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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뛴’ 역사 쓰기, 사할린을 읽다
최상구의 책 <사할린 SAKHALIN> 
 

<사할린 - 얼어붙은 섬에 뿌리내린 한인의 역사와 삶의 기록>(최상구, 미디어 일다, 2015)에 대한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의 서평입니다. -편집자 주

 

 

2013년 8월, 일본 홋카이도 북단에 자리한 왓카나이(稚内)에 섰다. 인구 4만 명에도 못 미치는 이 작은 마을을 찾은 까닭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군이 밀고 들어오는 사할린에서 독극물을 먹고 자살한 우체국 직원 일본인 소녀 9명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립한 ‘9인의 소녀상’을 보기 위해서였다. 2012년 8월에 “사할린 집단 자살의 비밀”(<한겨레21> 제926호)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통해 논란거리 많은 이 ‘소녀상’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 나로서는, 내 눈으로 소녀상을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둘째는 ‘국경’의 도시로 알려진 이 작은 마을에서 러시아의 땅 사할린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왓카나이의 소야미사키(宗谷岬)에서 사할린 최남단까지는 겨우 40km 남짓. 날씨가 좋으면 눈으로 보인다. 가깝다 보니 이런 저런 갈등도 많다. 바닷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바다를 넘어가려는 사람도 있었고, 밀항 사건도 끊이지 않는 곳이다. 아쉽게도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짙게 드리운 안개 탓에 사할린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근현대가 만들어낸 ‘모순투성이’ 섬 사할린

 

▲  최상구의 <사할린 - 얼어붙은 섬에 뿌리내린 한인의 역사와 삶의 기록>(미디어 일다, 2015) 
 

사할린이 정보(information)로서가 아니라 어스름하게나마 ‘지’(知, knowledge)의 형태로 내 자신의 머릿속에 언제 어떤 형태로 자리를 잡았는지는 가늠조차 안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홉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사할린을 일본에선 ‘가라후토(樺太)’라 한다. 안톤 체홉은 사할린 여행기에서 가라후토의 지명이 ‘중국의 섬’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가라후토라는 명칭은 아이누(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열도 등지에 사는 소수 민족) 말 ‘Kamuy Kar Put Ya Mosir’(아무로 강어귀에 신이 만든 섬)에서 유래했다.

 

1890년 체홉은 모스크바를 떠나 세 달에 걸친 여행 끝에 무려 1만km 떨어진 사할린에 도착했다. 체홉의 여행 목적은 죄수와 유형 제도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세달 동안 사할린에 머물면서 관찰하고 조사한 결과를 1895년에 <사할린 섬>(배대화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2013)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1Q84>(양윤옥 옮김, 문학동네, 2010)에서 체홉의 <사할린 섬>를 언급하면서, 체홉이 모스크바를 벗어나 당시 벽지 중의 벽지였던 사할린으로 장기 여행을 떠난 것은 도회지 생활에서 몸에 배어 있는 흔적을 씻어내기 위한 일종의 “순례 행위”였다고 쓰고 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사서 하는 고생’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탓인지 체홉은 이 책에서 사할린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무겁고 어두운 러시아 대륙의 끝이자 ‘지옥 같은’ 아시아의 시작으로 그리고 있다. 전형적인 유럽인의 눈이다.

 

이런 안톱 체홉이 ‘만들어 낸’ 혹한과 죄수/유형 제도의 사할린 이미지에, 기리야크를 비롯한 다종다양한 선주민족이 거주했었고 근현대부터는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에 남북한의 대립이 더해져 한반도에서 ‘끌려온’ 조선인들의 눈물이 스며들어 있는 곳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지면, 사할린은 근현대가 만들어낸 ‘모순투성이’의 섬이 된다.

 

이 ‘모순투성이’의 섬에 한국이라는 또 하나의 ‘주체’를 개입시켜 역사적 사실과 인문적 상상력을 더해 사할린을 ‘살아있는 ‘나’의 문제’로 쓴 책이 바로 최상구의 <사할린 - 얼어붙은 섬에 뿌리내린 한인의 역사와 삶의 기록>(미디어 일다, 2015)이다. 2012년 10월부터 약 3년간 “기록되지 않은 역사”라는 제목으로 <일다>에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출간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발로 쓴 역사’라는 점에 있다.

