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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의 오늘…변치 않고 남아있는 역사
<모퉁이에서 책읽기>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 안미선이 삶에 영감을 준 책에 관해 풀어내는 “모퉁이에서 책읽기”.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민우트러블’에도 공동 게재됩니다.

 

 

십 년 전에 찾아간 송탄의 그 집 안에는 기지촌에서 평생을 보낸 여성들이 앉아 있었다. 그 자리는 기지촌 여성이나 국제결혼한 여성이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는 자리였다. 나는 기지촌 현장 출신 활동가인 김연자 님의 삶을 기록한 인연으로, 그들의 조촐한 기도 자리에 초대받았다.

 

내 옆에는 혼혈인 제인(가명)과 캐더린(가명), 그리고 나이든 그들의 어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제인은 어린 아이처럼 엄마 곁에 바짝 붙어있었다. 제인의 어머니는 전에 기지촌에서 성매매를 하고 살았지만 이제 나이 들고 불편한 몸으로 폐지를 줍고 살았다. 그래서 아이들의 학비, 병원비, 결혼해서 불행하게 사는 다른 자식 걱정 같은 여러 근심이 많았다. 길가에는 손바닥만한 텃밭에 푸성귀가 자라고 있었다. 땡볕 아래 시들어 지쳐 보이는 채소도 직접 키우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온 여목사가 좁은 방 구석 가운데에 앉아 성경을 폈다. 큰 안경을 끼고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그이 역시 기지촌에 있다가 미군과 결혼했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주를 해서도 불화와 가난과 학대로 많은 기지촌 출신 여성들이 고통을 받았지만, 그들은 또한 고국의 동료들을 잊지 않기도 했다. 남의 집 가정부를 하거나 공장을 다니며 번 돈의 일부를 부쳐 남아 있는 이들의 자립과 생존을 도왔다. 미국에서 일부러 건너온 목사 또한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활동하는 이였다.
 

▲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김연자, 삼인,  2005) 
 

김연자 선생님은 나보고 아이들과 대화 좀 많이 하라고 일렀다. 곁에 앉아 있는 제인은 조금 주눅이 들어 보였다. 친구들이 “너네 나라로 가라”거나 “깜둥이”라고 놀리고 영어로 말해보라며 따돌려서 학교 가기 싫다고 했다. 사립학교에 가지 못하고 영어를 따로 배우지 못해 한국말만 하는 제인은 한국인 취급을 받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은데 흑인 혼혈이라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제인의 이야기를 기록해 달라고 했다. 희망 없는 한국보다 인종이 다양해 차별이 덜하다고 여겨지는 미국이 낫다고 했다. 그 애가 미국으로 얼마나 가고 싶어하는지, 얼마나 착하고 성실한 아이인지, 가면 얼마나 열심히 생활할 것인지를 기록해 후원해줄 미국 분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내 앞에서 제인은 눈치를 보며 “미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가 머뭇거리며 “엄마가 걱정된다”고 하더니 앞날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캐더린은 제인보다 밝았다. 백인 혼혈인 캐더린은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었고 엄마가 애써 뒷바라지해줘 미군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다녀 영어도 잘했고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유창한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며 나에게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혼혈이면서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무역업을 하는 앤(가명)도 있었는데, 그이는 아이들에게 한국과 미국 사이의 혼혈인으로서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기지촌 출신 혼혈인으로서 다른 혼혈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고, 아이들에게 서울로 놀러 오라고 초청도 해주었다.

 

내가 모르는 이름도 나왔다. 엄마와 함께 지내며 신문배달 일을 하고 독학하며 열심히 살다가 사회에 설 자리가 없어 결국 다리에 목을 매어 죽은 한 혼혈아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 모두 묵묵해졌다. 그런 일을 다시 만들면 안 된다고 그랬다.

 

목사 곁에 둥글게 모여 앉아 기도를 했다. 엄마들은 기도하다 고개를 쳐들고 눈물을 삼키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울기도 했다. 꼿꼿이 단정하게 앉아 있거나 활기차게 “아멘!”을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제인과 캐더린은 눈을 뜨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서로 모일 수 있는 공간과 말을 나눌 사람과 차별 받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를 꿈꾸었다.

 

오랜 세월, 언제나 기도했다. 동료들이 미군에게 살해당하거나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연탄가스에 죽어갈 때, 함께 모여 울고 기도하며 천막을 세워 서로 지켜내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기도를 했다. 이 세상에서 감사해야 할 것을 찾다가 “살인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한 사람들이다.

 

비닐 차양이 쳐진 그 좁은 마당을 나와 철문을 열면 빛이 쏟아졌다. 걸어가면 영어로 쓰인 간판과 음식점과 술집, 거리낌없이 지나치는 미군들과 부대 정문이 보였다. 그때 예순이 넘은 김연자 선생님은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서 공동체나 센터를 세울 것을 꿈꾸며 의욕에 차서 일하고 있었다. “기지촌은 내가 아는 유일한 세상입니다. 이곳에 아직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계속 일할 겁니다.”

 

그이는 동두천, 송탄, 군산 아메리카 타운을 거치며 기지촌에서 삼십여 년 동안 살았다. 미군 범죄를 증언했고 기지촌의 현실에 저항했다. 그이는 많이 배우지 못했고 가진 것이 없었고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을 갖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의 말대로, ‘같은 세대의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기지촌 성매매 여성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기지촌은 이제 ‘아메리칸 앨리’로 불린다. 필리핀, 러시아에서 온 ‘엔터테이너’ 여성들이 그곳에서 산다. 대개 가수로 일하는 줄 알고 입국하지만, 들어와 여권과 외국인 등록증을 빼앗긴 채 기지촌 클럽과 바에서 주스와 술을 판매하고 미군에게 성매매를 할 것을 강요 받는다. 그러다 미군과 결혼하거나 출산하거나 이혼당하거나 미국에서 추방당하기도 한다.

 

변했을까? 무엇이 변했을까? 기지촌 성매매는 1945년 미군 주둔과 함께 시작했고 불평등한 한미 동맹 속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으로써 육성되었다. 미국은 이제 단순한 주둔군으로서가 아니라, 전략적 유연성을 내세워 한국을 편리한 거점으로 삼아 언제든 동아시아 전역을 겨냥할 수 있는 국제적 병참 기지로 이곳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 7월 7일에 ‘주한미군 기지촌 여성 성매매 피해 진상 규명 및 지원에 대한 특별법’이 국회에 제출됐다.

 

그 작은 방을 떠올린다. 외교의 이름에 묻혀, 경제적 이해 관계에 묻혀, 언제나 착취당하고 오롯이 한 사람으로서 대우받지 못한 여성들이 그곳에 있다. “본질은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 역사”라고, 김연자 님은 나와 헤어지며 말했다. 변하고 있지만 또한 변하지 않는 것이 이곳에 있다. 그것은 당신도 기억해달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 안미선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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