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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을 겪는 게 우리 아이가 마지막이길…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희생자 유족들과 함께 
 

 

 

7월 19일, 광화문에서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보았다. 주말이라 바닥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어린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 놀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놀랐다. 다리를 모아 안고 묵묵히 굳어 있는 유족 뒤에는 옷이 젖은 아이들과 휴일을 즐기는 그 아이들의 부모가 있었다. 

 

▲  2014년 7월 19일 광화문 ©안미선 
 

이전에 지역에서 세월호 유족과의 간담회가 있었을 때 간 적이 있다. 전국을 돌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서명을 받은, 그을린 얼굴의 유족은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수 없다 했다. 고통스러워서 말문을 닫은 그들을 보고 그제야 주최 측은 아이들을 그 자리에서 내보냈다.

 

겪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안다고 생각해도 전혀 모른다. 남의 말이 고통을 당한 당사자에게 갈 때 그것이 격려든 위로든 다짐이건 간에 상처가 될 수 있다. 침묵하고 듣지 않으면, 말이 사라진 자리에 있는 몸짓과 눈빛을 듣지 않으면, 말이 아니라 함께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끝없는 상처다.

 

그 유족들이,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들이, 꼬마들이 깔깔대며 물을 흩뿌려대는, 그 부모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거침없이 큰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거나 웃고 있는 그 자리에서 단식을 하고 있다.

 

“자식이 죽었는데 그 이유를 몰라서, 그 이유를 알게 해달라고 전국으로 서명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자식이 죽어서 진상 규명을 부모가 합니다.”

 

잇대어진 그 두 개의 풍경을 보고, 유족들이 견뎌내고 있는 시간과, 그 압도하는 고통 속에서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의 절실함을 생각한다. 광장에서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습니다! 올바른 진상 규명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주세요!”

 

횡단보도를 바쁘게 지나는 행인들에게 외친다. 어떤 이들은 서명을 하고, 더 많은 이들은 지나쳐간다. 이곳이 길목이기 때문이다. 길목이기 때문에 상처받지만, 길목이기 때문에 떠날 수 없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 서명에 참여한 마음들 

 

▲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    © 안미선 
 

나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잠시 받고 다녔었다. 지방의 버스휴게소였고, 서명지를 들고 다니며 서명을 부탁했다.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거나 혹은 멈추지 않았지만, 내가 그날 만난 이들 중에는 걸음을 멈추는 이들이 더 많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앞만 보고 스쳐 걸어가던 한 젊은 엄마는 ‘세월호’라는 말에 걸음을 단박에 멈추고 대뜸 “고맙다”고 했다.

 

“서명을 하고 싶었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서명할 데가 없더라고요. 진상이 밝혀졌으면 좋겠어요.”

 

대부분은 말없이 서명을 했다. 친구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던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도 잔을 내려놓고 이름과 주소를 써내려 갔고, 꽃이 예쁘다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연인들도 꽃에서 눈길을 돌려 이름을 번갈아 썼고, 담배를 피우던 손을 쉬고 서명을 했고, 그리고 빗자루를 들고 일하러 가던 청소노동자도 쭈그려 앉아 서명을 했다. 땅에 내려진 그 빗자루를 쳐다보았다. 일하던 사람이 일손을 놓고, 대화하던 사람이 말문을 닫고, 웃고 있던 사람이 웃음을 거두고 서명하는 이 시간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했다.

 

한 줄의 서명 속에 들어 있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의 긴 생애다. 그들이 세월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과 특별법 제정에 뜻을 같이 한다고 이름을 적기까지 어떤 경험과 생각을 했을까?

 

땡볕 아래 쭈그리고 마치 귀한 편지를 쓰듯이, 정성을 기울여 한자, 한자 이름을 쓰던 청소부는 “글씨를 잘 못 써서요.” 하고 쑥스러운 듯 자신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힌 서명지를 돌려줬다. 기억하는 것도 사람들일 게다. 바다가 이전의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도 사람들이고, 침몰하는 배 앞에서 국가가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봐버린 것도 사람들이다.

 

그 바다를 바라봐야만 했던 유족들이 묻는다

 

7월 초, 팽목항에 간 날은 비가 내렸다. 침묵이 느껴졌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함께 간 일행은 손을 모으고 조용히 걷고 있었다. 항구에는 글씨를 쓴 노란 리본들이 빼곡히 덮여 있었다. “열심히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 리본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바다를 향해 난 제단에는 촛불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비에 젖어가는 그 흰 상 위에는 분홍색으로 바래가는 초코파이 통이 있고, 푸른 금이 그어져가는 참외가 있었고 물크러지는 꽃다발이 있었다. 그러나 시든 갈색 줄기 끝에 매달린 꽃송이는 그 빛을 간신히 잃지 않고 있었다. 난간 사이에는 블루베리가 가득 담긴 플라스틱 도시락통, 운동화 한 켤레, 그 신발 속에 담긴 보온팩, 잘 개켜진 옷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일행은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마침 문화행사가 있어서 참여했고, 북소리 속에서, 혼을 부르는 춤사위 속에서 앞에서 하는 말을 따라 해 목이 터져라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불렀다. “진도에서는 굿을 할 때 비가 오면 혼이 감응해서 내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 한마디에 하늘에 내리는 비조차 차갑지 않고 황감하게 느껴졌다. 