 

나와 사할린의 ‘얽힘’을 다룬 인문적 접근

 

▲  올해 초 저자가 만난, 보스톡에 사시는 강기남 할머니.  
 

글쓰기를 필자의 감각으로 거칠게 구분하자면, 인문적 글쓰기와 사회과학적 글쓰기가 있다. 사회과학적 글쓰기는 글쓰기의 ‘주체’가 분석 대상과 철저히 분리될 수 있다는 믿음에 바탕을 둔다. 분석 대상으로부터의 영향에서 벗어남으로써 가치중립적인 객관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 또한 특정한 역사의 구속물인 이상, 분석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에 반해 인문적 글쓰기는 분석 대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주체인 ‘나’의 문제를 다룬다. 옳든 그르든 ‘나’는 역사의 구속물이고 그 역사와 이런 저런 인연으로 얽혀 있다. 일종의 연루(連累)인 셈이다. 그 ‘연루’와 얽힘의 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일은 물론 지난한 과정이고 그 자체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완성된 객관성의 형태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얽힘의 회로에 ‘나’를 대입시키게 만듦으로써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상에 대한 어떤 공감을 이끌어낸다. 얽힘과 연루에 대한 천착이야말로 공감의 출발이고 인문적 글쓰기의 시작이다.

 

이 책은 ‘나’와 사할린이라는 역사적 시공간과의 얽힘을 매우 ‘윤리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인문적 글쓰기에 가깝다.

 

지은이 최상구는 수차례의 사할린 방문 경험에서 아름다운 “이국적 풍경”보다도 “망향의 언덕 위에 서 있는 위령탑과, 머위 잎과 이끼로 뒤덮인 무명씨들의 묘지와, 이제는 폐허가 되어 버린 탄광촌 곳곳에 남아 있는 한인의 흔적”이 더 “가슴 깊이 스며”(16-17쪽) 들었다고 하는데, 이런 공감을 이끈 것은 ‘연루’ 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사할린을 방문 기간 내내”,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38쪽)고 쓰고 있다.

 

왜일까? 왜 부끄럽고 죄스러운 것일까? 최상구는 코르사코프에서 발견한 위령탑 바닥에 새겨 있는 시에 새겨져 있는 “고국으로 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혹은 미쳐 죽은” 사람들의 기록을 찾아냄으로써 실마리를 찾아낸다. 여기서 언급되는 “고국”은 지은이 최상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사할린에 이웃해 있는 ‘대한민국’은 까맣게 잊고 있는데, 정작 ‘사할린’은 대한민국을 ‘고국’이라 하고 이룰 수 없는 귀환의 꿈을 키운다. 이 대한민국과 사할린의 어긋남의 한편에서 지은이 최상구는 자신의 ‘연루’를 ‘발견’한다. 더구나 이 ‘연루’는 사할린의 눈물이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문제로 지은이를 포함한 ‘대한민국’을 꾸짖고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배반의 역사, 그에 ‘연루’된 나

 

▲  한국에서 보내준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을 받고 계신 코르사코프 한인 1세 이병렬 할머니. 우측이 저자 최상구 씨. 
 

물론 사할린 한인들이 꿈꾸는 고국 혹은 조국이 반드시 대한민국일 까닭은 없다. 그들이 돌아가고 싶은 곳은 ‘고향’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작가 이회성(李恢成, 1935- )은 사할린 태생답게 사할린 경험을 소재로 한 다종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나의 사할린(私のサハリン)>(1975)과 <사할린 여행>(1983)이 유명하다. 이회성은 <사할린 여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망향의 념(念)에 국경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오카(真岡)’에서 태어난 나의 국적은 조선이지만, 망향의 념에서는 일본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모두 같이 ‘실향민’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마오카’가 내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것은 조금도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전후 36년이 지나고 만일 100년이 지나도 이는 내 개인사에서 만고불변의 사실이다.

