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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 새지평

미성년 성폭력피해자가 저항할 수 있었을까?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4. 12. 21. 15:30

피해자는 과연 저항할 수 있었을까?
[내가 만난 세상, 사람] 미성년자 강간범에게 ‘의제강간’ 적용 

 

※ 너울 님은 <꽃을 던지고 싶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로 산다는 것> 수기를 쓴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2010년, 법원은 열두 살 소녀에게 술을 마시게 한 뒤 차례로 강간한 혐의를 받은 이십 대 남성 세 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가 어린 소녀이고 음주를 한 사정은 인정되나, 그 상태가 심리적 물리적 반항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항거 불능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피해자가 열여섯 살이라고 말한 점, 키가 157cm에 달하고 발육이 남달라 미성년자로 보기 어려운 점을 들어 ‘미성년자 의제강간’조차 적용하지 않은 판결을 내렸다.

 

올해 10월 2일, 언론 보도에 따르면 휴대폰 채팅 웹으로 알게 된 열두 살 소녀에게 피자를 사준다고 꼬드겨 으슥한 공사장으로 데려가 성폭행한 혐의를 받은 스물네 살 남성에게 검찰은 ‘의제강간’이라며 징역 3년을 구형했다고 한다.

 

현행법상 열세 살 미만의 아동과 성관계를 하면, 설사 합의를 했더라도 처벌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 적용되는 것이 ‘의제강간’이다. 주로 열세 살 미만 아동에게 돈을 주고 성을 매수한 가해자를 처벌할 때 적용되는 법 조항이다. 열세 살 미만 아동에 대한 강간 범죄에 비해서는 형량이 훨씬 낮다. 검찰이 가해자에게 의제강간을 구형한 이유는, 피해자가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위의 두 판결은 공통적으로 아동에게 ‘저항하지 않은 책임’을 묻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하는 이유

 

형법 297조 ‘강간’ 규정을 보면 폭력이나 협박으로 강간한 사람을 처벌하게 되어 있는데, 이때 폭력과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대법원 판례 2000도1253) 물론, 피해자와의 관계나 범행 당시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판단한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범죄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여전히 피해자의 저항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최근 알게 된 하나(가명, 스무 살 여성)는 성폭력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는 과정에서, 술에 취해 저항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화간(동의한 성관계)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  성폭력 피해자들이 저항을 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 일다 -정은의 빨강 그림판 
 

그런가 하면 의붓아버지로부터 5년간이나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던 해리(가명, 열다섯 살 여성)는 그동안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척과 가족들에게서조차 ‘새아빠를 꼬셨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는 가해자가 한 동네에서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서, 자신에게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럽고, 두렵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랐다고 이야기한다.

 

해리 역시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할 때 ‘애정표현’이라는 말과 ‘거절하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엄마랑 살 수 없게 된다’는 말을 듣고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해리는 학교 성교육 시간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성폭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용감하게 엄마에게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엄마는 오랜 기간 침묵했고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딸을 비난했다.

 

그러나, 과연, 저항이 가능한 것일까?

 

성폭력 피해자들이 저항을 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두려움 때문에, 상상도 못한 일이라 경황이 없어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서, 혹은 살기 위해서 저항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버스에서 성추행을 당해도 저항하기는 어렵다

 

나는 애초에 저항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얼마 전의 일이다. 밤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중, 말끔한 양복 차림의 한 남성이 내 옆 좌석에 앉았다. 그 남성은 자신의 양복 윗도리를 벗어 무릎을 덮더니, 내 허벅지를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쳤다. 머리 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짧은 시간이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전문가 아니던가!

 

버스 기사에게 다가가서 ‘경찰서 앞으로 가자’고 하면 과연 순순히 응해줄 것인가? 가해자는 나를 성추행 한 사실을 과연 인정할까? 내가 이 자리에서 소리를 친다면, 과연 나는 안전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무렵, 그 남자가 일어나 버스에서 내렸다.

 

한국 사회에서는 버스 안의 성추행 사건이 흔한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저항하는 것조차 피해자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저항을 하면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말은 오히려 피해자에게 성폭력 범죄의 책임을 묻고,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일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저항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결론에 대한 모험을 하라고 요구 받는 것이다.

 

대부분 성폭력 범죄에는 권력 관계가 작동한다. 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지위나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그것은 이미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저항하기 힘든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조직폭력배에게 당한 폭력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사회는 묻지 않는다.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야 말로 폭력이다.

 

성폭력 근절이 피해자에게 달렸나?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볼 때, 우리 사회는 여전히 ‘피해자다운 피해자’를 요구한다. 그것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피해자인가, 아닌가가 성폭력 사건을 판단할 때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피해자가 저항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피해자다움’이라는 허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얼마 전 준강간으로 직장 상사를 고소한 수현(가명, 24세 여성)씨의 재판에서 가해자 측 변호인은 수현이 얼마나 술을 잘 마시는지, 회식으로 노래방에 가면 탬버린을 얼마나 잘 치는지, 그리고 직장생활 3년 동안 세 번 남자친구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변호인은 이러한 변론을 통해 수현이 보호받을 가치가 없는 여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성폭력 범죄는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성적 폭력을 의미한다. 이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의’ 여부와, 동의할 수 있는 ‘관계’ 여부가 관건이 되어야 한다. ‘저항의 유무’나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성폭력 범죄를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사회적 편견에서 기인한 것이다.

 

성폭력을 반대하긴 쉽다. 그러나 성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사회적 성찰이 없는 한, 피해자에게 저항을 묻는 판결을 계속될 것이다. 성폭력을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은 가해자에게 달려 있지 피해자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피해자에게 저항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요구가 필요하다. ▣ 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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