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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매력에 반하다

아이라는 고삐에 매인 여인의 초상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3. 11. 2. 09:00

박계해의 [까페 버스정류장]  어느 여인의 초상  

경북 상주시 함창읍 함창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카페 버스정류장”.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이 까페의 문을 연 박계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한 여자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 저자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느닷없이 철퍼덕, 하는 소리에 들고 있던 드립주전자를 놓칠 뻔하였다. 할머니를 따라온 네 살짜리 민이가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라떼 한 잔의 양만큼만 덜어낸 1000ml 우유팩이 바 위에 놓여있었는데 민이가 까치발을 하고 그걸 집으려다가 놓친 모양이었다. 놀라서 도망가려던 민이는 쏟아진 우유를 밟고 넘어져 버렸다. 맙소사!!!
 
나는 마른 수건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쏟아진 우유 위에 던지고 민이를 안아 일으켰다. 민이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넓게(!!) 흩뿌려진 우유를 닦아내느라 달랠 여유도 없었다. 민이의 우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달려와 주길 기대했지만 이층 맨 안쪽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인지 가까이 스피커가 있는 탓인지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민이엄마는 남편의 직장이 있는 수원 근처의 한 초등학교 교사다. 그래서 민이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다. 손자가 있으니 할머니라 부르지만 오십대 후반의 세련된 중년여성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안일을 마무리 한 다음 슬리퍼바람으로 와서 친구와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을 낙으로 삼는 그녀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야 하는 우리 카페의 불편한 구조를 고마워한다. 어린 민이가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에 더 없이 좋고 넘어져도 더러워지지 않는다며.
 
한 마디로, 내가 이 읍내에 카페를 차리면서 기대했던 풍경들 중 하나를 완성해 준 것이다.
 
그러나 우아한 할머니가 무릎에 어린 것을 앉히고 행복하게 차를 마시는 풍경은 한 시간에 십초를 보기 어렵다. 네 살이란, 나머지 오십구 분 오십 초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열량을 소모해야하는 뜨거운 생명체이므로.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카페란 분위기가 생명인데 손님이 있을 때 민이가 돌아다니면 나는 신경 한 자락을 붙들려 허둥대다가 유리잔을 떨어뜨려 깨거나 물을 쏟기도 한다. 민이 할머니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쨌든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마는 아이를 막을 도리가 없는 것이고 한편 내 주위에서 노는 것이라 안심이 되기도 할 것이었다.
 
나는 우유에 젖은 수건들을 마당 수돗가에 내던지고 재빨리 돌아왔다. 그 사이 또 다른 저지레를 할지도 모르니까.
 
물티슈로 민이의 발바닥을 닦아주며 크고(!) 엄한 목소리로 ‘민이, 할머니한테 가세요!’ 했더니 민이 할머니가 이층에서 후다닥 내려오셨다.
“아이구, 이 녀석이 또 사고 쳤지요?”
“하하하, 그게 민이 사업이지요, 뭐.”(本心 -아이 관리 좀 해주세욧!)
 
그녀는 민이의 머리에 모자를 씌운 다음 가슴에 꼭 안고 일어섰다.
“아이구, 내 새끼, 집에 가서 코~ 자자~.”
뒤따라 내려온 친구분은 민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니 할미는 이제 신세 조졌다.”
 
민이는 한 손으로 할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한손으로는 빠이빠이를 했다. 나는 마주 손을 흔들며 기꺼이 신세를 “조진” 한 여인과 할머니의 사랑을 실컷 받고도 왠지 모를 허기에 손가락을 빨아댈 어린 것, 그리고 자식과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매 순간 마음 저릴 젊은 엄마의 삶을 생각했다. 그리고,
 
신세를 “조진” 여인이었던 나의 어머니와 애정에 허기졌던 내 자식들과 그들에 대한 죄의식에서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했던 나를 떠올렸다.
 
아이가 엄마와 할머니에게 준 경이로움, 뿌듯함, 기쁨, 즐거움....... 들에 관한 행복한 이야기는 밤새 늘어놓아도 다 못할 것이지만, 아이라는 고삐에 매인 여인의 초상에는 다시는 자기 자신일 수 없을 것 같은 초조함이 서려있다.
 
어쨌건 민이가 떠나서 테이블보와 유리잔들은 안전해졌고 클래식 선율이 감도는 실내는 우아해졌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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