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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으로 추동되었던 20대, 나의 미래는?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여성단체 활동가로 살며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28살, 현재 직업 여성단체 활동가. 100만원이 조금 넘는 월급의 대부분은 월세, 요가학원비와 인문학 강의를 듣는 데 쓴다. 저축은 한 푼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하며 공부도 하는 당찬 20대 같다. 하지만 실상 나는 습관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며 ‘미래 계획 세우기’를 취미이자 특기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지난 한 달 동안에도 미래 계획을 세 번이나 새로 세웠다 폐기했다. 하나는 공무원, 또 다른 하나는 자산회계 자격증 소지자, 오늘 오전 내내 탐색했던 하나는 수의사였다.
내가 이 나이에 아직도 장래 희망을 검토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돈을 못 벌고 있을 줄도.
막 살아볼 깡은 없어…대학 시절의 불안
대학교 1학년 봄, 친구를 잘못 사귀는 바람에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엔 “꼴페미”들과 운동권 친구들만 있었다. 세상에 대한 냉소가 늘어갔다. 주로 우울했지만, 나름 운동권이랍시고 집회에 모임에 활동에 이것저것 참 바쁘게도 살았다.
▲ 대학 시절, 총여학생회실 소파에 누워있는 나. © 송이송
3학년 때인가, 88만원 세대니 삼포세대니 하는 청년 담론이 대학가를 휩쓸었다. 스펙을 쌓기 위해 도서관에 몰린 대학생들을 한탄하는 기사들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렇지만 내 주위 친구들은 별종이었다. 대놓고 잉여를 표방하며 ‘잉여잉여’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신념을 밀고 나가 활동가를 꿈꾸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도서관에도 가지 않고 학점관리도 안하고 토익 공부도 안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다르게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매우 컸다. 내가 한창 대학을 다니던 시기는 아버지가 실직 후 4년 정도 쉬던 때와 겹쳤다. 50대 초반에 갑자기 초라해진 아빠와, 아빠의 실직 기간이 길어질수록 히스테리컬해 가는 엄마를 보고 나도 불안해졌다. 뭐 하나 전문적인 게 있어야 할 것 같아 사회교사를 할 수 있는 교직이수 자격증도 땄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친구들이 퍼져 잘 때도 나는 몸을 일으켜 수업에 출석했고, 엉망으로 갈겨쓰긴 했지만 레포트도 빠짐없이 써서 냈다. 성실했다기보다는 막 살아볼 깡이 없었다는 게 적절한 표현이다.
친구들은 이런 나를 신기해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나도 딱히 제대로 살고 있는 건 아니었는데, 별종들 사이에 있다 보니 내가 별종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첫 출근을 하다
얼레벌레 살다 보니 4학년 졸업학기가 됐다. 웬만한 과목 학점이 다 B+였다. 어중간했던 나의 대학생활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교직이수 자격증이 있으니 임용고시를 볼까도 생각했지만 과열된 임용고시 판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성주의자로 살고 싶었지만, 여성단체 활동가는 되고 싶지 않았다. 대학 때 자원 활동을 하면서 본 여성단체 활동가는 심하게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체력도 좋고, 똑똑하게 정세 판단도 잘 해야 하고, 글도 잘 쓰고, 사람 조직도 잘하는 만능인 것 같았다. 당시 나는 나의 저질체력과 약간 감이 떨어지는 정세 판단력 때문에 자존감이 낮았다. 그리고 풍문으로 들은 활동가의 월급은 턱없이 적어 보였다. 집에서 독립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는데 그 돈으로는 절대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가장 만만해 보였다. 급하게 취직을 준비했다. 뒤늦게 토익 점수도 따고,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에 나를 맞춰보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갑자기 준비한 취직이 성공할 리 없었다. 지난 4년간의 대학생활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나 그동안 대체 뭐하고 산 거지?”
살다가 어쩌다 한 번 이름을 들어본 회사, 이도 저도 아닌 부서들에 영혼 없이 이력서를 들이밀었다. 당연한 결과일까, 모두 탈락. 절망에 빠져있을 때, 예전에 알고 지내던 여성주의자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대학시절 선배가 벤처회사에 다니는데 신입을 뽑는다고, 혹시 생각 있냐고 물어왔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정말이지 감사한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다. 갑자기 인생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내 지난 대학생활을 긍정하기 시작했다. “그래, 역시 인맥이 제일이지! 그동안 헛된 시간을 보낸 게 아니었어! 하하하!”
