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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버스정류장] “가장 행복한 날들을 위한 산책” 

※ 경북 상주시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님은 <빈집에 깃들다> 저자입니다. 이번 칼럼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 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www.ildaro.com 

 

▲  카페 버스정류장에서 3월 22일부터 열린  <낯설다> 전시회 포스터.   © 박계해 
 

이른 아침, 푸짐한 햇살과 산들바람이 전날의 비로 인한 눅눅함을 부지런히 걷어내고 있었다. “날씨가 한 부조 하네!” 감나무 위에 올라가 전지를 하던 옆집 아저씨가 덕담을 건넸다.

 

나는 정운이 어제 퇴근길에 직접 배달해 온 네 개의 화분을 현관 입구에 늘어놓으며 또 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화분에는 축하메시지가 적힌 리본이 매달려 있는데, 각각 ‘희양분교 참교육 학부모회’, ‘희양산 탈핵농민회’ 등 유령단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이 화분들을 ‘재활용 축하화분’이라고 했다. 직장에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화분들을 이번 행사를 위해 잠시 빌려온 거라고.

 

한 마을에 귀농해서 살고 있는 다섯 명이 농사 틈틈이 그림공부를 하고 그 결과물을 발표하는 자리인 이번 <낯설다> 전시회에는 그의 아내 연숙도 참여했다. 그는 난생 처음 전시회라는 걸 해보는 아내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했다. 장미꽃 향기를 맡아보는 사십대의 연숙은 이십대 마냥 싱싱하고 예뻤다.

 

내겐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연숙은 민간요법에도 능하고 요리 실력도 뛰어나 “장금이”란 애칭을 갖고 있는데, 농사 일도 열사람 몫을 거뜬히 해내는지라 무슨 일을 하던 그녀만 있으면 든든해진다. 그런데 막상 그녀는 자존감이 거의 바닥이어서 자신을 들볶는데 기운을 소진하곤 했다.

 

언젠가 우리는 성신여자대학교 총 동창회 바자회에 참여했다. 역시 같은 마을에 귀농한 문희가 그 학교의 졸업생이어서 농산물 판매 공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판매를 시작하고 두어 시간 쯤 지나서 우리는 그녀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첨에는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거니 했으나 집에 돌아갈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자 모두들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다가 파장 즈음에야 나타났다. “오마나, 시간이 요렇게 되부렀네. 으째쓰까나.” 퉁퉁 부은 눈으로 눈웃음을 치며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그녀의 입에서 술 냄새가 훅 끼쳐왔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부렀어. 오월은 참 햇볕이 미치도록 좋아. 그래서 한 잔 해부렀어.” 

 

▲  연숙의 작품  <가장 슬펐던 날들을 위한 산책> 중 첫번째 그림 
 

그날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은 집으로 돌아오고도 며칠이 흐른 뒤였다. 우리는 발을 냇물에 담근 채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언니, 나는, 내 이십대는 반월공단에서 공장과 자취방을 왔다 갔다 한 것이 다였어. 햇볕도 못 보고 맨날 누렇게 떠서. 정운씨도 그랬고, 내 친구들도 그랬어. 그런데 그날, 그 애들은 너무 예뻤어. 그렇게 다리를 드러낸 짧은 치마를 입고 귀걸이를 달랑거리며 핸드백 메고 대학교를 다니는 그 애들. 나는 그렇게 싱싱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난, 처음부터 버려지고 시들어진 존재였어. 언제까지나 그래. 나는.”

 

그날 그 애들은 너무나 눈부셨다고, 그래서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오월의 햇살아래를 거니는 그 젊음들은 과연 찬란해서 우리 모두 감탄사를 늘어놓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은 많지만 하지 않았다. 다만 진심으로 생각했다. 네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너만 모른다, 고.

 

연숙의 작품은 자신의 슬픈 역사를 열두 쪽의 그림으로 정리해 낸 것이었다. 제목은 <가장 슬펐던 날들을 위한 산책>인데 “다섯 살 때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로 시작되었다. 암흑 속에 남은 아기의 슬픔을 표현한 그 첫 번째 그림에서 사람들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안다. 그녀는 이제 그 아기를 안고 ‘가장 행복한 날들을 위한 산책’을 시작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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