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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역사]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어요” 
 
75년전, 일제에 강제이주 당하고 사할린에 억류된 한인의 삶과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연재.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ildaro.com
 
우리 문화를 지켜왔지만, 그 흔한 한국달력이 없어
 

▲사할린 한인 집에 걸린 한 장의 음력달력 ©최상구 
 
작년 1월 사할린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기사 “석탄의 도시에서 만난 고령의 한인여성들” 참조) 한 사할린 한인 동포의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집안을 둘러보다 한 장의 종이에 눈길이 머물었다. 현지 우리말 신문인 <새고려신문>의 한 면에 열두 달치의 음력 날짜를 모두 적어둔 음력 표시 달력이었다.
 
사할린 한인들은 자신의 생일을 비롯해 부모의 생신과 기일 등 가족 관계에서 기억할만한 날들을 대부분 음력으로 알고 계신다. 일제시대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소련 시절에 우리 음력을 별도로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사할린 한인들이 지켜온 전통 문화는 다른 지역 한인들의 문화보다(심지어 한국인들보다도) 원형에 가깝다. 무국적자의 신분이라 섬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중앙아시아에서 파견 온 고려인들의 경우에는 이미 ‘소련화’되어 있었다.
 
과거에는 결혼도 주로 한인끼리 했던 터라, 신부의 집에서도 신랑의 집에서도 며칠씩 잔치를 했다. 지역 한인들이 맘 놓고 모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3년상을 지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온다. 3년 동안 집안에 영정 사진을 모셔 놓았고, 이 시기에는 결혼이나 이사 등도 피했다고 한다.
 
이런 분들에게 음력이 표시된 달력은 참 요긴한 물건이다. 그러나 그곳은 러시아. 한국에서는 차고 넘치는 달력들이 그곳에선 구할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이다. 그래서 2012년 초 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 사할린 현장을 방문했을 때 한국 달력을 들고 가기도 했다. SNS를 통해 여기 저기서 보내준 음력 표기 한국 달력을 현장 방문단 개인들이 짐과 함께 가져갔다. 당연히 개인 짐은 최소화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게가 초과되어 수화물 수수료를 물게 되었다.
 
2013년에는 재외동포재단에서 제작한 달력 3백 부를 현지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현지에서 음력 달력이 필요한 한인 1세분들은 약 천여명에 달한다. 이때도 현장 방문시 약 150여부를 짐속에 넣고 출발했다. 그러던 중 동포 분의 한 집에서 본 그 한 장의 음력 달력은 가슴 한켠에 깊이 남게 되었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에도 불구, 달력을 만들다
 
작년 8월, KIN(지구촌동포연대)에서 하반기 사업을 논의하던 중 <네이버 해피빈>에서 연락이 왔다. 광복절을 중심으로 역사 관련 단체들의 이슈를 메인 화면에 올린다고 했다. 가슴 한켠에 남아 있던 그 달력에 대해 논의하던 차라, “해보지 뭐”하는 도전 정신으로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제작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네이버 해피빈>에서는 하루 하루 콩이 모이기 시작했다. SNS를 통해 해피빈 모금 소식을 전하였고, <희망제작소>의 ‘휴먼트리’가 운영하는 모금전문가 학교의 “함께하는 모금사업” 공모에도 신청했다. 2009년 개교한 모금전문가 학교에선 모금 관련한 이론 교육뿐 아니라 팀별 실습을 통해 직접 모금 활동을 한다. 이 모금 활동의 실습 대상이 바로 “함께하는 모금사업” 공모에 응모한 시민단체들이다. 단체들이 제안한 모금 프로젝트를 팀별로 실습하는 것이다.
 
턱걸이로 채택된 달력 제작 프로젝트를 위해, 모금전문가 학교 9기 실습생들이 거리캠페인, 인터넷 클라우딩펀드, 기업 사회공헌팀 제안 등 대대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기대했던 ‘기업 사회공헌팀’은 이미 1년 예산 집행이 결정된 시점에 찾아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11월 즈음, 소요 예산의 약 10%가 모금된 가운데 달력 제작을 놓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라 했던가? 우리는 자체 모금을 실시하고, 예산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달력 제작업체의 단가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보다 저렴한 예산으로 달력을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항공운송도 비용이 훨씬 저렴한 국제우편EMS로 바꾸기로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만큼 과정상 파손 등의 훼손이 걱정되었지만 주사위를 던져보기로 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에 들어간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가 임재천씨 작품. 
 
예산 문제로 달력에 사진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도 고민했다. 그래도 고국의 산천을 그리며 일생을 살았던 분들에게 그 풍경이라도 볼 수 있도록 사진이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일반 달력 제작업체가 가지고 있는 풍경 사진보다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고국의 모습이 드러나는 사진을 담고 싶었다.
 
