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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친절한 그녀의 행복바이러스에 감염되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08. 11. 26. 12:50

마이크 리의 영화 <해피 고 럭키>(2008)

<해피 고 럭키>. 제목을 보아 하니 영화만 봐도 행복해질 것 같았다. 행복한 일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요즘, 꼭 필요한 영화 같았다. 오랜만에 늦잠이 허락된 토요일 아침, 피곤에 찌든 몸을 일으켜 일찍부터 극장 나들이를 했던 것은 그만큼 내가 ‘행복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아, 행복해지고 싶어!
 
영화초반의 느낌, 한마디로 짜증난다
 
영화제목 “해피 고 럭키”(Happy-Go-Lucky)는 “태평스럽다, 낙천적이다”라는 의미의 합성어다. 이 영화의 주인공 폴린(애칭은 ‘포피’)은 제목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천하태평’에 무슨 상황에서도 ‘낙천적’인 서른 살 노처녀다. (포피 스스로 그렇게 말한 거니까 노처녀란 표현에 딴지 걸지 말길.) 영국 런던에서 비슷한 또래친구이자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조이와 동거하고 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기도 하다.
 

포피의 특기는 낯선 이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하며 말 걸기, 심지어 처음 본 사람에게 폴린이 아닌 애칭 포피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기, 자기에게 화내는 사람에게도 웃으며 농담하기, 주말이면 술에 절어 클럽에서 밤새워 놀기,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등등이다. 글로 써놓으니 그다지 이상할 게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포피를 보면 한마디로 짜증난다. 영화 초반엔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나 싶었다.
 
그러나 참 신기하다. 그녀의 또라이같은 행동엔 중독성이 있다. 영화를 보다 보니 어느새 나도 포피처럼 천하태평, 낙천주의자가 된 양 실실 웃음이 나는 거다. 극장 문을 나서면 나도 포피처럼 낯선 이를 만나더라도 “안녕하세요? 전 마법사예요.” 하고 인사를 건넬 수 있을 것만 같다. 인상 험악한 노숙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려도 “그래요, 알아요.” 하고 친절하게 대꾸를 할 것만 같다.
 
심지어 포피의 친절을 오해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다가 결국은 폭력적으로 폭발해버리는 운전연수교사 스콧을 보면서도, (평상시 같으면 그런 폭력적 상황에 불편함을 느꼈어야 마땅하건만) 그다지 불쾌하지도 그다지 상처받지도 않는 거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런 하해와 같은 이해심은 언제부터 생긴 거냐고!
 
포피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말다
 
물론 포피의 천하태평 낙천주의에서 비롯한 친절이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지도 않는다. 절대.
 
포피의 친절은 서점주인에게 낯선 불편함을 주었고, 스콧에게는 심지어 엄청난 오해까지 불러일으켰다. 사실,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은 포피보다는 스콧에 더 가까울 것이다. 낯섦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어떻게든 차이를 찾아내 겹겹이 벽을 둘러치기 급급하다. 사실 나를 둘러싼 겹겹의 벽은 허약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 스콧에게는 비위에 안 맞는 고객이라도 만나면 인종차별주의든 뭐든 그를 깎아 내림으로써 자신의 불안함을 감추려 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스콧이 충분히 이해된다.
 
인종이든 세대든 지역이든 오버해서 혐오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취약한 지점을 그들에게 투사함으로써 자기를 방어하고자 하는 것이다. 괜히 지역감정이 생겼고 괜히 인종차별, 성차별이 생겼겠냐고. 그래서 포피의 친절은 그저 그런 보통사람들에게 100% 친절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피의 친절,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그녀의 천하태평 낙천주의에는 강한 내면의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영화 도입부, 포피는 길가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서점에 들렀다 나와 보니 자신의 자전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필시 누군가 훔쳐간 것임에 틀림없다. 보통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게 자연스러운가? 나라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발을 동동 구르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육두문자를 동원해 허공에라도 욕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포피는 천하태평 낙천주의자답게 “어라, 어디 갔지?” 하고 한번 휘 둘러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포기하고 그냥 걸어서 집에 간다. 고작 “(자전거에게) 잘 가라고 작별인사도 못했는데…” 하는 아쉬움 정도나 내비치면서 말이다.
 
