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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미니즘>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의 필자, 윤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대안담론을 만드는 기획 “나의 페미니즘” 연재를 마칩니다. 이 기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www.ildaro.com
 
이혼 후 20년만에 어머니가 꺼내주신 저고리

"어! 이게 여기 있었어요?"
며칠 전 어머니댁을 방문한 날, 어머니는 내가 결혼할 때 시댁에서 선물로 받은 저고리 하나를 내미셨다.
"하지만, 저고리뿐이구나! 치마는 없어…"
어머니는 치마가 없는 것이 못내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자주색 옷고름이 달린 초록 저고리를 건네셨다.
"이걸 여태 가지고 계셨어요?"
저으기 놀라, 저고리를 받아드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예뻐서. 너무 곱지 않니? 네가 바느질을 잘 하니까, 이걸로 뭘 만들어 보든지…" 
 
이혼하면서 친정으로 부쳐온 내 살림살이들이 그랬다. 책들도, 옷들도, 여러 가재도구들은 이것저것 짝이 안 맞는 것 투성이었다. 살뜰하게 짐을 챙겨 보낼 사람도 없었지만, 누가 그러고 싶었을까 싶어서 그냥 보내온 대로 받아들었다. 쓸 수 있는 건 쓰고 짝이 안 맞아서, 또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것들은 그저 외면하고 살았다. 어떤 것은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세월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는 내게 이런 물건의 존재를 드믄드믄 인식시켜 주셨다. 아이를 업을 때 썼던 포대기와 돐 때 선물로 받은 아이의 도자기 밥그릇과 국그릇을 잘 간직했다가 주신 분은 어머니었다. 그리고 다시 저고리를 슬며시 내민 것이다. 이 저고리의 존재를 다시 확인한 것은, 이혼 후 꼭 20년 만이었다. 몇 번 입다가 쳐박아 놓은 그대로, 당시에 묻었겠다 싶은 옅은 얼룩은 세월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깊은 얼룩으로 선명해져 있었다.

이혼 직후 이런 걸 내게 쥐어줬다면, 진작 쓰레기통에 쳐박혔을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나, 조금씩 조금씩 내 손에 들어온 것들은 그때마다 지난 추억을 반영하는 기념품들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아픈 기억들 저편에 존재했던 진정으로 아름다웠던 추억들이 오롯이 되살아난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어쩜, 어머니는 벌써부터 그걸 알고 계셨는지 몰랐다. 그래서 이런 자잘한 것들을 없애지 않고 모두 간직하고 계셨다가, 내가 그것을 이해할만할 때 쯤 하나씩 하나씩 꺼내놓으시는지도 모르겠다.
 
'결혼과 출산, 이혼 경험은 내 인생에 무엇이었나'
 

대학에 다닐 때 ‘여학생 조직’에서 일도 하고 ‘여성학’을 테마로 졸업논문을 쓸만큼, 나는 나름대로 여성주의 의식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던 사람이었다. 더욱이 운동을 하면서 만난 남자의 진보적인 생각들이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심했고, 그는 내가 더 열심히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사람이라는 믿음에 한치의 의심이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진보적인 남성은 ‘여성의식’도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이 근거없는 믿음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었다. 남편은 한국의 많은 남성들이 그렇듯 가부장적이었고, 한 술 더 떠 자기가 일을 더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내 임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그에게 나는 남편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못된 여자’가 되어갔고, 내게 그는 아내의 인생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남자’가 되어갔다. 그 균열은 아주 작고 사소해 보였지만, 절대로 회복할 수 없는 깊고 예리한 골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결혼생활은 채 2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들이 나나 남편의 부족한 됨됨이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억울한 점이 너무 많았다. 불만스러운 상황에서도 나는 결혼 생활 내내 평화롭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남편 역시 한국의 보통 남성들 속에 줄세워 봐도 철면피 같은 존재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혼 직후, 먼저 내게 대학원 진학을 권한 사람은 어머니였지만,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관련해 탐색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내 이혼은 한 개인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많은 여성들이 처한 현실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을 품고, 그것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끈질기게 책들을 헤집고 다녔다. 물론, 책들 속에서 해답을 찾지 못했지만 책을 통해 만난 무수한 여성학자들은 분명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또 그 과정 속에서 나름대로 내 안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여성의식이 얼마나 얄팍하고 부족한 것이었는지도 알았다. 무엇보다 과거, 결혼과 출산, 이혼으로 이어지는 경험이 내 인생에 무엇이었나를 되묻는 작업은 심리적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이런 경험들이 결국 나를 키우고 지금의 나를 형성시켰다는 것을 가슴 깊이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런 나의 중요한 체험들 속에서 느끼고 배운 귀중한 것들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정체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이끌어준 내 인생의 여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에 대한 상처와 피해의식을 딛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실패한 경험이 주는 상처는 트라우마가 되어 내 인생을 전면적으로 쥐고 흔들었다. 게다가 두고온 아이와 관련한 죄책감과 딸에 대한 그리움은 내 발목을 잡고 오랫동안 상처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때, 이런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해 도와준 존재는 바로 곁에 있었던 여성들이었다.
 