 

그런데 시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홈스크(Kholmsk)’가 만들어지고 나서는 소련 사람들에게도 이곳은 역시 ‘태어난 고향’이 되었다. 그러니 역사의 동일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 ‘고향’은 각국인이 공유할 수 있게 하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조국’은 각 나라 사람들에게 각각 고유의 것이지만 ‘고향’은 좀 이상한 단어를 쓰면 인터내셔널한 것이다.”(<사할린 여행(サハリンへの旅)>, 講談社, 1983, 18쪽)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명확하다. ‘나라(국가)’와 ‘고향’은 얼마든지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분리 가능성은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난 재일조선인에게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국가 혹은 민족이 분리되는 것은 현실이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일본인에게도 한반도는 ‘고향’이다.

 

<포로기(俘虜記)>(1949)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1909-1988)는 <나의 복원 나의 전후(わが復員わが戦後)>라는 책의 서두에서 오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나가사키 현 사세보에 입항할 때의 ‘묘한’ 느낌을 쓰고 있다.

 

사람들이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기쁨에 들떠 있지만, 오오카를 포함한 많은 포로 생활자에게 사세보는 ‘미지’의 땅이다. 즉 처음 보는 곳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기쁨에 들떠 있는 것은 자신의 고향 풍경과 사세보의 자연 풍경이 흡사해보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세보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입구’, 즉 고향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런 믿음은 고향의 연장선상에 있는 국가가 ‘나’를 보호해준다는 기대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사할린 1세들에게 조국이란 ‘대한민국’ 그 자체라기보다는 태어나 자라난 고향의 연장선에 자리하면서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고향의 연장에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기대가 역사 속에서 반복해서 배반감으로 바뀐다. 그 간극을 지은이는 고발하면서, 대한민국과 그 대한민국과 연루되어 있는 지은이 자신을 포함한 구성원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유민(流民)이 되어버린 이들의 소리에 담긴 것

 

이 같은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이 책이 ‘발로 쓴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사할린에 남아 있는 사람, 귀환한 사람,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인용과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등장한다. 만일 공적인 기록이나 문서에만 의존해 사할린 문제에 접근했다면 절대로 등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운명에 대한 ‘연루’와 ‘공감’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생생한 이야기를 지은이는 끄집어낸다.  

 

          ▲  올해 초, 눈 쌓인 사할린 방문.  고르노자보드스크 공동 묘지 입구.   © 최상구 
  

이러한 방식은 구술사 연구에 가깝다. 구술은 문헌 자료의 공백을 매워주는 보조적 수단이 아니다. 공적인 문헌은 지배층의 의도를 엿보고 사건의 전체를 조망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배층의 의도 하에 쓰여진 특정 시공간에 대한 독점적 해석일 뿐이고, 따라서 다른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구술을 통해 구성되는 역사는 ‘차가운’ 글귀로 이어져 있는 국가들의 공적인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는 기존의 역사상에 새로운 살아 있는 역사상을 대치시킨다. 이 책은 이 점에 매우 충실하다.

 

테사 모리스 스즈키는 사할린 한인들과 선주민들을 “분명히 일본의 팽창주의의 희생자들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다층적으로 뒤얽혀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변경에서 바라본 근대>, 임성모 옮김, 산처럼, 293쪽) 라고 말하고 있다.

 

사할린 한인들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소련은 국제정치적 역학 관계와 노동력 보충이라는 현실적 요구에 따라, 대한민국은 반공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할린 한인들을 버렸다.

 

따라서 일본, 소련, 한국에 의해 유민(流民)/기민(棄民)이 되어 버린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 이들의 존재에 빛을 비추고 권리를 되찾게 하는 일은, 그 자체로 19세기 이래 제국주의 시대의 야만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반도는 일제 말기에 인구의 20% 이상이 해외에 있는 전형적인 유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해외 거주 인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민의 역사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1945년 해방이 진정 해방이었다면 이들 난민이 한반도로 귀환했어야 한다. 그러나 분단과 전쟁, 그리고 가난으로 귀환길이 막혀버렸다.

 

식민지, 분단, 전쟁은 이산의 역사를 낳았다. 하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남북 간의 이산이고, 또 하나는 한반도와 해외동포 간의 이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해외동포 간의 이산이다. 하지만 이들 해외동포의 귀환/정착을 위한 제도는 미비하다. 그 정점에 사할린 한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은이 최상구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항목을 두고 한일협정의 재검토와 사할린 한인들의 영주귀국 사업의 개선과 특별법 제정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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