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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주 ‘바다를 건너’ 공부하러 다닌다
<20대 여성 ‘일’을 논하다> 가업(家業) 종사자로 일하며 

 

 

※ 2014년 <일다>는 20대 여성들이 직접 쓰는 노동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해고 후에야 고용보험에 가입한, 전직 학원강사

 

나는 학원 강사였다. 내 생각에 학원 강사란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이지만, 겉보기에는 허울 좋은 선생님이었다. 일을 구할 당시 4대 보험이나 퇴직금, 고용보험 같은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냥 월급 인상에 대한 이야기와 근무 시간만 듣고서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항상 자랑하셨고, 주위에서 “영어 잘하겠네요!” 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학원 강사들에게 위장병은 흔하다. 나 또한 20분의 식사 시간 동안 밥을 허겁지겁 먹게 되면서 일주일에 세 번은 체했다. 그래도 밥을 먹고 수업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쉬는 시간 10분 후 계속되는 수업과, 작성해야 할 많은 서류들이 쌓여갔다. ‘대체 수업 준비는 언제 해야 하는 건지, 문서 작업은 또 언제 해야 하는 건지.’ 수업 준비 없이 수업을 하고 있는 나를, 수업 시간에 틈틈이 문서 작업을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난 아이들의 성적을 향상시켜주는 선생님일 뿐,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좋은 수업’의 방법보다는, 강사인 나에게 쉽고 또 아이들의 성적만 높일 수 있는 수업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좋았다. 빼빼로데이와 밸런타인데이 때는 아이들과 초콜릿도 함께 만들었다.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친구들과는 잘 지내는지, 나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해고 통보는 운이 좋게도(다른 강사 분들은 이 정도면 운 좋은 경우라고 하셨다.) 2주전에 받았다. 전화해고, 당일해고, 임금체불 등이 너무 쉽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물론 1년 후에 월급을 올려주겠다는 약속도, 계약서가 없었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었다. 퇴직금도, 실업 급여도 없었다.

 

나는 퇴직금과 ‘해고 예고 수당’(경영상의 이유로 사용자가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최소 30일 전에 예고해야 하며, 그렇지 않았을 경우 30일분 이상 통상임금을 지급해야 한다)을 받기 위해 노동청에 신고했다. 당연한 요구임에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수 차례 물어가며 절차를 밟아나갔다.

 

고용주와 그의 남편을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의 뻔뻔함에 놀랐다. 퇴직금은 1년 이상 일하면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용주도 이 부분에 대해선 아무 말 못했다. 하지만 ‘해고 예고 수당’을 받으려면 내가 해고되었음을 입증해야 하는데, 그쪽에서는 내가 학원을 통보도 없이 출근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했다. 정황상 해고를 당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는 있었지만, 해고 당시의 녹취와 같은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심지어 고용주는 내가 고소를 하면 무고죄로 맞고소를 하겠다고 했다. 결국, 해고 예고 수당은 받을 수 없었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마치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질 때쯤, 다행히 근로감독관이 발급해준 체불임금서를 고용보험센터에 제출해 실업 급여를 받게 되었다. 학원에서 일할 때는 가입되어 있지 않았던 고용보험을,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해고 후에야 가입하고 보험료를 내었다. 그제야 노동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차츰 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좁디 좁은 지역사회 제주도에서 퇴직금과 실업급여를 받아냈다. 많은 학원강사들은 이렇게 할 경우 학원 쪽에서 더는 일자리를 찾기가 어렵게 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는 강사 일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집에서 5분 정도 걸으면 바다가 보인다. 그러나 나에게 제주도는 낭만의 섬이 아니다.   © 이연(怡然)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모를, 그런 사랑을 했다. 그 사람이 있기에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성학을 배우러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그 사람 때문이었다. (아니러니하게도 유학을 가면 함께 있을 수 없게 되는데…) 다행히 그 사람은 날 기다려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유학을 준비하는 사이에 학원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해고 통보를 받은 후, 나는 이전의 생활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 대한 내 마음도 내려놓고, 학원강사 일에 대한 내 열정도 비웠다. 학원에서 내 짐을 다 싸서 무겁게 들고 내려온 날, 그의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상자에 가득 찬 이면지를 나 대신 버려주고, 저녁을 같이 먹었다. 그 사람이 있기에 모든 과정을 견뎌냈다. 하지만 나의 유학은 그의 주변 사람들이 나를 환영해주지 못하는 요건이 되었고, 결국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 이후 난 내 사정으로 유학의 꿈을 접게 되었다. 지금도 내가 유학을 가지 않을 결심을 좀더 일찍 하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왜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더 빨리 찾았더라면 그 사람과 내 운명이 달라졌을까, 고민하곤 한다.