남들이 수군거리는 상황 속에서도 이혼한 딸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항상 지지해 주신 어머니, 자긍심을 회복하고 더 성장할 있도록 깊은 애정을 보여주신 은사님,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나아갈 방향을 늘 차갑게 일깨워 주었던 함께 생활하는 여자친구! 그녀들은 내 인생에 나침반 같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고 그 자리에서 내가 가려고 마음먹은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그녀들이 아니었다면, 결코 나는 지금처럼 씩씩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서 필진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큰 행운이었다. 일다를 통해, 발랄하고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들의 당돌함이 좋았고, 무모하다 싶을 만큼 저돌적으로 내닿는 발걸음들이 부러웠다. 내가 내 나이 또래 여성들보다 조금이라도 젊고 씩씩하다면 그것은 순전히 그녀들 덕분이다.
 
많은 젊은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일다의 색깔을 만들어 나가고, 일다의 역사를 엮어가는 과정은 매우 즐거웠다. 무엇보다 일다에 글을 쓰면서 나 역시 더욱 성장하는 경험을 했다. 초창기에 일년간 연재한 <다시 짜는 세상>은  오랫동안 집중해 온 학문으로서의 여성학을 구체적으로 현실에 접목시켜 볼 수 있었고, 몇 년 전 1년 반 동안 <딸을 만나러 가는 길>을 쓰면서는 딸과 관련해 얽혀있던 감정의 실타래를 잘 풀 수 있었다. 특히, 이 과정 속에서 만난 많은 독자들이 보내주었던 격려와 조언은 내가 세상에 더욱 튼튼히 발을 딛고 올곳이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상처들도 인생의 값진 한 부분이 된다

▲ 내 인생의 상처가 담겨있는 저고리를 바느질해 조각보를 만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은 어머니로부터 받아온 저고리를 가지고 바느질을 했다. 빨아서 솔기를 뜯고, 썩썩 잘라 만든 것은 조각보였다. 곁에서 자주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재봉틀 덮개로 쓸 요량으로 조금 긴 직사각형 모양의 조각보를 만들었다. 내 인생의 상처와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쓸모도 없는 저고리가 조각보로 재탄생되도록 꿰매고 박쥐 장식을 달고 하는 과정은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한 숙연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조각보를 만드는 내내 인생을 살면서 상처받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두려워 해야 할 것은 그 상처들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이 아닐까? 길을 잃지 않고 상처 속에서 잘 빠져 나온다면, 역시 그 상처는 매우 값진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인생은 모두 아름답다. 인생의 상처들은 아름다운 꽃봉우리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오롯이 혼자 힘으로 아름답게 피울 수는 없겠지만 분명 우리 속에 그 능력이 있음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완성된 조각보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다, 어머니의 장롱 깊숙히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 윤하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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