는 초간단 ‘셀프 케어’]
준비물: 도화지, 가위, 크레파스, 풀, 색종이, 잡지나 신문
방법: 좋아하는 색 색종이를 가위나 손으로 찢어 하트를 만든다. 이를 도화지 가운데 붙이고 그 안에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물건, 가치관을 적는다. 그 주변에 자신이 안심하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크레파스로 적거나 신문이나 잡지를 오려 붙인다.
마츠모토 씨는 “자신과 내적 대화를 하고, 그때마다 ‘자신의 핵심’을 파악하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상상하는 과정 자체가 셀프 케어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프 서포트 세타가야’에서는 현재 사별을 겪은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성인 대상 프로그램이 각각 진행 중이다. 파트너와 사별한 사람들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은 혼인 신고를 했든 하지 않았든, 상대의 성별이 무엇이든, 혹은 국적과도 무관하다.
마츠모토 씨는 “사별이라고 국한하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비롯된 자책감과 분노, 의존, 애석함, 박탈된 자존감과 원치 않는 이혼 이야기 등,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범위로 넓어집니다. 여성이 살아가며 겪는 괴로움을 주변 눈치 볼 필요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안심할 수 있고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요”라고 포부를 밝힌다.
누구든 남몰래 품고 있는 ‘그리프’를 드러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안심과 따뜻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리프 서포트 세타가야 홈페이지 http://sapoko.org) ▣ 가시와라 토키코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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