휴가도, 월차도 쓰지 못한 IT회사 생활
평일엔 아침 9시에서 저녁 7시까지 일해야 하고, 격주 토요일 오전에 출근해야 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만 해도 난 그저 ‘일자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마음뿐이었다. 들어가 보니 IT업계, 그것도 벤처회사는 사람이 일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11시가 넘어 퇴근해야 하는 날이 허다했다. 10분 정도 자리를 비우면 일 처리를 지시하는 채팅창 수 개가 띄워져 있었다. 그 내용들을 처리하다 보면 또 새로운 것들이 떴다. 마치 애니팡 같았다. 아무리 터트려도 끝도 없는 미션이 쏟아지고, 시간은 째깍째깍 줄어드는.
말도 안 되는 내용,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양의 업무 지시가 허다했지만 나는 찍 소리도 못했다.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은 나를 슈퍼 ‘을’로 만들었다. 여성주의자로서 배웠던 똑똑한 언어들이 다 소용없었다. ‘여기서 버텨야 한다. 지금 그만두면 이직을 할 수도 없고, 신입으로 갈 곳도 없다.’ 오직 그 생각만 했다.
입사 7개월 차였던가, 회사 건물 베란다에 나가 한숨을 쉬는데 ‘그냥 지금 죽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는 깜깜해 보였다. 이렇게 계속 임금노동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매일 오후 찾아왔다.
입사 후 1년 동안 단 한 번도 휴가나 월차를 쓰지 못했다. 팀장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월차를 쓰는 걸 본 적이 없었고,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 못 썼다. 아마도 그 회사가 노렸던 게 이런 거지 싶다. 외부와 단절되는 것, 나 자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 여기서 성공해야만 내 청춘이 보상받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더더욱 일에 매진하게 만드는 것.
탈출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입사한 지 딱 1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충동적으로 ‘여성주의 학교’ 강좌를 신청했다. 신청서를 쓰면서 ‘나에게 여성주의란?’이라는 아주 평범한 질문에 답을 하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여성주의란 나에게 아주 빛나는 단어였는데, 잊고 있던 그 단어를 보니 당시의 내 삶이 너무 초라해 보였나 보다.
강의를 듣고 여성주의자들을 다시 만나면서 나는 생기와 활력을 찾아갔다. 그러자 지금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힘도 생겼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도 거기에서 왔다. 나는 팀장을 만나서 팀을 옮겨주지 않으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고장 난 몸뚱아리를 남긴 첫 직장
새로 옮긴 팀은 이전 팀보다 여유가 있었다. 숨 쉴 틈이 생기자 내 삶을 돌아보고 점검했다. 대학 졸업 후 첫 취직을 할 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월 200만원의 월급이었다. 그것만 충족되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표하던 천만 원을 모아서 집에서 독립을 하고 나니, 우선 순위는 다시 설정될 필요가 있었다. 이제는 내 노동력이 가치 있게 쓰이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 월급은 150만원으로 조정됐다. 당시 나는 회사 다니며 망가지기 시작한 몸 때문에 몸살림이나 생명살림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다. 한 소비자 생협의 실무자 채용 공고를 보고 면접을 봤다. 한 달 뒤 출근하기로 하고, 1년 6개월의 첫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찾아왔다. 첫 직장을 그만 둔 바로 다음 날, 다리에 부종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점차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붓더니 발목이 접히지 않아서 걷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밤만 되면 부어 오르는 관절이 너무 가려워서 한밤중에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우는 날들이 계속됐다.
종합병원에 찾아가 몇 십만 원짜리 검진을 받았다. 의사는 류머티스 관절염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절망적인 얘기만 가득했다. 서울을 떠나 시골에 가서 요양을 할 생각을 하니 억울함이 밀려왔다. ‘서른도 안 된 이 창창한 나이에 왜 회사에서 썩고만 살았을까. 결국 이렇게 되고 말 거였으면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화끈하게 살아볼 걸!’ 검진 결과, 류머티스는 아니지만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이라는 답을 들었다.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다는 얘기와 함께.
답답한 마음에 한의원에 가니 신장의 기능이 멈추어버린 것이라고 했다. 오랜 기간 스트레스를 받으며 햇빛을 못 보고 생활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회사를 다닐 때는 긴장을 해서 나타나지 않던 몸의 증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이렇게까지 고장이 났는데 그걸 표현도 못하고 붙잡고 있었을까. 그동안 몸은 내가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몸뚱아리일 뿐이었지만, 이 사건 후엔 전혀 다른 것으로 다가왔다. 몸을 챙기는 것이 일상의 최우선 순위로 자리매김했다.
