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작은 인형’에서 시작된 농촌여성들의 행진
<아맙이 만난 베트남 사회적기업> 마이 핸디크래프트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사회적 기업 ‘아맙’(A-MAP)이 베트남 곳곳에서 지역공동체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과 모임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마이 핸디크래프트 (Mai Vietnamese Handicrafts)

 

1990년에 설립된 마이-핸디크래프트는 농촌에서 수공예품을 생산하는 여성들과 연대하여 공정무역을 하고 있는 베트남 사회적 기업이다. 전국 21개 수공예품 생산그룹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수익금의 일부는 농촌여성들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환원하고 있다.
 

                       ▲    베트남 호치민시 떤빈군에 있는 마이-핸디크래프트     © 아맙  

 

희망을 찾아, 조용한 ‘마이’의 행진이 시작되다

 

그들은 담쟁이덩굴을 닮았다.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 만큼 화려하거나 요란한 치장은 없었지만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 앞에 서 있는 ‘벽’을 타고 끈질기게 기어올랐다. 담쟁이덩굴처럼 사람들의 손과 손을 이어가며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사람들이 마이-핸디크래프트를 알게 된 것도 그 어떤 유행이나 유명세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내일의 희망을 위해, 모두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더디지만 착실한 걸음을 이어가고 있는 그들의 행진 속으로 <아맙>이 찾아갔다.

 

구수정 (아맙 베트남 본부장. 이하 ‘수정’): 오래 전부터 마이-핸디크래프트(이하 ‘마이’)를 알고 있었어요. 1990년대 중반 제가 호치민시에 유학생으로 있었을 때, 외국인들 사이에서 마이가 판매하던 인형이 꽤 인기가 있었지요. 지금도 제게 마이의 이미지는 바로 그 인형이에요.

 

응웬 우인 프엉 (마이 핸디크래프트 마케팅 팀장. 이하 ‘프엉’): 맞습니다. 그 인형은 마이의 초기 활동을 대표하는 상품이에요. 가난으로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을 돕기 위해 판매했던 인형이죠. 당시에는 마이와 같은 활동을 하는 단체가 없었기 때문에 여행자들이나 외국인들에게 마이가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었을 것 같아요.

 

수정: 아마도 지금까지 저희가 방문한 단체 중에서 마이가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이 인형'에 대한 자세한 내막도 궁금하고, 마이가 언제, 어떤 배경 속에서 활동을 시작했는지 듣고 싶은데요.

 

프엉: 마이는 1990년에 작은 봉사단체로 출발했어요. 응웬 티 오안이라는 분이 마이를 만드셨죠. 그분은 외국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원래부터 사회 문제, 특히 빈곤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요. 당시 베트남은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였고 사회가 아이들을 돌볼 만한 여력이 없었지요. 거리에는 구걸을 하거나 노숙을 하고 잡상인, 소매치기, 불량배로 전락한 아이들이 넘쳐났어요.

 

그때 오안씨는 호치민시의 떤빈군에 살고 있었는데 해당 군청으로부터 거리의 아이들을 도와줄 수 없겠냐는 제의를 받아요. 오안씨는 주변의 지인들과 힘을 모아 마이를 창립해서 활동을 시작하지요. 마이는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을 설득하고 한자리에 모아 글을 깨우치게 하고 수공예품을 만드는 법도 가르쳐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했어요. 그게 아까 말씀하신 바로 그 인형이었고 마이의 첫 상품이기도 했죠.
 

                ▲ 처음엔 낯설고 필요성조차 못느꼈던 '공정무역'이 이제 그녀들의 소중한 벗이 되었다.  ©아맙 
  

수정: 현재는 마이가 수공예품을 생산하는 농촌 여성들과 함께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마이의 사업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 같네요.

 

프엉: 아이들과 함께 수공예품을 생산하는 마이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아동 노동’이라는 문제에 부딪혀 오래 지속할 수 없었죠. 그래서 아이의 어머니들을 모아 수공예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마이의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성들의 숫자는 겨우 5명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랬던 것이 조금씩 규모를 넓혀가고 농촌 여성들로 대상이 확대되면서 현재는 약 600여 명 가까이 되었고요.

 

“아동 노동이나 눈속임에는 단호히 대처했어요”

 

수정: 왜 이름을 '마이'라고 지으셨나요?