때마침 사할린 한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진작가 한 분이 재능 기부을 해줄 사진가 임재천씨를 추천하였다. 마침 임씨의 사진집 <한국의 재발견>이 출간되어 출판기념회 날 찾아갔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달력에 쓰일 50장의 사진을 받았다. 남원 광한루, 경남 산청, 안동 하회마을, 강원 정선과 양양의 오일장 등 고향의 풍경을 담은 사진 12장을 골랐다.
 
자, 이제 달력은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럼 어떤 달력을 만들어야 할까? 러시아 달력에 음력을 표시하는 것이 기본 방향이었다. 2014년 러시아 달력은 한인 3세 인유라씨가 구해주었다. 휴일 등의 표기가 해결되었다. 여기에, 절기와 한국의 국경일도 함께 표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 절기와 국경일을 써놓기만 하면 과연 한인들이 알 수 있을까? 더욱이 손주들이 봤을 때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절기와 민속명절과 국경일에 대한 설명을, 정보를 검색하여 정리했다. 그런데 한글을 모르는 한인 3세들도 보는 달력이기에 번역이 필요했다. 번역은 영주 귀국하신 동포 인무학씨가 맡아주셨고, 감수와 수정은 작년 1월 사할린에 동행했던 홍웅호 교수님이 도와 주셨다.
 
달력을 디자인, 제작하는 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까만 건 글자’인 끼릴어는 어디가 띄어쓰기인지조차 헷갈렸다. 한국 달력에 익숙하다보니 자꾸 추석과 12월 25일이 빨간 날로 표기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에서 지내는 성탄절은 양력 1월 7일, 사할린 한인들의 추석은 양력 8월 15일이다.) 달력의 무게도 세심하게 고려해야 했다. 항공운송과 국제우편 EMS는 무게에 따라 요금이 달랐기 때문이다. 수백만원에 달하는 금액이니, 무게를 줄이는 것도 필수였다.
 
달력이 제작되는 동안 KIN(지구촌동포연대) 회원들에게 모금 요청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사할린 희망 캠페인단’ 소속 단체들에게도 요청하고,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모금 소식을 올렸다. 이 소식을 접한 해외 동포들도 정성을 보태기 시작했다. 멀리 독일의 동포부터 재일동포, 재한 조선족 동포들도 동참했다. 또, 재외동포 NGO 대회에 참가하는 등 교류가 있었던 일본인들도 모금에 동참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한겨레신문>에서 관련 기사를 했다. 말미에는 모금 계좌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약 1천5백여명이 성금을 보내왔다. 여기에 재외동포재단의 지원금이 포함되어 ‘과연 가능할까?’ 싶었던 달력 제작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의 진정한 의미 

▲ KIN(지구촌동포연대)가 제작한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표지  
 
완성된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은 사할린주 한인협회를 통해 배포될 예정이다. 각 지역 한인회가 이 자그마한 동포들의 정성을 전달할 것이다. 그리고 1월 14일부터 21일까지 일주일 간 필자를 비롯한 ‘현장 방문단’이 사할린 현지에서 1세분들에게 직접 달력을 나눠드릴 예정이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노인정에서부터 북위 50도 근처의 보쉬니아코보까지 국내외 동포들과 시민들의 마음이 ‘한땀 한땀’ 담긴 이 선물을 드리고, 1세분들을 인터뷰하고 실태를 확인하려 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목표한 바는 달력 자체가 아니다. 달력을 만들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할린 동포들을 한번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또 사할린에 살고 있는 1세분들은 그리운 동포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음을,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음을 느꼈으면 했다. 이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한인들의 안녕을 살피고, 돌아와서 사할린 한인들의 역사와 실상을 알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해마다 달력이 필요한 한인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해마다 이들을 기억하는 수는 늘어나길 바란다. 그것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이다.  ▣ 최상구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세상에서 하나뿐인 달력’ 모금에 참여해주신 1천5백여명의 국내외 한인들의 마음과 정성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재능 기부로 달력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공휴일을 파악해 알려준 사할린 동포 3세 인유라씨, 번역을 맡아준 인무학 ‘전국 사할린 귀국동포단체 협의회’ 부회장님, 달력 시안의 끼릴어를 꼼꼼히 살펴주신 홍웅호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교수님, 고향 산천의 풍경 사진을 제공해주신 임재천님과, 소개해주신 김지연 사진가님 고맙습니다. 달력 디자인은 물론 무게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주신 (주)크리에이티브 다다의 제작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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