 

▲  2014년 7월 19일 오후 5시, 서울 시청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    © 안미선 
 

“아직도 아이를 만날 수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한 번만 안아봤으면 좋겠는데… 알면 알수록 아이가 살 수 있었던 그 기회들을 모두 잃었다는 게 가슴 아프고 이해가 되지 않아요. 특별법 제정을 꼭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요. 진상 규명이 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게 우리의 바람입니다. 도와주세요. 이런 일을 겪는 게 우리 아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7월 19일 오후 5시, 서울 시청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범국민대회’에서 유가족이 한 말이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싸운다. 자신의 아이가 마지막 희생자이기를 바라는 특별법 제정을 위해서 싸운다. 왜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싸운다.

 

이 일이 끝나면 죽은 아이를 다시 만날 것 같은데, 이제 영영 볼 수 없다는 게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가족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 바다를 지켜보아야만 했다. ‘자식이 죽은 걸 전세계가 상영하는 가운데’ ‘떠오르는 시신을 건져내고 지켜보아야 했던’ 부모가 묻는다. “내 자식이 왜 죽어야만 했나?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지, 하지 않았는지 한 톨도 남김없이 알고 싶다.” 그 집회 자리에서 자식들의 핸드폰에 남겨진, 물이 차오르는 선실의 동영상과 마지막 외침들이 다시 공개되었다.

 

안전하고 노동이 존중되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상상할 수 있었더라면, 인간의 존엄을 받아들이는 사회였다면, 저 분노와 공포에 찬 비명을 듣고서야 멈칫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듣고 들어온 비명을 새로운 것인 양 듣고, 감히 또 듣고 듣겠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날 경찰은 오전에 경복궁 일대에서 예정된 ‘4․16 청와대 행동’ 일인시위들을 하지 못하게 둘러싸 일부만 계획한 일인시위를 할 수 있게 만들었고, 광화문 일대를 전경차로 외벽을 쳐놓았으며, 집회 참가자들의 행진 길목을 차단해 참가자들이 유가족과 만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말했다. “여러분은 문화행사를 빙자한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도로를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습니다. 법에 따라…”

 

‘앞만 보고 가라’는 말에 순응했던 시간과 작별하라 

 

▲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위한 행동에 함께해야 한다.  ©안미선 
 

나는 꿈 생각이 났다. 꿈에서 밤이었고 사람들은 도로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로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비 오는 밤, 검은 젖은 도로에서는 피 얼룩이 선명하게 배어 나와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그 도로를 뛰어가며 고함을 치다가 깨어난 후 얼마나 소스라쳤던가. 그건 이 도로였다. 우리가 열심히 살았고 달렸던 도로, 그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도로, 하지만 이제 도로를 점령하는 것이 씽씽 잘도 굴러가는 차 바퀴나 곁눈 주지도 않는 숨가쁜 발자국이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그날 함께 행진을 하는 군중은 작별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지난 시간에 대해. 나도 작별하고 싶었다. 시키는 대로 학교에서 공부하며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인정사정 없이 앞만 보고 가라고 하는 말에 순응했던 때, 남들 가지는 거 다 가지기 전까지는 불행하니 또다시 경쟁하라는 부추김을 받았을 때,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 해도 남들 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그게 제일 안전하다고 눙쳤던 때, 열심히 만든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압박을 받았을 때 그 앞에서 바보처럼 끄덕이며 판판한 도로를 열심히 달렸던 나의 시간과 작별하고 싶었다.

 

‘열심히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렸으므로 작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별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자신도 없다. 침묵하는 그 바다 앞에 가서, 우리가 그동안 했던 모든 말을, 근대화에 성공했다며 자축하던 말을, 학교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하던 그 모든 말들을 해보라. 감히 할 수 있다면 해보라. 그 말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는 말이 세월호의 침몰과, 일어났던 일을 설명할 수 없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 말을 틀어쥐고 놓지 않는 이들의 철옹성 같은 체제 수호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우리가 그 도로를 시키는 대로 달리며 했던 말들이 얼마나 앵무새같이 덧없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은폐된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단단하게 어깨 겯고 요구하며 광장에 쏟아져 나와야 하는지 알게 된다. 슬퍼서라도 두려워서라도 감히 또 행복을 바라서라도 ‘유족이 참여하는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되는 특별법을 위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나와야 한다.

 

그래야 입을 굳게 다물고 단식하는 어른과, 그 뒤에서 물보라를 맞으며 웃음을 터뜨리는 어린이의 풍경이 하나의 풍경으로 펼쳐진다. 분리된 세상, 비수 같은 풍경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 전해주는 선물이 된다. 부디 길목에서 걸음을 멈추고, 이 이상한 풍경이 영원한 상처가 되지 않게 사람들이 함께했으면 좋겠다. 바다보다 더 큰 슬픔을 강탈당하지 않게 지켜내는 것도 사람이고, 죽은 사람을 기억해 영원히 살려내고야 마는 것도 사람이다. 사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 안미선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http://www.ildaro.com <영문 사이트> http://ildaro.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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