 

그는 항상 내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특히 해고를 당하고 힘들어하던 그 시기엔 정말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그는 여성학을 배우겠다며 매주 토요일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는 나를 지지해주었다. 금요일 밤 열 시 넘게 퇴근하고, 토요일에 서울로 공부하러 가고, 일요일에는 피곤한 몸을 그 사람 옆에서 쉬었다. 그런데, 과연 나는 단 한 번이라도 그 사람의 기댐이 되어주었을까?

 

학원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던 그때에 그는 내가 다칠까 걱정해주었지만, 끝내 내가 잘 해냈는지 모른 채 그는 떠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사람을 보냈고, 또 그 사람을 찾았다. 이젠 그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조차 희미해졌다.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은 이유’가 뭘까

 

직장을 그만두고 실업 급여를 받게 되니 좋았다. 주변의 상담을 받고 외국이 아닌 한국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성폭력상담원 교육을 받으면서 열심히 배웠다. 하지만 은사님은 ‘왜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은지’ 이유를 꼭 찾으라고, 그래야 내가 공부를 잘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솔직히 여성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없었다. 아니, 잘 몰랐다. 계속해서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왜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어하지? 대학원을 나온 후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이렇게 묻다 보니, 여성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실제로는 여성학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여성학을 통해 찾으려고 하는 답은 이미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 여성학을 처음 만나면서 비로소 난 엄마와의 관계를 용서하고 나에게 자유를 줄 수 있었다. 여성학은 나에게 숨통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아빠와의 관계를 여성학을 배워서 풀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가족과 함께 잘 산다는 것. 어쩌면 ‘가족과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전제부터 틀린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살수도 있고 못살 수도 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가치관을 차근히 뜯어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아빠를 용서하고 싶은 시기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대학원에 간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성학이 내가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준 것임에는 분명하다.

 

내년에 대학원에 가려고 예정된 내 일정이 다 사라졌다. 이제 나는 무얼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지 큰 혼란이 왔다. 내 나이 스물아홉. 친구는 벌써 아이가 둘이다. 물론 난 결혼을 내 해방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결혼할 사람도 없으니 ‘취집’은 불가능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체 무엇을 하며 산 걸까? 아직까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조차 모른다. 드라마에서는 이 나이면 이미 자신의 일을 잘하고 있고, 몇 번의 연애 끝에 이제 결혼할 대상과 사귀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될 줄 알았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게 항상 꿈이었던 난, 돈을 벌어 여행을 하고 영어공부를 더 한 뒤에 영어와 관련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다. 비자를 받고 나서도 내가 다른 나라에 가서 몸을 쓰며 일할 수 있을까? 체력도 약한 내가 청소하고 식당에서 일할 수 있을까? 나이 서른에 이런 일을 하면서 헛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을까? 끊임없이 물었다. 일단 가보기로 결심했다. 안 되면 돌아오기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9월 16일자 호주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29년만에 처음으로 아빠에게 건 전화

 

올해 2월, 힐링드라마연구소 NOW에서 ‘힐링드라마 전문 과정’(내면의 안내자를 통해 고통과 질병의 원인을 찾고 자유로워지는 목적을 가진 프로그램)을 한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어 참여하게 되었다. 한 달에 한번 서울에 가는 일정이라면 힘들지 않았고, 드라마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날, 둥글게 모여 앉아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했다. 상처는 말로 내뱉어질 때부터 치유가 시작되듯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책임지려고 하던 내가, 우선 나를 먼저 생각하고 나를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나우(연구소 소장)는 ‘내가 변해야 다른 사람들이 변한다’라고 했다. 정말 내가 점점 변해가자 내 주변이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빠는 항상 엄했다. 나에게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가해자였다…. 이 말들을 분리해내면서, 나의 과거로부터 나를 분리해낼 수 있었다. 아빠를 보는데 더 이상 겁나지 않았다. 항상 무섭게 혼냈던 아빠(과거)를 난 지금도 끌어와 ‘혼내는 아빠’(현실)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나에게 살갑게 대해도 내 안에서 상처받은 나를 끌어안고 화만 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빠가 동사섭(同事攝. 행복 명상 프로그램)에 다녀온 후 너무 좋다면서 가족 전부가 가기를 원했다. 솔직히 드라마 과정으로 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아빠가 ‘너도 가서 바뀌어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싫었다. 내가 얼마나 우리 가족 안에서 참고 노력해왔는데 이제야 노력하는 아빠가 미웠다. 하지만 동사섭에 다녀온 후에도 여전히 아빠는 변하지 않았고, 차라리 ‘내가 동사섭에 가서 변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은 틀렸다. 그곳에 가서 내가 얼마나 아빠를 미워하고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난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아빠 때문에 여기에 왔어.(당시에 난 호주 워킹홀리데이 준비 때문에 상당히 바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그곳에서 아빠를 원망하는 내 마음을 바라보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나를 더 돌아보게 되었다.