 

프엉: 첫 번째 프로젝트가 끝나고 저희가 가게를 내면서부터 마이(mai)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어요. 베트남어로 마이는 ‘내일’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더 아름다운 내일을 위한 희망'이란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어요. 그 밖에도 마이는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하는 꽃인 매화를 뜻하기도 하고 행운이라는 뜻의 베트남어 마이(may)와도 발음이 비슷해서 여러모로 좋은 인상을 주지요. 영어로는 또 마이(my)로 발음되어 외국인들에게는 'Mai shop'이 나의 가게(My shop)라는 뜻이 되어서 친근감을 주기도 하고요.

 

수정: 마이와 함께 일하고 있는 여성들은 주로 어느 지방에 살고 계신가요?

 

프엉: 베트남 전국에 마이의 회원들이 계신데 그 중에서도 남부 지방이 많아요. 가족 단위로 형성된 그룹이 12개, 소규모 공장 그룹이 6개, 일반 회사가 3개로 총 21개 그룹이 있어요. 그 중에는 100여 명이 넘는 그룹도 있고 10여 명에 불과한 소그룹도 있죠. 그들의 대부분은 농민이거나 어민이어서 농한기 때 또는 틈틈이 짬을 내서 수공예품을 만들어 부수입을 올리지요.

 

수정: 마이는 언제부터 공정무역을 시작하셨나요? 또 그 계기도 궁금합니다.

 

프엉: 약 10년 전부터 공정무역을 하게 되었어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에서 오신 손님들 덕분에 공정무역을 알게 되었지요. 그들은 우리 상품을 구매하러 온 고객이었는데 마이에게 처음으로 공정무역을 소개해 주었지요.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을 몰랐을 뿐 그 원칙들이 그동안 마이가 추구해온 이상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어서 우리도 적극적으로 공정무역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  마이 핸디크래프트 매장  내부 모습.  © 아맙  

 

수정: 마이가 공정무역의 원칙을 도입했을 때 생산지의 반응이 어땠나요? 공정무역 기준에 부합하는 상품들을 생산해내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프엉: 생산자들이 공정무역을 이해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요. 원료 선정, 환경 문제, 조합 구성, 아동 노동 금지 등의 원칙에 대해서 처음에는 약간의 반발이 있기도 했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깨끗하고 훌륭한데 무엇을 더 바꾸라는 거냐’는 식의 항의도 있었지요.

 

마이는 그들이 공정무역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갖고 대화를 하고 때로는 설득도 했어요. 그리고 생산자들에게 무조건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대신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상품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장비 공급,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 등의 지원을 했어요.

 

간혹 몇몇 그룹이 저희들 모르게 눈속임을 하거나 아동 노동을 쓰는 경우엔 단호히 대처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도 공정무역이 생산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안겨줄 뿐만 아니라 이 세계를 바꾸는 실질적 대안임을 이해하고 그 원칙을 준수하는 데 적응하기 시작했지요.

 

수정: 공정무역을 시작하게 되면서 마이 내부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프엉: 1990년대까지만 해도 마이는 회계, 기록, 재고 관리 등 운영적인 측면에서 전문적이지 못했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어요. 공정무역을 하게 되면서 조직 운영을 보다 전문적이고 투명하게 바꿀 필요가 있었어요. 공정무역 상품의 주 고객이 유럽, 미국 등 해외 시장이라 영어도 습득해야 했지요. 그래서 직원들에게 필요한 전문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학습의 기회를 주고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들이 조금씩 성장하면서 마이도 함께 발전했어요. 브로슈어, 홈페이지 제작, 상품의 디자인 등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작업들 모두 마이의 직원들이 만들어낸 것이죠.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  마이 핸디크래프트는 회원들에게 상품 디자인, 생산, 기술과 관련된 유용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 아맙 
 

수정: 많은 사회적기업들이 외부 전문가나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데 마이는 좀 다른 것 같네요?

 

프엉: 저희는 일부러 외부 전문가를 초빙하거나 자원봉사자를 조직하지는 않아요. 우리 능력에 맞게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조직을 발전시켜왔어요. 우리는 마이가 아주 유명해지거나 급속도로 성장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홍보나 마케팅에도 최소의 비용만 투자하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어떤 유행이나 트렌드가 있다 해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그저 저희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요.

 

가끔 마이에 새로운 상품 모델이나 디자인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있는데 그분들과 끊임없는 대화와 소통을 통해 그들의 요구를 기존의 디자인에 반영하고 개선하는 정도의 변화를 추구하지요. 왜냐하면 생산자들에게 계속 새로운 모델과 디자인을 들이밀고 거기에 적응하도록 강요하는 것도 그렇지만, 유행을 쫓다가는 생산자 그룹에게 안정적인 물량을 공급하기가 어려워져요.