영화 초반에는 당연히 그런 포피가 이해가 안 갔다. “저런 또라이가 있나,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영화에 깊이 몰입하면서 포피의 “해피 고 럭키” 바이러스에 감염되니 그마저도 이해된다. 아니, 이해되는 수준을 넘어서 ‘잃어버린 자전거에 대한 집착 없음’이야말로 포피의 친절이 가진 힘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이었다고 해석하기에 이른다.
 
그녀에게는 집착이 없다. 아(我)와 타(他)를 가르는 경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친절할 수 있다.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게 반응하며 자신이 행복한 만큼 타인도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만이 있을 뿐이다. 평소 ‘집착 없음’은 어지간한 내공이 아니고는 가질 수 없는 도(道)의 경지라고 생각해 온 나로서는, 이제 포피의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못해 그녀에 대한 존경심마저 생기려 한다. 외부상황이나 타인의 반응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포피의 자기중심이 한없이 부러워진다.
 
동거인 조이한테 스콧에게서 당한 일을 이야기했을 때 조이는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언하지만, 포피는 “그럴 것 없다”고 답한다. 자신의 친절을 오해하고 그 때문에 거의 정신착란에 가까운 돌발행동을 하는 스콧이었지만, 누군가 훔쳐간 자전거처럼 포피는 그렇게 스콧을 내려놓는다. 그런 포피의 모습에서 자신의 친절을 거절, 혹은 오해하는 이들을 이해하려는 성숙한 성찰의 모습마저 발견하는 나. 오, 마이 갓! 포피 바이러스 감염 수준이 심각하군.
 
그 여자들의 ‘다른’ 친절을 배우고 싶어
 
이야기의 기승전결도 없이 천하태평 낙천주의자 포피의 일상을 따라가던 카메라는 포피의 일상 어느 즈음에서 멈췄다. 그렇게 영화는 끝났다. 포피는 아마 앞으로도 쭈욱 천하태평으로 낙천적으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해피 고 럭키”를 외치며 살아갈 것이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며 그 친절이 타인에 대한 성찰과 배려와 만나 성숙해지면서 말이다.

 
감독 마이크 리는 “낙천주의와, 성숙하고 지적이고 정돈된 방식으로 개인이 삶과 조응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단다. 감독의 의도는 이상하면서도 깜찍한 포피를 통해 충분히 전달된 듯하다.
 
매일매일 우여곡절을 겪고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복장 터지는 일을 마주치는 게 우리네 일상이다. “해피 고 럭키”하고 싶어도 못하는 숱한 조건들이 널려 있단 이야기다. 그래서 타인에게 친절하고 싶어도 친절할 수 없고, 더욱 더 두터운 벽을 둘러치느라 정신 없는 게 나다.
 
그러나 행복은 나를 불행하게, 불쾌하게, 화나게 하는 조건들이 없어진다고 오는 게 아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그런 조건들은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내 주변을 배회할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평정심을 가지고 이 삶을 마주할 수 있을까?
 
포피를 만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두 명의 여자가 떠올랐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에서 천진한 얼굴로 “헤픈 게 나쁜 거냐?”고 묻던 채현과,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에서 언제나 친절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던 사치에. 채현과 사치에, 포피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 친절함의 원인이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집착하지 않으며 아와 타의 경계가 없고, 그래서 자신의 친절이 누구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게 반응할 뿐이다.
 
나는 지금껏 친절이란 당연히 타인이 고마워하는 것을 보답으로 받고자 베푸는 “계산적 행동”이라 생각해 왔다. 그도 아니면 늘 남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상냥해야 한다고 세뇌 당해 온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억압의 단면이라 생각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 “친절한 사람”이었던 건, 그렇게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위선이거나 억압을 내면화한 뒤틀림이 싫어서였다.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사랑한다”며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신앙인들이 징그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위 영화에서 만난 친절한 여성캐릭터들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위선’ 혹은 ‘왜곡’이 아닌 “다른” 친절을 보여준다. 마이크 리 감독이 <해피 고 럭키>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성숙하고 지적이고 정돈된 방식으로 개인이 삶과 조응하는 방법’을 그녀들의 친절에서 발견한다. 그래서 헷갈린다. 친절이 좋은 거야? 그런 거야?
 
나도 그녀들처럼 친절하고 싶다. 그리고 “해피 고 럭키”하고 싶다. [일다] 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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