 

참 신기했다. 주위에 도반들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연락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나 또한 아빠에게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처음으로, 29년 만에 아빠에게 한 전화였다. 사실 난 아빠가 동사섭 가는 버스 안에서 나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번호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때 아빠의 전화를 받고 그냥 퉁명스럽게 대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그것뿐만 일까? 그 동안 아빠가 나에게 따뜻하게 대할 때마다 아빠가 화를 내고, 나를 힘들게 했던 과거의 순간들 때문에 아빠의 마음을 못 본척했다.

 

그리고 아빠가 내가 변하길 원해서 이곳에 가라고 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정말 좋아서 이 좋은 경험을 나누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요즘 주변에 동사섭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내 마음을 보고 아빠를 보니 이제 알겠다. 나만 노력하고 나만 피해보고 있다는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부모님 가게 일을 돕는’ 생활의 애매함이란… 

 

▲ 현재 나는 부모님 가게 일을 돕고 있다.    © 이연(怡然) 
 

호주로 워킹홀리데이 갈 계획은, 건강이 안 좋아지면서 잠시 미뤄졌다. 현재는 부모님 일을 돕고 있다. 주위에서는 부모님 일을 도우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걸 보며 참 부러워한다. 나중에 이 일을 물려받으면 될 테니 먹고 살 걱정할 필요 없겠다고도 한다.

 

내가 가게에서 하는 일은 일정치 않다. 손님의 주문 사항에 따라, 하는 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그냥 무슨 일이든지 다한다. 요즘은 서류를 작성하거나, 엄마가 강의하실 때 필요한 강의안이나 자료들을 준비한다. 엄마는 컴퓨터가 서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터에서 먹을 점심을 준비하고, 가게를 본다. 일요일에는 혼자 가게를 보고, 엄마가 볼일 보러 갈 때에도 가게를 맡는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 손님이 오면 물건을 팔고, 엄마와 전화 연결을 해주고, 다음 약속을 잡으면 된다.

 

하지만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부모님과 시시때때로 트러블이 생기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완전한 독립을 꿈꾸지만 그렇게 될 수 없는 것 같은 느낌…. 가끔씩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부모님 눈치 보면서 포기하려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정작 부모님은 아무 말 하지 않지만) 짜증이 난다. 어떤 때는 ‘우리는 가족’이라는 말이 내 욕구를 덮고 참을성을 요구한다. 또, 주변에서 내 능력보다는 부모 덕택으로 산다는 듯이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도 나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최근엔 매주 금요일 서울에 강의를 들으러 간다. 수강료는 20만원이다. 수강료를 일시불로 입금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부모님의 지지가 필요했다. 제주에서 서울로 강의를 들으러 다니려니, 총 여섯 번의 강의에 부수적으로 드는 돈은 대략 150만원이다. 다른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초리를 견뎌낼 수 있는 건, 나의 의지와 엄마의 지원 때문이다. (예전에 여성학을 배우러 다닐 때 3백만 원 가량의 돈이 들었을 때는 주변에 말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더 가까운 곳은, 우리 동네에서 5분정도 걸으면 보이는 바다가 아니라 홍대입구이다. 과연 제주도는 낭만의 섬일까? 나에겐 삶의 터전이며, 고향이며, 때대로 예쁜 바다가 보이는 곳일 뿐. 제주도에서 왔다고 하면 대단하게 보는 시선들이 이제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비싼 비행기 값에 익숙해져야 하는 나에겐, 제주도에 산다는 것이 특권도 낭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나는 직장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고, 반려견(나무)과 함께 지내는 비혼(非婚) 여성이다.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사연이 있었고 나 자신을 계속해서 내려놓아야만 했다. 최근에 마음 공부를 시작했는데 선생님께서 ‘나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과 ‘나는 누구일까?’ 라는 질문은 다르다고 하셨다. 솔직히 이 말이 이해가 될 듯 말 듯하다. 하지만 이 질문은 나를 성장하게 하고,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질문임에는 틀림없다.

 

난 20대 때 ‘나는 무엇일까?’ 라는 고민을 수없이 해왔다. ‘이 세상에 왜 태어났고, 무엇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일까?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같은 질문들을…. 하지만 이젠 ‘나는 누구일까?’라는 고민을 시작한다. 언제 끝날지 모를 질문이기는 하지만, 안 끝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은 없어도 된다. 그저 시작만으로 값질 때도 있다. 나는 그저 언제나 내편인 사람과 함께 다행히,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 이연(怡然)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영문 번역기사 사이트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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