 

마이는 생산자 그룹의 규모를 늘리고 몸집을 불리기보다는 현재의 생산자 그룹에게 안정적인 물량을 공급하면서 지속 가능한 거래가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하지요. 현실은 그것만으로도 힘에 벅찰 때가 많거든요.

 

수정: 마이는 수공예품을 주로 생산하고 있는데, 마이가 취급하는 모든 상품이 공정무역인증을 받은 건가요?

 

프엉: 마이는 2008년 7월에 세계공정무역기구(WFTO)로부터 공정무역 인증을 받았어요. 마이가 취급하는 모든 상품은 공정무역 인증을 받은 제품입니다. 공정무역 원칙을 준수하지 않는 그룹과는 단호하게 거래를 끊기도 하고 저희 내부적으로도 엄격한 품질 기준을 적용해 관리하고 있지요.

 

수정: 마이의 수익금은 생산자들을 위해 어떻게 쓰이고 있나요?

 

프엉: 수익금의 50%는 신모델 개발, 상품 디자인, 시설 확충 등에 재투자되거나 조직 운영에 필요한 발전 기금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마이와 일하는 생산자 조직을 지원하는 활동에 수익금의 30%가 사용됩니다. 또한 생산자 여성들에게 사회보험을 보장해주는 차원에서 수익금의 10%를 환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엄밀히 말해 마이의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생산자를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에서 마이가 매년 일정 금액을 적립해 지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0%는 마이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인건비로 충당하고 있고요.

 

수정: 방금 말씀하신 생산자 조직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프엉: 생산자들이 보다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각종 시설이나, 설비 및 장비들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생산자들이 이 모든 것을 자체 조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마이가 지원을 합니다. 먼저 수공예 작업장 특성상 먼지가 많기 때문에 진공청소기나 물 분사 장치 등의 설비를 지원합니다. 그리고 위생 화장실 건립, 바닥에 타일 깔기 등의 시설 지원도 하고 생산자 자녀들을 위해 장학금도 일부 지원합니다.

 

이러한 지원들은 사실 생산자들이 마이와 함께 공정무역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생산자들이 공정무역 원칙을 지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마이와 생산자가 함께 노력하는 거죠.

 

농촌여성들과 천천히, 꾸준히 성장해온 시간
 

▲  21개 그룹  6백여 명의 마이-핸디크래프트 회원 분포도.  마이의 조용한 행진은 베트남 전국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 아맙 
 

수정: 마이도 외국인 고객들이 많을 것 같은데 주로 어떤 나라들과 거래를 하고 계신가요? 혹시 한국인들도 있나요?

 

프엉: 주로 네덜란드, 이탈리아, 미국, 영국, 프랑스의 소비자들과 거래를 하고 있어요. 아시아 쪽은 부진한 편입니다. 아무래도 아시아 국가끼리는 같은 문화권이라 수공예 상품들도 비슷비슷해서 그다지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국제 공정무역 상품 박람회에서 마이에 대한 유럽 소비자의 반응이 뜨거웠던 반면 아시아인들은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당시 박람회에는 한국 소비자들도 많이 찾아왔는데 마이 제품의 구매율은 낮은 편이었어요. 최근 한국의 페어트레이드-코리아가 마이 제품을 구매하기도 했는데, 바구니, 대나무 그릇 등의 상품에만 주목했지요.

 

수정: 그동안 마이도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을 텐데 현재 가장 큰 고민거리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프엉: 마이의 가장 큰 고민은 생산자들에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해주면서 동시에 소비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는 문제입니다. 마이는 지금껏 큰 욕심을 부리거나 무리한 경영을 하지 않고 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사업을 진행했어요. 한 제품의 오더가 끊기면 그 생산자 조직의 존립까지 위협하게 되지요. 그럴 땐 근심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할 지경에 이르지요.

 

따라서 마이는 눈앞의 큰 이익이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생산자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천천히 변화를 모색하려고 합니다. 마이가 특별히 화려하거나 눈에 띄게 돋보이는 단체는 아니지만 농촌 여성들과의 연대를 꾸준히 늘려오면서 성장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도 마이는 그렇게 조용한 행진을 계속할 것입니다.

 

*기록 정리: 권현우 (아맙 마케팅 팀장) / 쯔엉 콩 안 부우 (아맙 마케팅 팀원)

 

<아맙> 카페: http://cafe.daum.net/doanhnhanxahoi  연락처: 070-7554-5670 (베트남 사무소)

<아맙> 후원 계좌: 신한은행 110-313-503660 (예금주: 김규환)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영문 기사 사이트> 가기 ildaro.blogspot.kr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