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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헌장 논란…가시화된 성소수자 운동
6일간의 서울시청 점거 농성이 남긴 것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서울시민 인권헌장’(이하 ‘인권헌장’)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선포한 주체는 서울시가 아니라, 인권헌장을 직접 만든 시민위원들이었다.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에서 의결한 인권헌장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며, 성소수자들이 서울시청 로비를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한지 5일차인 12월 10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농성단 대표들을 만나 사과했다. 곧이어 자신의 페이스북에 “농성의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 12월 10일 서울시청 점거농성 5일차. 박원순 시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하는 대표단.    © 일다 
  

다음날, 서울시 혁신기획관은 성소수자 단체들과의 면담에서 ‘내년 1월부터 성소수자 단체들과 간담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성소수자 단체들은 6일간의 점거 농성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여전히 인권헌장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시민들이 인권헌장 공청회에 몰려들어 폭력적인 언사를 행한 것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대응이나 조치를 취할 뜻을 밝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소수자 단체들은 이번 농성에 대해 ‘용기 있는 직접행동’이었으며, 싸워야 할 이유를 확인하고, 어떻게 싸워야 할 지 깨닫게 된 의미 있는 계기라고 평가하고 있다.

 

성소수자를 무시하지 말라, 시청으로…

 

“운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삶을 꾸려가고 있는 성소수자들이었단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서울시에서 성소수자를 무시했다는 거에 대해 분노한 거죠. 첫날에는 궁금해서 농성장에 왔고 둘째 날, 셋째 날에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얘기를 하는지 들어보려고 왔어요. 3백명이 한 자리에 모여서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며칠 동안 이야기한 것이 큰 의미를 갖죠.”

 

시청 점거 농성에 참여했던 30대 여성 장 모씨(35세, 동성애자)의 이야기다.

 

장씨는 “농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기 삶의 자긍심,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 했다는 뭉클함을 가지고 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참여자들이 농성하기 전과 똑같은 일상을 살더라도 그들의 삶은 달라졌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 이유는 바로 “성소수자로서 자기 문제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법을 알았다”는 것.

 

또 다른 농성 참여자인 20대 여성 김 모씨(27세, 동성애자)는 친구들을 만나러 매일 농성장에 왔다고 했다.

 

김씨는 “대학 때는 동아리나 소규모 동호회 같은 데 나가서 성소수자 친구들을 만났지만, 대학 졸업 후에는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니까 답답했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관심도 많고 뭔가 해보겠다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그걸 분출할만한 공간이나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 농성 중인 참가자들이 앞으로의 향방에 대해 모둠 토론을 하는 모습.    © 일다 
  

김씨는 이번 농성장에서 성소수자들이 잠재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성소수자 운동이 너무 비가시화 되어 있었죠. 매번 의제에서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파기당하고, 이런 게 있었는데 그때마다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가 20년이라면…. 그동안 힘을 모으기만 하고 빵 터지는 게 없었는데, 시청 로비 점거한 걸 본 순간, ‘드디어 뭔가 시작이 되는 건가’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은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면 이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죠.”

 

김씨는 ‘동성애 혐오 세력이나 서울시 측에서도 깜짝 놀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자기 얼굴을 내밀고, 언론 앞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농성도 하고 했다는 걸 예상 못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던 성소수자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는 게 제일 큰 의미인 것 같아요.”

 

기독인단체 포함해 각계에서 연대와 지지 표명

 

이번 점거 농성 과정에서 또 다른 성과는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 정당 등 사회운동 진영이 적극적인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는 점이다.

 

‘성적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에 함께하고 있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장서연 변호사는 “이번 농성의 가장 큰 성과는 광범위한 지지와 연대, 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후원”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특히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잘 몰랐던 시민사회단체, NGO들이 성소수자 이슈를 논의하고 판단을 내린 것에 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6일간의 농성 기간에 각계에서 지지 방문과 후원금, 물품 후원이 끊이지 않았다. 시민사회단체, 노조, 정당, 변호사모임 등 3백여개 단체에서 인권헌장 선포를 요구하는 지지 성명을 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은 12월 8일 성명서를 통해 “민주주의는 문화적 정체성, 사회 관습, 개인의 양심에 대한 소수의 권리 보호가 국가와 자치단체의 가장 우선하는 가치임을 증명할 때 유지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서울시의 인권헌장 폐기 처분에 대해 당혹스러움을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는 12월 7일 “찬반과 합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 원칙에 대하여 서울시는 다시 한 번 분명히 천명해야 한다”고 성명을 냈다.

 

또한 12월 9일에는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연대’ 등 여섯 개의 기독인 단체와 501명의 크리스천들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소수자 혐오에 반대하며, 모두가 평등하게 태어났듯이 평등한 권리를 부여 받아야 하며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으로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인권을 보장하라, 성소수자는 빼고?

 

‘인권’은 문자 그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가지게 되는 권리를 뜻한다. 초등학교 6학년 <읽기> 교과서에서도 ‘인권과 가치’를 주제로 다루면서 ‘차이’와 ‘차별’이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보게 하고, 주변에서 인권 침해 사례를 찾아보는 활동을 교육하고 있다.

 

‘인권을 보장하자’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막상 법적 효력도 갖지 못하는 ‘인권헌장’에서조차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하라’는 조항은 통과되지 못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일부의 사람들을 배제하고 누락시키며 보장하는 것이 ‘인권’일 수 있는가.

 

한 사회의 건강함의 척도는 그 사회 내부에 기득권을 갖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주변부,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로 가늠된다. 이번 ‘서울시민 인권헌장’ 사태를 통해 성소수자 인권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측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  12월 11일 서울 시청 로비.  농성단의 마지막 기자 회견.   © 일다 
  

식지 않은 농성의 열기,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농성 참여자 김 모씨(27)는 “인권헌장이 선포되지 않은 상황에서 농성을 마무리할 때, 이렇게 끝내도 되는 건가 싶었다. 이후의 구체적인 계획도 나오지 않아 답답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성소수자들의 차별을 반대하는 싸움의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고 전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일상을 살고 있는 성소수자들이 점거 농성 이후의 진행 사항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궁금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성소수자 단체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의 운동이 된 거죠.”

 

장 모씨(35) 또한 “농성이 끝난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점”이라면서, 제대로 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성장에 모였던 사람들의 의지와 요구를 어떻게 운동으로 펼칠 것인가, 그걸 고민해야 하는 시점 같아요.” ▣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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