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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버스정류장] 친구와 함께 보낸 겨울날
※ 경북 상주시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님은 <빈집에 깃들다>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그녀는 언제나 예쁜 옷과 립스틱과 매니큐어로 단장을 하고 온다. 곧 촬영을 앞둔 모델 같다.
“이번에는 내 차례네요.”
우리는 언제나 카페라떼를 마신다. 한번은 그녀가 사고, 한번은 내가 산다.
그녀가 혼자 쭈뼛거리며 현관문을 들어선 것은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어느 길목이었다. 그녀는 ‘친구 없이 혼자 오는데 용기가 필요했다’며 웃었다. 나는 ‘아이구, 용기까지 내셨어요? 오늘은 제가 친구가 돼드릴게요’ 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왔다. 우린, 처음에 서로의 과거(?)를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책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식과의 관계에 대해, 돈의 쓸모에 대해,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아, 너무 좋아요. 이런 얘기. 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니, 너무 좋아.”
사실, 친구랑 나누는 이야기의 내용이 싫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 싫다, 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만남의 반복이 이어졌고 드디어 지치고 말았다고.
▲ 꽃다발 위 그녀가 준 한지공예 접시 © 박계해
나도 좋았다. 그녀는 교양의 정도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나와 잘 맞는 사람이었다. 이야기 나눌 게 없을 땐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들으면서 과자를 먹기도 하고 각자 말없이 책을 읽기도 했다.
그녀는 칵테일을 좋아한다며 나에게 칵테일을 팔아볼 생각은 없냐고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말 나온 김에 우리는 어떤 칵테일이 좋을지 머리 맞대고 연구를 하기도 했다.
둘이 놀다가 손님이 오면 나는 차를 만들고 그녀는 서빙을 했다. 손님이 많으면 그녀도 바빠졌다. 그 모든 게 참 자연스러웠다.
어느 날 그녀는 한지공예접시를 선물로 가져왔는데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는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 다른 작품들을 보여주면서 한때 자기가 만든 것들이라고 했다. 오직 한지로만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아주 커다란 서랍장도 있었다.
“취미로 한 게 아니라 생계 수단이 될까 싶어서 열심히 했어요. 한복점에서 치마폭에 그림 그려 넣는 일도 했는데 다 수입이 변변찮아서 먹고 살기 어렵더라고요.”
그녀는 그림을 좀 그리는 편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길고 예민하게 생긴 손가락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옷을 좋아해서 옷가게를 한 적도 있는데 잘 안됐다고 했다. 나도 옷가게를 한 적이 있었으므로, 우리는 옷가게를 하는데 따르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싸가지 없는 손님에 대해서도, 고마운 손님에 대해서도.
카페에 어떤 손님이 들어서자 얼굴이 굳어진 적도 있었다. 내가 그를 좋게 평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니 저 사람이 다시 보이네’ 라고 했다.
“우리는 저 사람을 재수 없어해요. 모두 싫어하죠.”
그녀의 직업은 캐디. 나는 그녀와 동료들이 재수 없어 한다는 사람이 다시 보였다. 알고 보면 그는 분명히 재수 없는 사람일 것 같았다.
이 직업을 그녀는 감사하게 생각했다. 푸른 초원을 걷는 일은 건강에 좋다고. 사실은 그녀가 겪은 어떤 직업보다 수입이 나았으므로, 무엇보다도 더 나은 다른 길이 아직 보이지 않으므로.
“대단해요. 어차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마음먹는 게 낫죠.”
오래전에 나도 그녀가 일하는 곳에 원서를 낼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했던가.
“고맙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원에도 보내고, 나를 위해서도 투자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니까요.”
그런 얘기를 할 때 그녀는 유난히 밝고 자부심에 찬 태도를 보였지만 어딘가에 통증을 느끼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동안 그녀가 오지 않기에 오늘은 전화를 했다.
“아줌마! 뭐예욧! 당신이 찻값을 낼 차롄데!!”
“봄이 왔잖아요. 당분간은 차 마시러 못갈 것 같아요. 일 마치고 나면 파김치가 되어버려서. 호호호, 그래도 이렇게 혼나니까 좋다아~.”
그제야, 책이며 영화를 볼 수 있고 카페도 갈 수 있는 겨울이 좋다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도 날이 풀려야 수입이 나아지니까 봄이 와야 한다던 말도.
봄이 왔다. 찌르르한 통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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