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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not Free"(당신은 공짜가 아냐)
화려해 보이는 패션디자이너, 그 이면의 삶 

 

 

“50~80만원 받아서 옷은 사니? 월세는 내니? 밥은 먹고 다니니? 정말 살만하니?”

“21세기 하이패션 시대! 20세기 근무 환경?”

“하루 14시간 근무, 월급은 쥐꼬리. 사람 사는 겁니까?”

 

지난 10월 17일 한국 패션업계 최대 행사인 ‘2015 S/S 서울패션위크’(서울시가 주최하는 글로벌 패션이벤트)가 열린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에서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  ‘2015 S/S 서울패션위크’가 열린 동대문디자인플라자앞. 패션노조와 알바노조 회원들. ©패션노조 페이스북 
  

이들은 2015 S/S 샤넬 콜렉션의 콘셉트를 따라 “간지나게 차려 입고 선글라스 끼고” 피켓을 들었다.

 

“실밥 먹고 살란 말이냐 적정임금 보장하라”, “You are not Free(당신은 공짜가 아니다)” 등의 피켓을 든 이들은 최근 개설된 페이스북 모임 ‘패션노조’ 회원들과 ‘알바노조’ 조합원들이다.

 

페이스북에 ‘패션노조’ 페이지를 만든 디자이너 ‘배트맨D’(남)씨는 법적 노동조합을 설립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의 현실을 알리고 소통하기 위해 나선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세련된 이미지 관리에만 신경 쓰는 악덕 패션사업자, 디자이너들에게 똥침을 날리기 위해” 이번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때로는 열정적인 전문직으로, 때로는 화려한 아티스트로 그려지는 패션 디자이너. 아이 옷부터 어른 옷까지, 속옷부터 겉옷, 가방, 모자, 구두, 액세서리까지 패션의 영역은 방대하다. 이 거대한 패션산업에서 과연 디자이너들은 어떻게 일하며 살고 있을까?

 

하루 14시간 노동에 회계업무까지…이게 사는 건가?

 

올해 초 대학을 졸업한 수정(가명, 24세, 여)씨는 졸업과 동시에 운 좋게 바로 국내 유명브랜드인 대기업의 남성복 분야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월급은 160만 원 정도 받았지만 거의 매일 자정 넘어서까지 야근을 했다. 일주일에 2~3번은 새벽 4시까지 일했고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다. 수정씨는 “월급 받으면 택시비로 거의 다 썼다”고 말한다.

 

“월급에 야근 수당이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일한 시간에 따라 주는 게 아니라 고정적인 수당이었다.” 수정씨는 회사가 법망을 피해가기 위해 술수를 부린 것 같다고 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회사에서 디자인 업무가 아닌 회계 업무를 시킨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막내라는 이유로 여성 신입디자이너들에게는 회계 업무를, 남성 신입디자이너들에게는 창고 정리 업무를 맡겼다.

 

이렇게 일하다가는 “내 생활이 없는데, 디자이너로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 수정씨는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브랜드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대기업이 이럴진대 중소기업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고, 야근을 수시로 시키면서도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임금을 주는 회사가 대부분이라는 것. 상황이 가장 심각한 건 디자이너 개인의 이름을 건 브랜드들이다. 한 달에 한두 번 쉬고, 매일 야근을 시키면서 30만원~ 60만원을 주는 곳이 많다고 한다.

 

디자이너에게 ‘상의 55, 하의 26’ 몸매 요구해
 

▲  디자이너 구인 공고에 피팅 모델의 몸매를 요구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페이스북 ‘패션노조’ 모임에서는 “몸뚱아리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대한민국 신입 패션디자이너들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고민, 바로 ‘몸매’를 요구하는 패션업계의 관행이다.

 

디자인을 하다 보면 사람이 직접 옷을 입어보면서 어디가 불편한지 잡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제작한 옷을 입어보는 ‘피팅 모델’을 따로 채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업들에서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피팅 모델을 따로 구하지 않고 피팅 모델의 몸매를 갖춘 디자이너를 채용하고 있다.

 

패션업계 취업사이트를 보면 디자이너이나 MD를 구하는 구인 공고란에 버젓이 ‘피팅 가능자’ ‘남성(상의 100호/ 하의 30)’, ‘여성(상의 55/ 하의 26~27)’ 등이 적혀있다. 이런 몸매를 갖추지 않으면 지원조차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한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데 면접 보러 온 사람들을 구내식당 벽에 쫙 세워놓고 몸매 심사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들려오는 실정이다.

 

‘무급 헬퍼, 무급 인턴’ 학생 때부터 착취되는 노동력

 

페이스북 ‘패션노조’ 페이지를 만든 배트맨D씨는 패션디자이너들이 학생 시절부터 노동력을 착취 당하는 데 길들여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학 1, 2학년 때 학교 측에서 교육 차원에서 몇 개월씩 ‘기업연수’를 보내는데, 이곳에서 학생들은 교육을 받는 게 아니다. 옷을 포장하거나 택배 심부름, 복사를 하는 등 단순노동을 무보수로 한다.

 

또 패션위크 등 대형 행사가 잡히면 유명 디자이너들이 학교 측에 연락을 해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며 학생들을 ‘차출’해 간다. 말은 그럴듯한 ‘헬퍼’(helper)지만, 차비 한 푼 못 받고 무대 뒤에서 온갖 잡일을 해야 한다.

 

대학 졸업 즈음에는 교수의 소개로 인턴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조차도 무급이 대부분이다.

  

          ▲  화려하고 거대한 패션산업, 그 속에서 디자이너들은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 배트맨D 

 

배트맨D씨는 “학교 졸업 후 디자이너 경력 3~4년차까지 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간다. 집에서 용돈을 타서 쓰지 않는 한 이 돈으로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열악한 노동 현실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유명 디자이너들의 막강한 영향력과 권위를 꼽았다.

 

“유명 디자이너들이 패션디자인과 졸업 심사를 하거나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패션디자인 경연대회(한국패션대전, 중앙콘테스트 등)에서 심사를 한다. 그들 눈 밖에 난다는 건 이 업계에서 곧 매장 당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쉽사리 불만을 표출하지 못한다.”

 

또한 관련 학과 교수들도 무급 헬퍼, 무급 인턴의 관행에 적극적으로 일조하면서 패션업계의 입장만 대변하고 있고, 패션업계의 일이 명백한 노동임에도 ‘예술’ 계통으로 인식되면서, “너희는 꿈이 있잖아, 열정이 있잖아” 라며 학생들이나 신입 디자이너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배트맨D씨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흩어져있는 디자이너들의 불만들을 모으고” 사례를 수집해 ‘알바노조’와 함께 법적 대응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외모 차별에 대해서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해, 구인광고에 몸매를 요구하는 내용을 실을 수 없도록 할 계획이다.

 

또한 이번 ‘2015 S/S 서울패션위크’에 맞춰 진행한 퍼포먼스처럼, 디자이너들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리고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호소하는 활동을 지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나랑  
        

* 패션노조 페이스북 페이지 facebook.com/gorightfashion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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