반복되는 실패: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다
몸의 붓기는 빠졌지만 병은 늘 잠복해 있었다.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거나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몸에 발진이 돋았다. 이런 몸을 돌보기 위해서는 칼퇴근을 하고 집에 가서 집밥을 먹고 쉬어야 했다. 그렇지만 새로 들어간 회사도 야근이 많았고 소비자 생협의 특성상 주말에도 행사가 많았다. 당연히 조직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한창 일할 나이의 실무자를 뽑아놨는데 애가 집에 일찍 가려고만 하니 그들도 당황스러웠을 거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벤처회사엔 없었던 갑갑한 군대식 조직문화였다. 규모도 크고 역사가 있는 단체다 보니 나이든 사람들이 많았고, 90% 이상이 남성 실무자였다. (나는 예민하고 까칠한 여성주의자가 아니었던가!) 사무실에 20대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적응이 쉽지 않았지만 남들은 다 좋은 곳이라고 하는 이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면 앞으로 어디에서도 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패배감만 짙어갔다.
때마침 시작한 한의학 공부와 인문학 공부가 온통 내 관심을 사로잡았다. 몸에 대해 공부하고 몸을 바라보는 재미가 생기니 삶을 다르게 구성하고 싶어졌다. 더 이상 몸을 혹사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몸이 서서히 좋아지면서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이 단체를 언제 그만둘까를 계산했다. 그 시기는 1년 뒤였다가 6개월 뒤였다가 다시 3년 뒤로 늘어나곤 했다. 그날 그날 느끼는 불안감에 따라 벌고 싶은 돈의 액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만둘 시점과 그에 따라 적립해야 하는 돈을 계산하느라 매일 머리를 팽팽 돌리곤 하는 내게 애인이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지 못한 것 같다고.
그랬다. 나는 늘 미래 어딘가에 있었다. 6개월 뒤에 있거나, 1년 뒤에 있거나, 3년 뒤에 있거나. 그리고 나의 행복을 ‘이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 유예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지금 여기’에 살기 위해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었다.
나의 ‘신념’과 일치하는 나의 ‘노동’
두 달 정도를 백수로 살다가 월세를 못 내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친구의 추천으로 지금 일하는 여성단체에 들어오게 됐다. 1년이 지난 지금, 첫 직장과는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이곳에는 활동과 일상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단체 안에서 적정한 노동 강도를 유지하는 것을 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 덕분에 일찍 퇴근해서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는 행복도 느끼고, 한의학과 인문학 공부도 꾸준히 할 수 있다.
▲ 퇴근 후, 강아지와 함께 집 앞에 있는 산으로 산책을 나간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 © 송이송
일상과 일의 균형이 잡히니 삶의 질이 높아졌다. 월급이 크게 줄어든 대신 돈을 적게 쓰는 법도 터득했다.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옷을 사던 습관도 없앴고, 불필요한 소비를 거의 없앴다. 일반회사에 다닐 때보다 신용카드에 덜 의지하면서 살고 있다.
자존감도 높아졌다. 일방적으로 업무 지시를 받았던 회사 생활과 달리, 담당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면서 이끌어 나가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단체의 모든 논의에 참여할 수 있고 함께 결정할 수 있다는 것도. 하루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노동이 내가 삶의 신념으로 삼고 있는 여성주의와 일치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렇게 살면서 돈도 벌 수 있다니!
덕분에 지난 1년은 정말 신이 났다. 아마 졸업 후에 바로 활동가의 삶을 택했다면 몰랐을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한 지 1년이 지났는데 피로도가 거의 없다. 지난 1년 간 미래를 계산한 적도 없다. 앞으로 5년은 거뜬히 일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다.
10년후, 20년후엔? 아직도 미래는 불안하다
그런데 요즘 가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앞으로 계속해서 활동가로 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지금 일하는 단체가 마음에 들지만, 이곳에서 늙을 때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할 자신은 없다. 이곳이 아닌 다른 시민단체나 여성단체의 노동 강도를 내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100세 시대’라는데 늙어서까지 불안에 시달리며 직장을 전전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한번 몸이 거꾸러졌던 경험 때문인지 늙어서까지 일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 이럴 땐 꾹 참고 딱 20년만 공무원을 하고 연금 받아먹고 살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가끔은 전문직에 대한 유혹도 생긴다. 한의사? 수의사? 이런 것들을 한참 알아보기도 한다.
애매한 나이 스물여덟. 그다지 늦지 않은 나이이기에 내 앞에 놓인 선택지들이 많아 보일 때가 있다. 지금이라도 수능을 다시 봐서 무엇이라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다. 이럴 땐 차라리 아예 나이가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새로 도전하기에 너무 늦지도, 그렇다고 이르지도 않은 나이. 얼핏 선택지가 많은 것 같지만 막상 찬찬히 따져보면 그 중 무엇 하나 도전하기도 두려운 상황. 지금 나는 딱 이 상황에 서 있다. ▣ 송이송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 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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